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건축기행·(19)] 강원도 풍수원 성당


1801년 신유박해때 용인·이천 지역 순교자 유가족 40여명 정착
옹기 구워 팔며 생활 꾸리다 박해 계속되자 더 많은 신도들 모여
서울 '약현성당' 참고 설계한 정규하 신부, 신도들과 1910년 완성
바실리카식 본채·로마네스크식 천장·고딕식 버트레스 등 적용


풍수원
풍수원 성당의 정면. /횡성군 제공

풍수원 성당은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 유현1리 30에 터를 잡았다.

해마다 전국에서 1만여명의 천주교인들이 찾는 성체헌양대회에 참여한다. 1920년에 시작해 6·25전쟁 기간 3년을 제외하고 해마다 열리고 있는 성체현양대회는 올해 6월 제101회 대회를 성대하게 치렀다.

풍수원 성당은 한국인 신부가 지은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다. 서울 약현성당, 완주 되재성당,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 이어 국내에서 네번째로 오래된 서양식 성당이며, 강원특별자치도 내에 세워진 첫 번째 성당이기도하다. 1982년 1월3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됐다.

풍수원 성당은 갖가지 수식어 만큼 다양한 면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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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풍수원(豊水院)은 '물이 풍부한 곳에 있는 관청'이란 뜻으로 역원(驛院)이 있던 곳이다. 역(驛)은 고려와 조선 시대 때 말을 갈아 타거나 쉬던 장소이고, 원(院)은 관원들이 공무로 다닐 때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이었다.

신유박해 때인 1801년 치신처를 찾아 떠돌던 경기 용인, 이천 지역 순교자 유가족 40여명이 정착했다. 이들은 척박한 땅을 개간해 옹기를 구워 팔며 생활을 꾸렸으며 박해가 계속되자 더 많은 신도들이 풍수원으로 숨어들면서 점점 큰 신앙 공동체가 됐다.

풍수원에 머물던 신도들은 신부나 성직자 없이 80여년 동안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1888년 본당을 설립, 초대 르 메르(Le Merre) 신부가 부임했다. 이후 1896년 2대 본당주임 신부가 된 정규하 신부(아오스딩)는 선종때까지 47년 동안 성당을 이끌었다.

우리나라를 통틀어 세번째 신부인 정규하 신부는 1896년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강도영·강성삼 신부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서품을 받았다.

초가집 여러 채를 이어 성당으로 사용하던 풍수원은 신앙 공동체가 커지자 성당 건립이 필요해졌다. 정 신부는 1907년 국내 최초 고딕양식이던 약현성당처럼 풍수원에 성당을 짓기로 하고 벽돌공을 수소문, 명동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중국인 건축업자 진(陳) 베드로를 찾았다.

진 베드로와 함께 약현성당을 찾아 구석구석을 살피며 새 성당 건축을 구상한 정 신부는 벽돌공과 신도들의 힘을 모아 뒷산 흙으로 벽돌을 굽고, 주변 나무를 목재로 다듬어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0년 드디어 한국인 신부가 설계해 신도들과 함께 건축한 최초의 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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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 성당 전경. /횡성군 제공

■ 풍수원 성당의 구성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이 결합된 풍수원 성당의 전면 중앙에는 종탑이 솟아있고, 신도들이 앉는 자리는 세 부분으로 정돈됐다. 제단은 예전에 사용하던 목조 제단과 요즘 사용하는 제단이 공존하며 시간의 흐름을 전한다.

성당 왼쪽에는 고풍스런 2층 벽돌조 건물인 성당 역사관이 있다. 등록문화재 제163호인 이 건물은 1912년 건립된 사제관으로 1층은 성당 주변 아이들을 위한 학교 '삼위학당'으로 쓰였다. 정규하 신부는 일제 식민지 때 마을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1997년 이후에는 사제관을 유물 전시관으로 바꿔 320여점 유물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

성당 뒤편에는 성체현양대회 미사를 봉헌하는 성모동산이 있다. 주변에는 초기 천주교 신도들의 주요 생활수단이었던 옹기와 가마터, 초가집, 쉼터가 흩어져 있다. 성모동산 옆에는 횡성군이 건립한 유물전시관이 있어 생활용품 등 다양한 민속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부담스럽지 않은 산과 개울, 마을과 초가집, 우뚝 솟은 성당과 역사관, 오솔길과 수목원, 성체현양 동산과 성모동산, 성모상과 예수성심상은 풍수원 성당을 더욱 신성한 곳으로 인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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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 성당 유물 전시품. /횡성군 제공

■ 건축


=풍수원 성당의 대지 면적은 6천756㎡이다. 건축면적은 311.27㎡이며, 전체 건평은 396㎡이다. 평면은 11.7m×29.75m이며 지붕은 8.76m, 종탑은 21.78m 높이로 지어졌다. 건축 양식은 바실리카식 본채와 로마네스크식 천장에 고딕식 버트레스 및 종탑이 적용됐다.

