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감고 귀닫으며 무시하고 싶어도 지구온난화는 이제 ‘경기도온난화’다. 매년 여름을 겪어낼 때마다, 우리는 체감하고 있다. 화상을 염려할 만큼 여름 한낮의 태양이 두렵고, 소나기가 더이상 여름의 낭만이 아니라 공포라는 것을. 기상청은 기후정보포털을 통해 ‘기후변화상황지도’를 지역별로 제공한다. 기후변화상황지도는 기후변화국제협의체(IPCC)의 시나리오를 이미지화한 자료다. 재밌는 건 이대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을 때, 즉 고탄소 대기가 계속될 때와 탄소를 줄이기 위한 행동을 했을 때, 즉 저탄소 혹은 탄소중립을 노력할 때 달라지는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이 시나리오를 가상의 인물, 2024년에 경기도에서 태어난 한지은씨의 57번째 여름을 가정해봤다.
4월부터 시작된 여름, 끝이 안보인다
2081년, 2024년생 경기도민 한지은씨의 57번째 여름. 지은씨에게 여름은 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여름더위라는 말보다 지은씨에게 ‘폭염’이 더 익숙했다.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은 여름마다 찾아오는 ‘재난’이었고 나이가 들수록 ‘재앙’ 수준이 되고 있다. 여름은 점차 길어지더니, 이제는 일년 중 절반(181일)에 이르렀다. 여름의 시작도 4월로 앞당겨졌다. 재난 수준의 더위는 10월 말까지 이어졌다.
말 그대로 더위는 삶을 옥죄고 있다. 일 최고기온이 43.4도를 기록하는 것도 예삿일이 됐다. 지은씨의 57번째 여름내내 ‘역대 최장 폭염일수’ 기록은 갱신돼왔을 만큼 진절머리가 난다.
폭염을 피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도 대재앙이 돼버린 기후 앞에서 지은씨는 한없이 무력함을 느낀다. 일상을 위협하는 기후위기 현상이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갑자기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한씨는 소름돋는 일을 겪었다. 차를 타고 막 출근길에 올랐던 때다. “퍽”하는,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지은씨의 앞 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달리던 도로에서 땅꺼짐 현상이 생긴 것이다. 뉴스에서 보긴 했지만, 눈 앞에서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다. 지은씨는 공포에 바르르 몸을 떨었다.
이런 땅꺼짐 현상은 매년 수십차례 벌어졌다. 단기간에 비가 쏟아지는 이른바 ‘스콜성 소나기’가 빈번해진 뒤로부터였던 듯 하다.
지은씨가 겪은 이상기 현상은 이뿐만이 아니다. 하루에 내리는 최대 비의 양(206.5mm)이 ‘눈에 띄게’ 많아졌고 경기도의 연평균 기온은 17.6도를 기록해 덥고 습한 날씨가 계속됐다.
겨울은 따뜻해졌다. 10년 전쯤부터였을까.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는다. 지은씨가 태어났던 해와 비교하면 겨울은 절반 가까이, 가을은 열흘 정도 짧아졌다. 겨울이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기상청 기후변화상황지도 고탄소를 기반으로 가상 시나리오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현재와 비슷하게 유지될 경우 이르면 57년 뒤 경기도민에게 닥칠 ‘현실’이기도 하다. 더이상 기후위기는 SF 영화가 아니다. 논픽션이 됐다.
모두가 실천한 온실가스 저감, 그 효과는
현재 날씨와 차이 없는 저탄소 시나리오
탄소중립 헌법 불합치, 아시아 최초 판결
2031년 이후 온실가스 감축 목표 세워야
지금부터라도 온실가스 배출 저감을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달라질까. 저탄소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지은씨 일상을 다시한번 재구성했다. 저탄소 시나리오는 온실가스를 현저히 감축하여 2070년께 탄소중립에 이르는 경우를 가정한다.
지은씨가 사는 2070년 경기도는 5월부터 여름이 찾아온다. 보통 5월18일이 되면 일 평균 기온이 20도까지 올라 며칠 간 이 수준을 유지한다. 넉달 가까이 여름이 이어지는데, 9월말이면 날씨가 선선해진다. 여름의 길이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고 유지된다.
일년 중 한달(31.6일)은 폭염이다. 일 최고 기온이 38.5도를 기록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지은씨는 어느덧 이정도 더위는 익숙해졌다. 한씨는 매해 비슷한 수준의 찜통더위를 경험하며 살아왔다. 폭염이 이어지며 열대야도 한달 가까이 지속된다. 그래도 이제 어느 정도 폭염에 대처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됐다.
