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선끝 어머니 보고 달렸던 허약이 이영숙입니다
신흥동서 태어나 자라… 부친은 관세사
신흥초 3학년때 담임 권유로 육상 입문
어린시절 병약, 선수의 삶 생각도 못해
모친, 든든한 지원자로 늘 경기장 함께
양장점서 운동복, 스파이크화도 구해줘
소년체전 3관왕… 인일여고때 국가대표
이화여대 1학년때 100m 첫 한국신기록, 1994년까지 총 7회 작성
"10년 걸려 0.43초 줄여"… 16년간 대표, 감독으로도 오랜 활동
내년 정년 "결승점 온 듯"… "엄마의 품 같은 인천, 항상 고마워"
1980년 6월 강원도 춘천에서 열린 제9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여중 3학년이던 이영숙은 100m, 200m, 400m 계주 종목에서 연이어 금메달을 거머쥐며 3관왕에 오른다. 한국 여자 육상 단거리를 이끈 간판스타 이영숙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만든 대회로 기억된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84년 제13회 종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11초92로 개인 첫 한국신기록을 세운다. 이후 10년 동안 모두 7차례 자신이 세운 기록을 갈아치운다. 1994년 그가 세운 마지막 한국신기록 11초49는 아직도 유효하다. 무려 30년,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뀔 시간임에도 깨지지 않고 있는 벽이다.
이영숙 안산시청 육상부 감독을 최근 안산와스타디움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사람의 일생을 100m 경기에 비교하자면, 이제 막바지 결승점에 이른 것 같다"면서 "이제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내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내년 정년 퇴직을 앞두고 있다.
이영숙은 1965년 인천 중구 신흥동(新興洞)에서 태어나 자랐다. 충남 당진 출신 부친 이광구(1923~2012)씨와 같은 당진 출신 모친 김희란(1930~2015)씨 사이의 8남매 중 다섯 번째 딸로 자랐다. 이영숙의 부친은 인천세관에서 오랫동안 몸담았고 이후에는 관세사로 일하며 신포동으로 출퇴근했다. 남들과 비교하면 유달리 유복하지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힘들지도 않았던 평범한 가정이었던 것으로 이영숙은 기억했다.
이영숙이 태어나 자란 신흥동은 인천항 내항이 가까웠다. 그가 살던 집은 신흥동의 명소였던 처녀목욕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잡았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전까지 신흥동은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船倉里) 일부였다. '선창'이라는 지명에서 이곳이 바닷가 마을이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나중에 붙은 신흥동이라는 이름은 새롭게 번성하는 동네가 되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개항 이후 조계 지역에 거주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일본인들이 조선인 마을로 넘어오면서부터 개항장 밖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며 형성된 마을이다. 현재 신흥동을 보면 인천항 내항과 남항 부두를 둘러싸고 항만의 배후부지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신흥동 3가는 대부분 갯벌을 매립하며 조성된 곳이다. 아암물류1단지와 갯골물류단지 등이 있는데 인천항의 수출입 화물을 처리하는 물류단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상주 근로인원이 2천명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시대 쌀은 주요 자원이었다. 쌀은 당연히 인천항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그러면서 정미업도 호황을 누렸는데, 새로 지어진 항만과 가까운 신흥동 일대에 정미 공장이 들어서며 정미업계 중심지가 됐다. 정미 공장 여성들도 주변 지역에 모여 살았는데, 1932년 16개 정미소의 여공이 1천300여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해방 이후 정미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며 정미 공장들은 창고나 대형 전자용품 매장으로 활용되다가 2000년대 들어서 고층아파트에 자리를 내어줬다.
무역항 주변에는 반드시 세관이 있어야 했다. 이영숙의 부친도 세관에 몸담으며 8남매를 키웠다. 인천세관이 설치된 것은 인천항이 문을 연 1883년 6월이다. 초창기에는 세관이 아닌 해관이라 불렀다.
인천해관은 부산해관에 이어 설치됐다. 수입 물품에 관세를 부과·징수하고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것이 세관의 주요업무였지만 초창기에는 오히려 내국인에게만 수입세를 징수하는 불평등한 시기도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까지 늘 외국인이 세관장을 맡았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서의 패권을 쥐며 조선 해관에 대한 권한을 독점했고 1907년 해관을 세관으로 개칭한다.
인천세관은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교통국 해관과 소속으로 개편됐고 개관 64년만인 1948년 우리나라 김준덕 해관장이 취임한다. 이후 1970년 8월 관세청이 개청하며 관세청 소속으로 바뀐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영숙은 신흥초 3학년 때 육상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육상부 학생들이 높이뛰기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언젠가는 꼭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체육 수업을 늘 눈여겨 보던 초등학교 육상부 코치의 눈에 들었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과 코치가 육상부로 활동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이영숙은 수락했다.
