“평생 일군 농장 한순간에 쑥대밭” 예측할 수 없는 날씨에 막막한 농가
“손쓸수가 없었지...”
파주시 적성면의 한 축사에서 만난 한지훈(가명)씨 목소리에 허탈함이 가득했다. “자연이 벌인 일인데, 어쩔 수가 있나.”
한씨의 축사가 위치한 파주시 적성면은 지난달 17일 새벽 7시 시간당 80mm의 폭우가 쏟아졌다.
그 시각, 파주시 곳곳이 물난리를 겪고 있었다. 시청에서 한시간 동안 관측한 강수량은 4mm 정도였지만, 당시 진동면의 시간당 강수량은 66mm, 파평면 82.5mm, 장단면은 90mm가 기록됐다. 임진강 근처 기상청 측정기에는 시간당 100mm가 넘는 기록도 나왔다. 말그대로 ‘재난’이었다.
비는 이튿날까지 이어졌다. 파주에 살며 이미 세차례 물난리를 겪었던 한씨도 이번 폭우는 감당할 수 없는 ‘재해’였다.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비가 몰렸기 때문이다. 미처 대비할 새도 없었다.
한씨는 “한평생 일궈온 젖소 농가가 쑥대밭이 됐다”며 “축사에 물이 차오르고 풀과 사료가 물위에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보고도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라고 말했다. 비를 맞은 젖소 중 일부는 유방염이 생겨 한동안 우유 공급량에도 막대한 손해를 봤다.
농가 뿐 아니라 삽시간에 쏟아진 비로 집 일부가 무너지기도 했다. 산 비탈면에서 흙더미와 나뭇가지가 무너져내리며 인근 주택을 덮쳤다. 당시 파주시 법원읍 가야3리의 김선주 이장은 동네 주민 송대석(75)씨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이장님 밥 먹고 있었는데 퍽 소리가 나서 보니까 집 둑이 무너져서, 흙이 벽을 뚫고 들어왔어요. 냉장고도 밀리고…”
송씨의 집은 여전히 복구 중이다. 냉장고 옆에 있던 벽으로 흙이 뚫고 들어왔다. 풍선 터지듯 순식간에 벽이 무너졌고, 안방과 부엌에도 들어와 장롱과 화장대 모두 무너졌다.
이번 산사태로 법원읍에서 피해를 입은 가구는 4세대인데, 대부분 독거노인이었다.
예측이 불가능한 이상기후로 피해를 겪는 농가는 비단 한씨만의 일은 아니었다. 폭염과 폭우, 한파 등 이상기후가 잦아지면서 이제 경기도는 가축을 기르기 힘든 환경이 되고 있다.
이는 통계적으로도 나타난다. 재해에 따른 피해를 보장하는 ‘경기도 가축재해보험’ 지급액은 매년 확대되는 추세다. 농업정책보험금융원이 집계한 가축재해보험 사고유형별 보험금 지급 현황 분석 결과를 보면 지난 5년(2019~2023년)간 폭염으로 피해를 본 경기도 농가에 지급한 보상액은 평균 100억7천600만원에 달했다.
구체적으로는, 가축재해보험 보상액이 2019년부터 매년 134억8천200만원->64억7천600만원->96억9천600만원->74억5천600만원->132억7천만원을 기록했다.
금융원 관계자는 “폭염은 보험가입자 중 절반 가량만 가입한 특약이라는 점, 손해율에 따라 자기보상금이 20~40%의 편차가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해도 자연재해로 인해 전반적으로 보험 지급 건수와 보상액이 늘고 있는 건 맞다”라고 설명했다.
기후변화로 재난 대응하기 ‘어렵다’
“사실 운이 좋았습니다.”
지난달 18일 침수된 평택 세교지하차도 통행을 미리 통제한 임영훈 평택시청 도로정비팀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운이 좋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평택은 오전 9~10시 88.5mm의 비가 내렸다. 동시간대 경기도 최대 시우량(한시간동안 내린 강수량)을 기록했다. 당시 세교지하차도는 20분 만에 완전히 물에 잠겼다.
올해 여름, 경기도는 문자 그대로 ‘극한’의 비로 인한 피해가 잇달았다. 평택 지하차도 침수뿐 아니라 파주에서는 반년 동안 내릴 비가 이틀 사이에 내리기도 했다.
지난달 16일 오후 5시부터 18일 오후 2시까지 파주의 누적강수량은 639.5mm를 기록했다. 이는 파주 일년 강수량(1295.8mm)의 절반에 달하는 양이다.
취재팀이 만난 재난 대응 공무원들은 하나같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하차도를 제때 차단하지 못했다면? 지하차도에 예비 펌프 2대가 정상 작동하지 않았다면? 서해 물때가 높아 파주지역 하천 수위에 영향을 줬다면? 이런 최악의 가정을 하다보면 올여름 경기도를 강타한 폭염과 폭우 등은 인명피해가 없어 ‘그나마 다행’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고 했다.
이들 공무원들은 기후위기를 ‘공포’로 여겼다. 이유는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 이상기후 현상의 횟수와 빈도, 규모를 예측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도내 한 공무원은 “자연현상은 예측이 어려워서 적절한 규모로 예산을 편성하는 것부터가 어렵다”며 “예산을 많이 세워뒀다가 못쓰면 낭비지만, 필요한 만큼 예산을 늘리지 못하면 비상 상황에 대한 대처가 어려워 늘 딜레마에 놓인다”고 털어놨다.
급변하는 날씨에 “기후인플레이션 대비해야”
예측이 불가능한 이상기후는 밥상물가도 위협한다. 온난화로 인해 때에 맞지 않는 일시적인 더위와 추위가 반복되고, 국지성 집중호우가 잦아지면서 농산물 생산량과 재배적지가 수시로 변동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대급 한파의 여파가 이어진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 사과·대파 가격이 폭등했다.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 2020년과 비교했을 때 특정 품목의 소비자가가 차지하는 비율인데, 품목별로 보면 사과는 지난해 9월 165.87, 올해 3월 176.5를 기록했다. 대파의 소비자물가지수도 지난해 9월 116.08, 올해 3월 154.78으로 고공행진했다.
이처럼 급변하는 기후는 농산물 가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강수량, 기온 등 농산물 생육환경의 주된 요소가 기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상하지 못한 폭염, 서리 등은 과수 열병 및 냉해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가격변동으로 이어진다. 쉽게 말해 예측이 안되는 날씨로 어떤 현상이 벌어질 지 알수 없고, 그 결과 어떤 작물에 영향을 줄지 예상할 수 없어 결과적으로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애를 먹는다.
임영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기후 양상에 대해 “여러가지 위험요소가 커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기후 변화가 심각해진다는 것은 평년 기후와 다르게 기후 변동성이 커진다는 뜻이다”며 “최근에는 경기도에 말라리아 모기가 발생한 것처럼 한국에서 생존하지 못했던 곤충까지 생겨나 병충해 양상까지 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농산물 가격이 전반적인 물가 상승을 견인한다는 분석도 있다. 기후위기가 농산물 생산량에 영향을 미치면, 수요 공급 논리에 의해 국내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발표한 ‘기후변화가 국내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는 “폭염 등 일시적으로 기온이 1℃ 상승하면 농산물가격 상승률은 0.4 ~ 0.5%p, 전체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0.07%p 높아질 것으로 예측됐다”며 “기온 상승 충격이 지속된다고 가정하면 1년 후 농산물가격 수준은 2%, 전체 소비자물가 수준은 0.7% 높아지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