겨울에는 매해 일주일 정도 한파가 이어진다. 어릴 적보다 빈도수가 절반 가까이 줄었지만 강도는 세졌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결빙 소식도 종종 들려온다. 결빙일수를 세어보면 일년에 11일 정도 지속되는데, 지은씨가 어렸을 때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
경기도에 사는 우리가, 한국에 사는 국민들이, 전세계 사람들이 지난 몇십년간 저탄소를 꾸준히 노력한 덕에 ‘더’ 나빠지지 않고 유지할 수 있게 됐다는 나름의 ‘해피엔딩’이다.
IPCC의 기후위기 시나리오는 역설적이게도 경고와 희망의 메시지를 동시에 던지고 있다. 경기도온난화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가 됐다는 걸 경고하면서도, 다만 노력 여부에 따라 기후위기가 진행되는 속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마침 정부가 기후위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야한다는 취지의 헌법재판소 결정도 최근 나왔다. 지난 29일 탄소중립법 8조1항은 헌법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이같은 결정은 정부가 2031년 이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설정하지 않은 건 국민의 기본권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는 조처라는 판단이다. 아시아 국가 중 최초의 법원 판단이다.
정부는 향후 헌재의 판결 취지를 반영해, 지금보다 강화된 기후위기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현재 정부는 2030년까지 국가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에 비해 40% 줄이겠다고 했지만, 그 이후에는 아무런 기준이 없는 상태다.
기후위기소송 대리한 변호인단의 김영희 변호사는 “일부 위헌 판결이 났지만, 전제된 사실을 보면 헌법재판소 역시 기후위기 심각성을 인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후속법 개정 과정에서 기후위기 대응 정책을 보다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함께 한 이병주 변호사도 “독일연방기후보호법 3조를 독일연방의회에서 개정하면서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1990년 대비 55%에서 65%로 강화했다”며 “독일연방기후보호법도 한국 기후소송과 마찬가지로 일부 위헌 결정이 났지만, 사실상 전부 위헌의 효과를 냈다”고 했다.
전문가들이 바라본 기후대응책
시민들의 인식 변화 필요… “불편함 감수”
온열질환 환자 등 약자 위한 안전망 구축
지구온난화 속 밀 자급률 높일 방안 마련
‘인식변화’ ‘사회적대응’
전문가들은 기후위기 속도를 늦추기 위한 저마다의 방법을 제시했다. 농산물, 질환, 생태계 등 이상기후가 영향을 미치는 분야에 따라 구체적인 해법은 달랐지만, 취재팀이 만난 전문가들의 공통된 목소리는 ‘우리의 인식이 변해야 하고’ ‘국가·사회 전체의 종합적인 대응이 절실하다’, 2개의 키워드였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진단한 기후위기 실태와 대책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임영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개인의 인식이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불편함을 좀 감수해야하는거죠. 예를 들면, 농산물 같은 경우도 저탄소 농축산물 인증 제도가 있거든요. 그런데 국내 시장이 너무 작습니다. 사람들이 기후변화를 생각하고 체감하는 것만큼, 이런 가치소비를 해야합니다. 국민 인식이나 소비 체계, 나아가 생활 패턴이 바뀌어야 합니다.”
강재헌 강북삼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온열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대응을 주문했다. 온열질환은 예방이 중요하다는 취지다.
“온열질환자 증가에 대해선 의학적 인프라보다 (사람들이)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작업환경을 개선하거나 취약계층 혹서기 쉼터 등을 충분히 마련하는 게 도움이 됩니다. 농촌, 작업장 등에서 온열질환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안전망을 강화하는 게 절실합니다.”
윤순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는 지구온난화가 영향을 미친 사회 곳곳의 변화를 짚어냈다.
“한라산, 지리산 고산지대에는 구상나무가 사는데 이 구상나무는 낮은 온도에서 사는 한반도 고유종입니다. 낮은 온도에서 서식하다보니 보통 산 꼭대기에 사는데 기온이 올라가며 중턱이나 아래 사는 식물들이 산 위로 올라가고 있거든요. 그런데 구상나무가 이제는 더이상 올라갈 곳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밀 자급이 안됩니다. 세계적으로 밀 수확량이 떨어져서 밀값이 올라가고 있어요. 한국인들이 밀로 된 걸 많이 먹는데, 이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습니다. 한국의 식량 자급률이 20% 아래로 떨어졌는데… 이런 나라는 앞으로 더 심각할 것입니다.”
그는 지구온난화에 대비하기 위한 발빠른 움직임이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강수량과 온도가 너무 빨리 올라가니까 (자연도, 사람도) 모든게 적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기후위기를 막는다는 건 늦은 일이고요. 지금이라도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속도를 늦추는 수 밖에 없습니다.”
2081년 당신의 여름을 위해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