이영숙은 초등학교 6학년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977년 전국소년체전에서 60m 종목에서 인천 대표로 출전해 전국 3위에 올랐다. 본격적인 선수 생활의 시작이었다. 이영숙이 운동선수의 삶을 살 줄은 아무도 몰랐다.
어린 시절 이영숙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4~5세쯤 백일해를 앓았고 이후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며 늘 약을 입에 달고 살아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어린 시절 기억나는 풍경 가운데 하나는 병원이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어린 이영숙은 어머니와 함께 마치 주치의를 만나듯 집 근처 '동산의원'의 여의사를 자주 만났다. 또 다른 한 곳은 집 가까이에 있던 경기도립 인천병원(현 인천광역시의료원)이다.
인천의료원의 출발은 1932년 현재 인성여고 인근인 중구 송학동에 설립된 경기도립 인천의원으로 볼 수 있다. 설립 당시 단층 건물 2동으로 단출했다. 그러다 일본인이 유입되며 늘어난 의료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1936년 5월 중구 신흥동 2가 18번지 3천평(9천900여㎡) 부지에 건축면적 1천800평(5천950㎡) 규모로 새 건물을 신축한다.
이영숙의 모친은 그가 운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늘 응원을 보내는 든든한 지지자였다. 어머님은 양장점에서 딸을 위한 운동복을 맞춰 주셨고, 또 당시 흔하지 않았던 스파이크가 달린 러닝화를 구해 주셨다. 어머님은 기회가 되면 늘 이영숙이 뛰는 경기장에 함께했다.
"몸이 약하던 작은 아이가 육상을 하고, 자주 상도 받아오고 하니 그럴 때마다 무척 기뻐하셨어요. 어머님은 늘 결승선 너머 스탠드에 앉아 계셨어요. 손에는 항상 예쁜 양산이 들려있었습니다. 엄마가 여기 있다고 알려주는 둘 만의 신호였던 거죠. 출발 지점에 서면 어머님이 손을 흔들고 계셨고,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안심하고 뛸 수 있었어요. 제가 은퇴할 때까지 늘 그렇게 저를 뒷바라지해 주셨어요."
이영숙은 신흥초를 졸업하고 인천여중, 인일여고, 이화여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간다. 중학교 3학년 소년체전 3관왕을 차지한 이영숙은 인일여고 입학과 동시에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된다. 인천에 있는 집보다는 태릉선수촌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1984년 이화여대 1학년 재학 시절 첫 한국기록을 세웠다. 초·중·고교 선배인 모명희를 제치고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기록을 스스로 경신해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갔다. 1984년부터 1994년까지 무려 일곱 차례나 한국 신기록을 수립했다. 1984년 LA 올림픽은 그의 첫 올림픽 무대였다. 세계 무대의 벽은 높았다.
그는 "첫 올림픽에서 단 한 차례 밖에 뛰지 못했다. 기록도 생각나지 않는다"면서 "대학 1학년인 어린 나이에 대담하게 경기 운영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고 했다. 육상 여자 스프린터로 유명한 그리피스 조이너는 그의 앞 조에서 뛰었다. 그는 11초49라는 기록을 세운 1994년 제48회 전국 육상 경기 선수권 대회 순간도 잊을 수 없다.
"기록을 보는 순간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숫자가 보이더군요. 놀랐죠. 11초 뒤의 숫자가 5에서 4로 바뀌는 순간이었어. 0.43초를 줄이는데 10년이 걸린 것이었죠. 저도 무척 놀랐고요."
그는 1981년 3월부터 1997년 6월까지 국가대표로 활동했다. 한국 스포츠 역사에서 유례없는 국가대표 활동 기록이다. 1988년 안산시청 육상부에 입단한 그는 코치로, 감독으로 현재까지 몸담고 있다. 인천에 머문 시간보다 태릉 선수촌과 안산에 머문 시간이 더 길지만 그는 그래도 인천이 늘 고맙다고 한다.
"인천에서 태어나 초·중·고교시절까지 좋은 지도자를 만나 훌륭한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점은 항상 마음 속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에게 인천은 엄마의 품과 같은 따뜻한 고향으로 남아있습니다. 아직 가족들도 살고 있네요. 인천에 대한 좋은 소식이 자주 들렸으면 좋겠어요. 다른 어떤 도시보다 살기 좋은 도시로 계속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