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수도권 억제 정책' 극복 관건
대한민국 미래 바꾼다는 명분 설득
1994년 9월 10일, 대통령 참석 첫 삽


송도신도시 기공식
1994년 9월 10일 인천 송도신도시 기공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최기선 전 시장. /경인일보DB

초고층 아파트 단지와 부러울 것 없는 공원, 유수의 첨단 바이오 기업과 국내외 유명 대학이 들어선 송도국제도시. 이국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이 도시가 불과 삼십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닷물이 빠지면 시커먼 갯벌이 고스란히 드러나던 바다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바다를 메워 지도를 바꾸는 일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구상은 당시 기준으로 '전무후무한 역사(役事)'에 가까웠다. 1994년 9월10일 첫 삽을 뜨기 전까지 이 일은 '무모한 도전' 혹은 '가능성 제로'의 일로 치부됐다.

정부의 수도권 억제정책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수도권 인구 집중을 해소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정부 방침대로라면 인천은 성장해선 안되는 도시였다. 정부 투자는 물론 민간의 투자 또한 불가능했다.

1986년 인천시 도시계획국장을 맡아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박연수 전 소방방재청장이 "인천은 미래를 차단당한 도시였다"고 설명한 이유다. 인천의 발전, 인천의 확장을 내세워선 안됐다.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인천이 아닌 대한민국의 지도와 미래를 바꾸겠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설득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인천국제공항과 송도신도시 등을 아우르는 '동북아국제비즈니스 중심도시 프로젝트(안)'(1986)다. 홍콩·싱가포르를 능가하는 아시아 비즈니스 허브 역할을 할 '최첨단 정보화 신도시'를 만들고, 이 도시와 전 세계를 연결하는 첨단 허브 공항을 확보하면서, 국제공항이 입지한 영종·용유·무의도에 매력적인 종합 관광 휴양단지를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매번 인천의 구상을 제대로 경청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설득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대통령 등이 이 계획을 보고 받았다. 1986년부터 1994년까지 박배근(3대)·이재창(4대)·심재홍(5대)·박종우(6대)·최기선(7대) 등의 관선 시장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던 1994년 9월 10일 '인천송도앞바다 매립 신도시 조성 기공' 현수막이 걸린 기공식 현장에 참모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참석한 김영삼 대통령과 최기선 인천시장 등의 모습이 보였다.

최기선 인천시장은 자서전에 이 날을 "인천의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더 크게는 대한민국의, 더 넓게 보면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전망이 탄생하는 날"이었다고 설명했다. 송도 매립은 그렇게 시작됐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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