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내가 버린 쓰레기, 조카 사는 고향의 매립지로… 미래 세대에 책임 지우는 느낌" 


인성여고 입학후부터 책·글쓰기 관심
3학년때 도서관서 조세희 작품 읽고
세상 보는 시각 바뀌며 작가를 희망
국문과 진학해 학회·동아리에 열정
"치열한 토론 작품 활동의 밑거름 돼"

2012년 '팜비치'로 창비신인상 등단
"드러낼 수 없는 이들을 조명하는 것"
사회적 약자 입장서 문학 세계 펼쳐
기후위기 행진 등 현실 참여도 활발

"쓰레기 떠다닌 옛 월미도 바다 기억
더 리얼한 서해에 대한 작품 쓰고파"




소설가, 기후칼럼 기고자, 제로웨이스트 실천가, 여성주의자, 요가 수련자, 고양이 집사….

소설가 최정화(45)를 정의하는 단어들이다. 그는 등단(팜비치·2012) 이후 10여년간 노동자(없는 사람·2016), 여성(나는 트렁크 팬티를 입는다·2021), 제로웨이스트(비닐봉지는 안 주셔도 돼요·2022), 기후위기(날씨통제사·2022, 봇로스 리포트·2023) 등 다양한 주제로 소설과 에세이를 썼다.

최정화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그가 어떤 도시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궁금해진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소설가의 꿈을 심어 준 것은 인천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다. 소설을 통해 사회에 메시지를 전하는 그에게 여전히 인천은 자신의 학창시절이 살아있는 애정 어린 공간이자, 영감을 주는 도시로 남아 있다.

■ 소설의 힘을 깨닫게 한 책 한 권, '난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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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 인성여고에서 만난 소설가 최정화.2024.9.26 /조재현기자jhc@kyeongin.com
 

1997년 인천 중구 인성여고 도서관에서 당시 고3이었던 최정화의 꿈이 시작됐다.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첫 페이지를 연 그는 소설에 푹 빠졌다. 날카로운 시각에서 사회를 풍자한 이 소설을 계기로 최정화는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사회적 모순과 사각지대를 향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 소설이 가진 힘을 느꼈다.

"어린 저는 세상을 긍정적으로만 봤었는데 막상 소설을 펼쳐보니 그렇지 않은 세상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어요.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한번 세상을 보는 게 어떨까' 하는 도전을 심어줬습니다."

난쏘공의 중후반 주요 무대인 도시 '은강'은 인천 동구 만석동 공장지대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 속 장소의 배경이 된 동일방직, 일진전기(옛 도쿄시바우라), 현대두산인프라코어(옛 조선기계제작소) 등은 아직 동구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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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인천 중구 인성여고에서 만난 소설가 최정화. /조재현기자jhc@kyeongin.com

조세희 선생의 49재였던 지난해 2월 시민들이 난쏘공과 인천을 적극적으로 연결 짓자는 움직임으로 동구 일대에서 추모 답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지난해 답사를 주도한 장회숙 인천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 대표는 "시민들이 모여 소설의 배경이 된 동구 만석동 일대를 도는 추모 답사를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오는 12월25일 조세희 선생 2주기 추모 답사를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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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서림

■ 이과 모범생 소설가를 꿈꾸다


최정화는 어릴 적 내성적인 아이였다. 전업주부 어머니, 두살 터울 언니와 함께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충청도 출신 아버지와 서울 출신 어머니는 주안역 근처 삼양아파트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책과 글쓰기에 관심이 생긴 것은 인성여고에 입학한 후다. 고등학교 1학년 국어를 담당했던 이한수 교사는 국어 시간에 교과서를 벗어나 철학, 문학서적들을 읽어볼 수 있게끔 아이들에게 필독서를 정해줬다. 책을 읽은 후에는 독후감을 써오라고 시켰는데 선생님은 좋은 글을 뽑아 학생들과 공유했다.

"당시 친구가 쓴 글이 기억에 남아 있어요. 선생님께서 뽑은 글은 책에 대한 내용이 하나도 없었어요. 아버지가 안 계신 한 친구가 엄마가 한밤중에 갑자기 너무 아프셔서 문이 닫힌 약국에 가서 셔터를 두드렸는데 이런 다급한 상황에 선생님이 내주신 철학책이 너무나 괴리가 있다, 현실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가 의문스러웠다는 내용으로 쓴 글이었습니다. 전형적이지 않은 친구의 글을 잘 썼다고 칭찬하는 선생님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고 국어 과목, 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인성여고 이한수 교사는 "초임 교사 시절 학생들이 문학을 통해 공감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자 수업을 고안했다"며 "문학을 읽고, 글을 쓰는 방식의 수업을 이어오고 있는데 최근에는 입시 위주의 경쟁적 교육 환경에서 수업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학생들도 생겼다"고 말했다.

최정화
대학 시절 최정화 작가(둘째줄 맨 오른쪽). /최정화 작가 제공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최정화는 고등학생의 시각에서 전형성을 탈피해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소설들을 썼다.

