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과 보전' 가치로 본 50년 역사


'한강의 기적' 이루기 위해서는 팔당댐 건설 필연적
수력발전소 유리한 지형… 수자원도 풍부한 최적지
자본·기술 부족한 때, 프랑스 도움받아 1973년 완공

이면엔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 수몰된 이들의 아픔도
"필요에 의해 만들긴 했지만 형벌같은 비양심의 호수"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기 위해, 팔당댐 건설은 필연적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후복구를 해야 했다. 숱한 전쟁의 역사에서 보듯 내전이 일어난 땅은 상흔을 씻어내기 어렵다.

전쟁이 남긴 굶주림, 가난을 벗어나려 서울을 위시한 수도권 곳곳에서 각종 산업과 개발이 일어났고 인재가 몰려들었다. 기반이 필요했다. 전기와 물이 절실했고 팔당은 이를 충족하는 매력적인 지점이었다.

팔당댐
광역5단계 상수도사업의 일환으로 경기, 인천 주민들에게 맑고 깨끗한 수돗물을 공급하게된 팔당댐. /경인일보DB

■ 가난한 시절, 경제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팔당댐

"1965년부터 1978년까지, 경제개발을 해야 되는 시기였어요. 주로 한강수계 쪽에 전력 공급을 목적으로 한 발전용 댐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준공이 됐습니다. 그 중에 팔당수력발전소는 서울 중심부, 시청을 중심으로 동북방으로 35㎞ 지점에 설치됐고 잘 알다시피 팔당댐 상류 7㎞ 위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양수리에서 물이 합쳐져 7㎞ 하류에 연결됐죠. 그게 팔당수력이 위치한 자리입니다."

윤준희 팔당수력발전소장은 팔당댐 건설의 비하인드를 이렇게 설명했다.

"팔당수력은 좌측에 예봉산이 있고 우측에 검단산이 있습니다. 두개의 산이 만나 골짜기가 형성되고 암반이 있어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죠. 그리고 남한강과 북한강 물이 합류되며 수자원이 풍부했습니다. 이렇게 지리적 위치여건이 좋아서 최적지로 선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구상하던 1960년대 우리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수도권을 책임지는 수력발전소 건설지로 팔당을 집어내고 설계한 것도 프랑스의 도움이 컸다.

"한국전력공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전업이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조선전업에서 당시 주한프랑스 대사에 한강계 수력발전소 건설 지점을 조사할 수 있는 기술자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죠. 그렇게 1963년, 프랑스 정부가 한강유역 전원 개발 지점을 조사했고 기본설계 용역까지 맡았습니다. 1966년 6월, 팔당수력발전소가 본격 착공을 시작해 73년 12월 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7년6개월이 걸렸습니다."

1966년 팔당댐 관련기사
경인일보 1966년 6월 10일자 1면에 실린 팔당댐 관련 기사. /경인일보DB

우여곡절도 많았다. 당시 우리는 최빈국이었다. 자본도 기술도 없을 때였다. 댐 건설은 상당한 기술과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한 고난이도 공사였다. 가진게 없었지만 반드시 건설에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이 있었다.

"빈곤국이다 보니, 자본이 없어 프랑스에 차관계약을 맺었고 주요 기기인 수차와 발전기를 프랑스산으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댐을 건설하고 주요 기기를 설치하는 작업은 그래도 국내 업체가 시행할 수 있게 돼 프랑스와 합동으로 진행했는데 아마 이 (팔당수력) 프로젝트가 최초의 국가합동공사죠. 당시 자료를 보면 그때 총 외자 1천408만달러, 국내 예산이 당시로 140억원 정도 소요됐습니다. 공사에 투입된 연인원이 157만명에 달했구요."

"이 공사가 한강을 가로지르는 공사이다 보니까 수심이 거의 9m 이상 나오고 홍수가 나기도 해서 어려웠어요(실제로 건설기간동안 4차례의 홍수를 겪었다). 흙으로 가물막을 설치해서 흐르는 물을 막고 그 아래로 댐을 건설하는데, 69년과 72년도에 비가 워낙 많이 와서 가물막이 다 유실되고 기자재들이 많이 떠내려 갔습니다. 또 비가 오는 때와 오지 않는 때 하상의 높이가 워낙 커 당시엔 굉장히 난(難)공사였을 겁니다."

팔당댐 수질오염조사 시설
1991년 4월 팔당 수질오염공해조사 시설. /경인일보DB

■ 개발논리에 수몰된 자연·사람들

국가 산업발전의 명운을 건 팔당댐이 건설되는 이면에, 불행히도 팔당이 본래 지닌 생태계의 변화에 대해선 따지지 못했다. 심지어 조상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땅이 수몰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런 것을 재고 따질 형편조차 되지 못했다.

한강은 태백산맥을 타고 예봉산과 검단산으로, 다시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한반도의 허리를 타고 흐른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수천년을 흐르던 물줄기 안에는 그에 걸맞은 생태계가 있었다. 그 물줄기의 한 덩어리를 막은 게 '팔당댐'이고, 막아낸 물이 고여 '팔당호'가 됐다.