구조는 연와조 적벽돌과 회색벽돌을 영국식으로 쌓았고 지붕은 목조 트러스 위에 동판을 이었고, 천장은 목조 볼트 위에 회반죽으로 마감했다.

성당 본채는 3중 아치 현관으로 만들어졌다. 약간씩 오차를 두어 조금씩 안으로 들여 쌓은 아치는 주로 성당이나 대저택의 커다란 현관의 의장 효과를 위해 쓰는 기법이다. 풍수원 성당의 현관은 장엄함보다는 단정하고 정성스런 느낌을 주어 편안함과 친근함을 형상화했다는 평이다.

아치 현관으로 위에는 장미창(Rose window)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꽃잎형의 장식 격자(Tracery)에 스테인드그라스를 끼워 넣은 원형의 창이다. 고딕 건축의 백미라고 불린다. 원래는 쌍두탑 웨스트위크의 가운데 부분 3층 중앙부를 장식하는 것이다. 성당안에서 장미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보면 무지개빛 태양처럼 장엄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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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 성당 옹기 전시품. /횡성군 제공

성당 정면 3, 4층은 더블 아치(Double-arch)이다. 쌍둥이 아치라고도 불린다. 흔한 창문 장식의 기교이다. 풍수원 성당의 더블 아치는 창문 눈썹에 이중 들여쌓기 기법을 함께 사용해 단정하고 깔끔한 느낌을 만든다. 종탑의 3층과 4층에는 각기 다른 더블 아치 디자인을 만들었는데, 전체적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풍수원 성당을 옆에서 보면 피너클(Pinnacle)들이 쉽게 발견된다. 로마네스크· 고딕 건축에서 주로 쓰이는 장식용 소첨탑이다. 버트레스나 첨주(添柱)의 꼭대기 장식으로 흔히 쓰인다.

버트레스(Buttress)는 부벽(扶壁) 또는 버팀목이다. 벽을 지지하기 위해 만든 버팀용 외부 구조물이다. 특히 아치 & 볼트로 될 돌 지붕의 육중한 떠밀림을 견디기 위해 고안한 부가적 벽돌쌓기 형식으로 고딕 건축 양식의 핵심 특징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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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 성당의 가을 정취. /횡성군 제공

풍수원 성당에는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에서 동쪽에 위치한 성단소(Apse) 부분을 일컫는 이스트 엔트(East-end)가 있다.

또 고딕 건축에서 서쪽 출입부의 쌍두탑 형식을 이르는 웨스트워크(Westwork)가 있다. 이는 약현성당, 명동대성당, 풍수원 성당 등 한국형 성당에서 외종탑 파사드로 새로운 형식을 만들었다. 파사드는 건축물의 입면 또는 정면으로 외관상 주도로나 광장에 연결된 주출입구가 있는 면을 일컫는다.

풍수원 성당에는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공간으로 사제석 또는 성단소라 불리는 앱스(Apse)가 있다.

실내에 들어서면 천장 혹은 지붕을 무지개 모양의 반원형 터널로 만든 배럴 볼트(Barrel vault), 그 아래 중앙부분 회랑을 이르는 신랑(身廊) 네이브(Nave), 신랑의 양쪽 가장자리에 있어 줄지어선 기둥에 의해 구분되는 측랑(側廊) 아일(Aisle)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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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 성당 유물 전시관. /횡성군 제공

지금은 유물 전시관으로 사용되는 옛 사제관은 1912년 중국인 최 바오로가 지은 조적조 벽돌 슬래브 건물로, 2005년 등록문화재 제 163호로 지정됐다.

풍수원 성당의 건축 양식은 여러가지가 뒤섞여 있다. 바실리카 양식과 로마네스크, 고딕 건축이 어우러진 형태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한국인 신부가 최초로 건축한 '한국형 성당'이라는 새로운 출발점을 제시한다.

전문가들은 풍수원 성당의 혼합된 건축 양식이 시대상을 잘 담아낸 결과물로, 이후 우리나라에 세워진 여러 성당 신축에 모델이자 이정표가 됐다고 찬미하고 있다.

/강원일보=유학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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