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성 600년 넘어… '서산9경' 중 으뜸
낙안·고창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읍성
천주교 박해 현장… '국제성지'로 선포
상부 올라갈수록 작은 성돌 쌓아 안정
허튼층쌓기에 곳곳 바른층쌓기 흔적도
서해안지역은 고려말부터 약탈을 목적으로 한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조선 초기 빈번한 왜구 침략을 막고, 해안 방어 등을 위해 병영성으로 축성된 게 서산해미읍성(충남 서산시 해미면·사적 제116호)이다.
태종 17년(1417년)부터 세종 3년(1421년)까지 석성으로 쌓았다. 성곽 총길이는 1천800m, 높이는 5m, 면적은 20여만㎡다. 해미읍성 안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근무하던 동헌을 비롯, 관아와 객사 등이 있었다.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시설물은 대부분 철거되고, 성안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병영성의 모습은 사라졌다. 1973년 정비에 들어갔고, 1997년부터 발굴이 이뤄져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해미읍성은 서산시가 관광객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서산9경' 중 단연 으뜸이다.
■ 조선시대 3대 읍성
축성된 지 600년이 넘는 해미읍성은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사적 제302호), 전북 고창군 고창읍성(사적 제145호)과 함께 원형이 잘 보존된 조선시대 3대 읍성으로 손꼽힌다.
병영성답게 적의 접근을 차단할 해자가 있었다. 해자는 성벽 주변에 인공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하천을 이용해 적의 접근을 막는 성곽시설이다. 현재 일부 구간에서 해자 복원이 진행 중이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시가 억센 탱자나무를 심었다. 해미읍성이 탱자성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이유다. 무엇보다 해미읍성이 지금까지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할 수 있었던 데는 고을 책임제의 역할이 컸다.
해미읍성 성벽에는 청주, 공주 등 각각 고을명이 새겨져 있다. 해미읍성을 쌓을 때 각 고을별로 정해진 구간을 맡도록 했는데, 성벽이 무너질 경우 그 구간의 고을이 책임을 졌다. 일종의 부실공사를 막기 위함이다. 그만큼 보다 더 책임감 있게 해미읍성을 쌓은 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충청병마도절제사영
1416년 태종이 서산 도비산에서 강무(조선시대 왕이 직접 참여하는 군사훈련을 겸한 사냥행사)를 하다가 해미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주변지역을 둘러보게 됐는데, 당시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판단했다.
이렇게 축성된 해미읍성은 병영성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당시 덕산(현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이 해미읍성으로 옮겨진 것. 덕산은 바닷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왜구가 출몰했을 때 효율적으로 방어하기가 어려웠던 이유 때문이다.
충청도의 전 군을 지휘하던 충청병마절도사(종2품)가 근무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이다. 효종 3년(1652년)에 청주(현 충북 청주시)로 병영이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외세로부터 충청도를 굳건히 지켰다.
이후 충청도 5진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이 들어서게 되고, 영장(營張)으로 무장을 파견해 '호서이성의좌영장'과 '해미현감'을 겸직하게 하는 겸영장(지방수령이 각 지방의 군사를 통솔하는 일을 겸해 맡아보던 무관 벼슬)으로 읍성의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선조 12년(1579년) 군관으로 부임해 10개월간 근무한 곳이기도 하다.
■ 천주교 박해 현장
해미읍성은 천주교 박해현장으로 아픔도 간직하고 있다.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죽어나갔다.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 때 내포지역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죽임을 당한 순교의 현장이기도 하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에는 1천여 명의 신자가 처형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옥사에 수감된 신자들을 끌어내 매달아 고문하던 수령 300년이 넘은 호야나무(회화나무의 충청도 사투리·기념물 제172호)가 해미읍성 안에 있다.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미읍성에서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 미사를 집전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2020년 11월 29일 '해미순교성지'는 교황청이 승인한 '국제 성지'로 선포됐다.
■ 축성
'문종실록'에 해미읍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해미현 내상성은 둘레가 3천352척, 높이가 12척이고, 여장(女墻)의 높이는 3척이며, 적대(敵臺)가 18개소인데 그중 16개소는 아직 쌓지 않았다. 성문은 4개소에 있으며, 옹성(瓮城)은 없고, 여장은 688개다. 해자는 둘레가 3천626척이고, 성안에는 샘이 3개소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덕산에서 해미로 병영성이 옮겨올 때 현재와 같은 성벽과 부대시설이 모두 완성돼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해미읍성은 남문지를 포함한 남벽이 평지를 지나는데 비해 북문지를 포함한 북벽은 나지막한 구릉 위를 지나고 있다. 그 모습은 흡사 타원형에 가깝다. 성벽은 체성(體城)과 체성 상부의 미석(眉石)으로 이뤄져 있다. 체성은 대부분의 조선시대 읍성이 그렇듯 하단부에서 상부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은 성돌을 사용, 역학적인 안정감을 꾀하고 있다.
축성에 사용된 성돌은 일정한 크기와 모양으로 가공한 것이 아니라 대체로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되 바깥면을 수직으로 다듬어서 축성에 사용하고 있다. 지표에서 약 1.5m 정도까지는 큰 석재를 사용하고 있고, 그위로 2m 정도는 그 보다는 작지만 중간 정도 크기의 성돌을 사용했다. 다시 그 위에 1.5m 정도는 더 작은 성돌을 이용해 쌓았다.
성벽의 하부에는 길이와 높이가 1m 되는 큰 성돌을, 중간 부분에는 길이와 높이가 30~50㎝ 중간 크기의 성돌을, 상부에는 두께 10㎝ 정도 되는 소형 성돌로 마무리했다. 문종실록에 기록된 것처럼 성벽 위에 여장(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있었다고 돼 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축성 방식은 조선시대 축조한 성벽에서 발견되는 특징인데, 그런 점에서 해미읍성의 성벽도 이러한 일반적인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당시 읍성이 허튼층쌓기방식(크기가 다른 돌을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일)이 일반적이었으나 해미읍성은 곳곳에서 바른층쌓기(돌의 면 높이를 가로줄 눈이 일직선이 되도록 쌓은 방법)한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성문은 현재 동서남북의 4곳에 개설돼 있다.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뤄져 있다. 동문과 서문은 개거식의 성문이 개설, 성문 위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자리하고 있다.
동문루에는 '잠양루', 서문루에는 '지성루'라 쓴 편액(종이나 비단, 널빤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걸어 놓는 틀)이 걸려 있다. 남문에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자리하고 있는데, '진남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다른 세 개의 성문보다 작기는 하지만 북문도 있다. 암문 형식의 성문이다.
해자는 북벽 밖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곳에는 북벽에서 8m 정도 거리를 두고 해자가 남아 있다. 해자의 상부 폭은 10~11m이고, 하부 폭은 5m이며, 깊이는 1.4~2.4m에 이른다. 성벽과 해자 사이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당시로서는 탱자나무의 촘촘하고 억센 가사가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해자와 탱자나무로 이중의 방어벽을 친 셈이다.
이완섭 서산시장은 "서산해미읍성은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읍성으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 박해의 아픈 역사도 함께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며 "해미읍성과 해미국제성지를 K-컬처관광, K-성지순례의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키워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전일보=박계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