팔당호 수질 및 수생태계를 연구하는 한강물환경연구소 강태구 소장도 댐 건설 전과 후, 생태계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팔당은 원래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태백이 발원지인 남한강, 광주와 용인에서 흘러나오는 경안천이 만나서 만들어진 하천이었어요. 쉬리 같이 여울성 물고기들이 주로 살았죠. 흐르는 물이 유입되는 팔당 상류에는 아직 여울성 물고기들이 살고 있지만 댐이 형성되고 팔당호 내에는 완전히 정수성 어종으로 바뀌었어요. 벌써 댐이 만들어진 지 수십년이 지났으니까요."

팔당유원지 인근 상가
1991년 8월 팔당유원지 주변 상가. /경인일보DB

살던 곳을 빼앗긴 건 비단 팔당 하천의 물고기들뿐이 아니다.

"팔당댐을 보고 있으면, 개인적으로는 만감이 교차해요.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우리네(수몰민들)한테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형벌같은 것이에요. 우리에겐 비양심의 호수입니다."

1963년생인 노국환씨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팔당댐이 생겼다. 양평 양서면 질울고래실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노씨는 현재 마을의 일부가 댐 건설로 사라졌다. 그래도 오랫동안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노씨에게 어린 시절 마을의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우리 마을에 흐르던 그 강이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어요. 구조가 어땠냐면 논밭이 있었고 갈대밭이 있고 그 사이에 모래사장이 있었고 강이 흘렀어요. 강 폭이 좁고 얕아서 저녁이 되면 다슬기가 밖으로 나오기도 했죠. 주전자에 다슬기를 꽉 채워서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하고, 새우랑 고기도 잡았어요. 서울 사람들도 여름이 되면 놀러와서 여름을 나기도 했거든요. 지금은 그 논밭, 갈대밭, 모래사장이 전부 물 속으로 들어갔고 물이 꽉 차서 넓은 호수가 돼 버렸지만."

1994년 팔당호 안개
1994년 6월 30일 팔당호 안개피해. /경인일보DB

■ 매번 충돌하는 두가지 가치 '먹고사는 일과 보전'

정주공간이 사라지고 아예 떠난 주민도 있지만, 여전히 댐 인근서 고향을 지키는 주민들도 상당하다. 평범한 농부였거나 혹은 강을 오가던 뱃사공같이, 주어진 자연환경 안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던 주민들은 댐 건설 이후 삶이 통째로 바뀌었다.

국가 발전을 위해 인공적으로 '개발'된 팔당댐으로 인해 주민들의 모든 행위에 제동이 걸려서다. 새롭게 조성된 자연환경을 지키라는 요구 때문이다.

경제개발로 수도권은 나날이 인구가 팽창한다. 수도권 시민들의 먹는 물 안전을 위해 팔당을 둘러싼 대부분의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이 됐다. 물길을 막아 자연의 섭리를 사라지게 해놓고, 새로운 자연은 지켜내야 하는 '이중고'가 팔당을 둘러쌌다.

1997년 팔당댐 쓰레기
1997년 7월 7일 팔당댐 쓰레기 환경오염. /경인일보DB

실제로 댐 건설 후 50년이 흐르는 동안 팔당은 거의 매일 '먹고사는 일(개발)'과 '환경보전'이 대립해왔다.

1997년 10월10일자 경인일보에는 '팔당호야 썩든 말든 … 경기도 민선 이후 오폐수 업소 3천300여곳 허가' 기사를 통해 하수처리대책 없이 팔당호 주변에 마구잡이로 아파트 건설을 사업승인하고 식품접객업소, 숙박업소 허가를 해주고 있어 팔당호 수질이 악화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1997년 팔당상수원
1997년 6월 2일 팔당호에 세워진 팔당 상수원 보호 안내문. /경인일보DB

1998년 5월22일자 '팔당상수원 3급수 악화 하남시도 책임' 제하의 기사에는 2천만 수도권 시민의 식수원인 팔당상수원이 3급수로 떨어진 책임에 하남시가 단속내용을 통보받고도 조치하지 않아 직무유기로 비난을 받고 있다고 했다.

다른 한편엔 1998년 5월 19일자 '상수원 관리비, 수혜자 부담 전환을' 기사는 팔당호 인근 지자체와 주민들의 고통이 담겼다. 경기도와 팔당호 주변 이천, 용인 등 7개 시군 및 주민들이 팔당호 관리비용 부담을 오염원인자 부담원칙에서 상수원 수혜자 부담원칙으로 전환해 서울·인천 등과 분담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1997년 팔당상수원
1997년 6월 2일 팔당상수원 방류. /경인일보DB

또 같은 해 5월22일자에는 '팔당댐 하류 수질악화 환경부 잇단 발표 "불순한 의도" 주민 반발' 제하 기사에 환경부가 팔당댐 하류지역까지 수질보전구역으로 지정키 위해 수질악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주민들의 반발을 담았다.

/이종우·공지영·이시은기자 jyg@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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