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애'달픈 역사 딛고, 문화 향'기' 품은 희망으로, 평화 꽃'봉'오리가 맺힌 곳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 벌인 154고지 배경
남북관계 경색에도 수도권 명품관광지 탈바꿈
승효상 건축가 작품 '조강전망대·전시관' 매력
300여 객석서 파노라마로 보이는 북한 땅 백미
정상부 크리스마스트리 모양 생태탐방로 압권
김포 애기봉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TV 화질이 지금처럼 선명하지 않던 시절, 추운 겨울 성탄절이 다가오면 애기봉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점등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확성기방송도 뉴스의 단골 소재였고, 기녀 '애기'의 한이 서려 있다는 평안감사 순애보나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촬영지라는 사실을 떠올리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과거에는 그랬다.
금강산관광 활성화, 여가문화의 다변화 등으로 애기봉은 어느 시점부터 올드한 이미지를 안게 됐다. 물길 하나 사이에 북한 땅이 한눈에 펼쳐진 절경이지만, 군사적 요충지인 탓에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곳의 크리스마스트리가 그랬듯이, 애기봉도 수명을 다한 전구처럼 현대사의 뒤안길로 잊혀 가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남북관계 경색에도 애기봉은 자연과 예술,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수도권 명품관광지로 지금 탈바꿈하고 있다. 인생 컷을 건질 수 있는 핫플레이스로 사시사철 문화의 향기가 피어오르고, 국제행사까지 열리면서 해외관광객들의 필수 방문코스로도 자리매김했다. 애기봉 역사상 첫 야간개장은 순식간에 몇 주 치 예약이 완료될 만큼 인기다.
애기봉이 언론에 본격적으로 재등장한 건 2017년 대대적인 재건축 공사에 돌입하면서다. 김포시는 애기봉 일원 4만9천500여 ㎡ 부지에 '애기봉평화생태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이 완성되기까지 군 당국과의 협의가 쉽지 않았는데, 군사시설 철거 여부와 공원 설치 규모 등을 놓고 이견을 좁혀 가며 완성했다.
애기봉평화생태공원에는 300여 객석에서 북한땅이 파노라마로 보이는 조강전망대를 비롯해 루프톱과 로비 어디든 북한을 편하게 조망할 수 있는 전시관 등이 들어섰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승효상 건축가의 작품으로, 그는 애기봉에 대해 "세 개의 강이 모여 흘러서 바다로 나가니까 거기에 대한 상념도 남다를 것이고 우리나라의 운명, 장래, 역사 등에 대해서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추천한 바 있다. 구석구석 건축물 자체의 아름다움을 천천히 느껴보는 것도 애기봉평화생태공원의 관람 포인트 중 하나다.
공원 초입 전시관에서 한참 떨어진 정상부 조강전망대까지는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의 생태탐방로가 놓여 있다. 이 탐방로는 단순 조망시설에 머물 수 있었던 애기봉에 '걷기 좋은 관광명소'로서 정체성을 더해준 중요한 연결고리다.
애기봉 생태탐방로를 오르내리며 감상하는 조강의 석양은 국내 어디에서도 접하기 힘든 콘텐츠로 관광객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 있는데, 야간에는 탐방로 전 구간에 조명이 반짝이고 봄이 오면 흔들다리에 꽃길이 조성된다. 공원 한참 아래 매표소부터 조강전망대까지 2.5㎞ 구간의 울창한 숲길 따라 걷는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야간개장은 지난해 10월부터 시작했다. 조강의 해넘이와 문화공연, 흔들다리 야경을 경험한 방문객들의 호응이 뜨겁다. 이에 그치지 않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트리철탑 철거 10년 만에 트리가 켜졌다. 1971년 철탑이 세워진 이래 매년 개최하다가 2014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점등행사가 미디어아트 형태로 화려하게 복원된 것이다.
야간개장도 처음이었지만 애기봉에서 일반 시민과 함께 크리스마스 행사를 치른 것도 역대 최초였다. 트리 형상의 생태탐방로는 거대한 녹색빛으로, 조강전망대 벽면은 폭포처럼 쏟아지는 불빛으로 탄성을 자아냈다. 북한을 코앞에 둔 애기봉에서의 이 같은 이벤트는 크리스마스시즌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김포로 끌어들일 전망이다.
애기봉의 특별한 밤은 이뿐만이 아니다. 올해 정월대보름 때는 LED 대형 보름달을 띄우는 '소원을 비추는 달빛 레이저쇼'로 방문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했다. 민간인출입제한 군사구역에서 최초로 펼쳐진 레이저쇼였다. 방문객들이 사전에 저마다의 소원을 적었는데, 여기에 적힌 소원이 LED 보름달에 투영됐다.
애기봉평화생태공원의 묘미는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154고지라는 배경에 있다. 서슬 퍼런 이념대결의 장이었던 곳이 형형색색 꽃으로 뒤덮이고, 오페라와 국악과 밴드가 울려 퍼지고, 예술품이 전시되고, 모던한 건축물 안에서 멀리 개성 송악산까지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은 애기봉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매력이다.
요즘은 국제교류의 장으로도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노벨문학상 수상자 르 클레지오 작가 등 세계 주요 작가들이 애기봉을 찾아 외신에 소개됐고, 지난달에는 불가리아기자협회 기자들이 방문했다. 르 클레지오 작가는 애기봉을 찾은 자리에서 "애기봉을 통해 한국의 이미지가 더욱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애기봉은 전 세계 화합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닌 장소"라고 평했다.
이 외에도 모터스포츠 관련 글로벌 명사들의 강연과 전문가토론 등으로 구성된 국제 자동차레이싱 콘퍼런스가 애기봉에서 열리고, 최근 조강전망대 카페 공모에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입점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지는 등 애기봉의 글로벌화에 속도가 붙고 있다.
애기봉평화생태공원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개성 고려황궁을 디지털로 복원한 'VR 체험관' 등 요소요소의 재미가 적지 않다. 각종 퍼포먼스와 체험 프로그램도 수시로 운영한다. 방문하려면 홈페이지(https://aegibong.or.kr)를 통해 사전 예약해야 한다.
인근에 달 모양 보트를 탈 수 있는 베네치아 콘셉트의 '라베니체', 반려동물과 함께 할 수 있는 가족공원 '태산패밀리파크', 전통한옥숙박체험관을 갖춘 '김포아트빌리지', '김포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 등 연계 관광지도 훌륭하다.
김포/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