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4)] 광복 - 안양 양명고교 현대식 건물 사이 '안양기독보육원'
일제강점기·한국전쟁 기간 고아 보살펴
과거 교직원 사택 용도 사용… 현재 방치
폭격 폐허 복구 미군 관계자 참여 가능성
오긍선 박사 설립 역사적 가치 충분하지만
학생들 의미 알지 못해 문화재 지위 위협
안양시 양명고등학교 건물들 옆 한 귀퉁이에 낯선 석축 건물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비닐로 감싸진 지붕에 크기와 모양이 제각기인 돌이 박혀있는 벽면, 벽면 사이 솟아있는 굴뚝까지. 요즘엔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형식의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53년께 지어진 '안양기독보육원 의무실'이다. 지난 4일 찾은 안양 양명고등학교에서 이 건물을 찾아내긴 어렵지 않았다. 테니스장과 음악실을 지나치자 나온 부지에 누가 봐도 역사성을 지닌 건물이라고 추정할 만큼 뜬금없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식 건물들 옆으로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의무실 건물만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의무실 건물은 지난해까지는 학교 직원의 사택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용도를 잃어버린 상태다. 건물 외관을 자세히 살펴보니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지붕을 받쳐주는 목자재 곳곳에 빈틈이 보였다. 이곳의 역사적 가치를 알려주는 유일한 흔적은 건물 입구 쪽 창문 밑에 박혀있는 정초석이다.
정초석 또한 세월을 맞아 대부분의 글자가 지워진 상태다. 정초석에 있는 희미한 글자는 'IN HONOR OF MAJ HUGH T. TORRANCE OWO GUY T. HAWHEE'인 것으로 추정('MAJ'와 'OWO'는 명확하지 않은 글자)된다.
인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안양기독보육원의 설립자인 오긍선 박사가 미군과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미군관계자가 시공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의무실 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복도로 연결되는 구조다. 각각 진료실, 입원실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중 입원실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내부엔 3개의 방과 화장실, 주방으로 쓰인 흔적이 남아있다. 다른 건물은 쓰이지 않은지 오래돼 잡동사니들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양명고등학교 안에 안양기독보육원의 흔적이 또 하나 남아있다. 안양기독보육원의 사무실로 쓰였던 건물이자, 현재 학생들의 음악실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다.
해당 건물도 의무실 건물과 같이 석축 건물로 외관은 같은 형식으로 지어졌다. 돌로 된 벽면과 기와 모양 지붕, 굴뚝까지 갖춰져 있다. 다만, 음악실로 쓰기 위해 리모델링을 거쳤기 때문에 내부는 영락없는 현대식이다.
사실 이 두 건물 옆에 자리잡고 있는 양명고등학교 체육관과 테니스장 또한 안양기독보육원의 흔적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져버렸다. 체육관 부지에는 당시 보육원 아이들의 집이었던 목조 건물들이 있었고, 테니스장에는 안양기독보육원 예배당이 있었다고 한다.
예배당은 1980년대 초 즈음에 철거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목조건물은 체육관 건립이 시작되던 2018년부터 해체에 들어갔다.
안양기독보육원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6·25 전쟁을 거치며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보살펴줬던 공간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먹고, 자고, 공부하고, 사회로 홀로 나가기 위한 자립을 준비했다.
안양기독보육원의 전신은 경성보육원이다. 오긍선 박사는 1919년 1월 윤치호 등과 함께 경성고아구제회를 조직하고 1922년 경성보육원을 설립했다. 3·1 만세운동 이후에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이 더 많아져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됐던 시기였다.
경성보육원은 처음에는 11명으로 시작했는데 원아의 수가 점점 많아져 옥천동에 있는 9천900여㎡(3천여평)의 대지와 가옥을 매입해 이주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오긍선 박사는 안양에 26만4천여㎡(8만평) 부지를 매입해 보육원을 확대 이전한다.
당시 해당 부지는 일본인 오키이 소유의 농장 중 일부였는데 오긍선 박사가 부지를 매입해 원아 숙소와 농장, 강당, 진찰실, 목욕탕 등을 갖춘 시설을 지었다.
이렇게 자리를 옮기며 경성보육원에서 안양기독보육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 것이다.
미국과 일본 유학으로 선구적인 의학 기술을 배워 한국에서 최초로 피부비뇨기과 교실을 시작했던 인물인 오긍선 박사는 원아들을 돌보는 데에 본인의 의술을 투자했다.
1·4후퇴 당시 원아들과 함께 거제도 근처의 가덕도로 피난갔다가 다시 안양으로 돌아와 의무실을 신축했던 이유다.
보육원은 폭격을 당해 폐허가 돼 있었지만 오긍선 박사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서둘러 농사를 재개하고 복구작업을 진행했다. 건축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외국에 있는 지인들과 미군부대에 도움을 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게 안양기독보육원은 일제강점기부터 갈 곳 잃은 아이들의 물리적이고도 심리적인 터전이 돼주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시인도 오긍선 박사와의 인연으로 안양기독보육원에서 말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1974년 해송고등학교(현 양명고)가 개교하면서 안양기독보육원은 양명고 안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안양기독보육원은 현재 해관재단 좋은집이 사회복지시설로서 그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위치 상으로 보면 1번국도 경수대로 서측 박달우회로 고가차도를 중심으로 남쪽에는 양명고가 있고 북쪽에는 좋은집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은 나뉘어져 있지만 양명고 안에 덜렁 남아있는 안양기독보육원 의무실 건물도, 음악실로 쓰이고 있는 건물도 그 역사적 가치는 충분하다. 건축적으로도 당시의 양식 건축 기법을 볼 수 있으며, 역사적 의미 또한 건물에 깃들어 있다.
문화재로 인정하느냐는 한 끗 차이가 문화재의 보존과 방치를 가른다. 음악실을 드나들고 있는 학생들조차 이 건물의 역사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 건물이 역사적 가치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