"그 당시엔 '언어·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는 철학적 질문을 스스로 던졌어요.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습작 중 하나는 '라위맥도체'라는 소설입니다. 현 시대의 인류는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지만, 미래의 인류는 다섯 명이 만나야만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라' '위' '맥' '도' '체'라고 이름 지은 다섯 사람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최정화에게 인성여고와 가까운 동인천은 향수로 남아 있다. 고등학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동인천역 인근에 자리했던 옷가게 '세대교체'에서 옷을 구경하고, 용돈을 모아 그 당시 흔치 않았던 피자집에서 조각 피자를 사먹었다.

1990년대 말 인천의 학생들은 동인천에서 여가시간을 보냈다. 동인천역 인근에 자리 잡은 서점 '대한서림'은 청년들의 약속 장소로 통했다.

동인천에서 가슴 아픈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1999년 10월30일 중구 인현동 호프집에서 발생한 화재로 10대 중·고교생 57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로부터 5년 뒤 인천시는 청소년들에게 문화 공간을 제공한다는 취지로 '인천시교육청학생교육문화회관'을 건립해 문을 열었다.


■ '매일, 10년', 소설가 최정화를 만든 시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과에 진학한 최정화는 소설 창작 동아리, 학회 활동에 열중하며 소설을 꾸준히 썼다. 학생회 선후배들과 함께 사회운동,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대학가엔 소모임, 학생회 등 학생 자치활동이 활발했다.

대학 선배들과 환경주의, 여성주의 등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며 그들의 생각과 사상들을 쑥쑥 빨아들였던 최정화는 "열정적이었던 대학 생활이 지금 작품 활동을 하는데 밑거름이 됐다"고 설명한다.

대학 졸업 후 스물네 살 최정화는 소설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꾸준히 공모전에 출품했다. 2012년 단편소설 '팜비치'로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기까지 자그마치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최정화는 "글 근육을 키우는 시간이었다"고 정리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낮에는 일하고 매일 저녁 원고지 7매 분량의 글을 썼다. 그가 거친 일들은 노무법인 사무 보조, 편의점 아르바이트, 백화점 캐셔, 논술 강사, 환경잡지사 사무 보조 등이다. 낮엔 다른 업무를 했지만 매일 저녁 글 쓰는 시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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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 인성여고에서 만난 소설가 최정화.2024.9.26 /조재현기자jhc@kyeongin.com

 

최정화 작가는 문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사람들, 자기를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조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약자 입장에서 쓰다 보니 최근에는 환경, 그중에서도 동물의 입장에서까지 쓰게 됐어요."

작품의 이름처럼 '지극히 내성적'이었던 작가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긴급한 메시지를 환경 칼럼으로 전달하고 기후 관련 워크숍, 강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소설가, 시인, 평론가 등이 모여 '기후위기 작가 행동' 모임을 만들었다. 지난달 7일엔 헌 이불·옷가지로 만든 깃발을 들고 기후행진에 참여했다. 올해 말에는 '기후위기 소설을 이렇게 씁시다'를 주제로 연속 강연도 준비하고 있다. 반려묘를 키우는 그는 동물의 입장에서 종차별주의에 반대하고, 차별과 혐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도우려는 활동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 소설가의 눈으로 본 인천, 그리고 기후위기


기후행진
기후행진에 참여한 최정화 작가(아랫줄 왼쪽). /최정화 작가 제공

 

지난달 26일 모교인 인성여고에서 만난 최정화는 텀블러와 손수건을 사용했다. 가방에는 비닐봉지를 대신할 여분의 천 가방, 플라스틱 용기를 대신할 다회용 용기가 들어 있었다. 다 쓴 로션 통에 담겨 있던 립스틱은 리필스테이션(빈 용기에 물건을 담아주는 가게) '알맹 상점'에서 구매한 것이라고 했다.

최정화는 최근 '쓰레기 매립지' 문제로 뉴스에서 고향의 이야길 접했다. 그때마다 고향에 남은 가족과 조카가 생각났다.

"서울에서 만들어진 쓰레기가 인천으로 보내져 매립되는데 이미 인천의 매립지가 포화 상태라 매립할 수가 없고, 그런데도 서울에서는 계속 인천으로 쓰레기를 보내려고 한다는 뉴스를 접했어요. 저는 서울에 살고 있고, 내가 버린 쓰레기가 내 고향에 묻히는 상황이라 애향심을 갖고 사안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더라고요. 성인이 된 내가 서울에서 버린 쓰레기를 이제 스무 살인 조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처리하는 것이 마치 현재의 기후위기 문제를 미래 세대가 책임져야 하는 그런 구도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최정화는 언젠가 인천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인천에서 살았으니 인천에 대해 가장 잘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어릴 때 제가 본 인천 바다는 쓰레기가 떠다니던 월미도의 노란 바다였습니다. 좀 더 커서 다른 지역의 파란 에메랄드 빛 바다를 처음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저는 어린 시절의 바다를 청정한 바다가 아니라 쓰레기가 떠다니는 냄새나는 바다로 기억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진짜 '이 시대의 인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꼬마였을 때 만난 자연이 이미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거죠. 인천의 기억을 토대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환경 관련 활동을 연결해 더 리얼한 인천과 서해에 대한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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