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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오후 고양시 덕양구 공릉천에 설치된 대전차장애물 '용치'가 오랜 기간 방치돼 수풀에 뒤덮여 있다. 2023.2.6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한국전쟁 후 분단의 부산물로 태어났다. 작물을 심는 논밭에, 매일 걷는 산책길에, 가족과 함께 찾았던 캠핑장에 늘 우뚝 서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이름을 불려본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안에서 창밖의 한탄강을 바라보던 한 주민이 강가에 줄지어 선 '그것'들을 발견했다. 도대체 무엇이길래, 커다란 돌기둥들이 저토록 규칙적인 모양으로 서 있을까. 그는 궁금했다. 혹시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들이라면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경기문화재연구원은 그것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용치'가 세상에 그 이름을 불렸다.

'경기도 최대규모' 고양 공릉천 지영교
인근까지 1km 넘게 이어져 스산한 풍경
1970년대 설치 이래 주민들에겐 '일상'

경기도에 있는 용치 중 최대 규모라는 고양 공릉천의 지영교 인근을 찾았다. 지영교에 들어서자마자 성인 남성 어깨 높이의 큰 돌기둥들이 일렬로 늘어선 풍경이 펼쳐졌다. 용치였다. 지영교 아래를 관통해 인근 경작지까지 1km 넘게 이어진 풍경은 처음 보는 이에겐 기괴함 마저 들게 했다.

공릉천 산책로에도 용치가 서 있었는데, 그 사이를 걷으려니 선뜻 발을 내딛기가 어려웠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와 무성하게 자란 갈대들로 스산함을 더한 탓도 있지만, 사람 키만한 돌기둥이 같은 모양새로 선 풍경은 용치가 설치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에겐 기괴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용치(龍齒)'는 용의 이빨(Dragon's Teeth)을 닮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대전차장애물의 한 종류로, 적군의 길목을 막기 위해 설치됐다. 장갑차, 전차 등이 지나갈 예상 침투로에 둔 콘크리트 구조물로 된 걸림돌 역할을 한다.

용치가 언제부터 설치됐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된 이후 대치국면이 극에 달했던 1970년대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일명 '1·21 사태(김신조 사건)'로 불리는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습격사건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과의 전면전을 대비하기 위해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설치했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고양 공릉천 용치는 공릉천에서 시작해 통일로라 불리는 1번국도까지 연결돼 있는데 북쪽 용치는 5열로, 남쪽은 4열로 조성돼 총 2개의 열로 이루어져있다. 북한이 침입했을 경우를 상상(?)하면 적을 막는 '1차 방어선'인 셈이다.

공릉천 용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공릉천 용치는 L자 모양이었다. 멀리서 볼 때 위압적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세월은 비껴가지 못했다. 용치 곳곳이 깨져 있었고 거뭇하게 색이 바랜 흔적들이 역력했다.

키가 쑥 자란 갈대와 잡초들이 용치를 타고 올라와 아예 파묻혀버리기도 했다. 그 숱한 세월 동안 바람에 쓸리고 비에 젖고 눈도 맞았을테니 제 아무리 돌이라 해도 나이가 들 법 했다. 그 모습이 낡아빠진 군화 같았다.

산책로 옆 좁은 도로, 또 그 옆으로 이어진 경작지에도 용치는 서 있었다. 도로 가장 자리와 경작지 한 가운데를 가로지른 용치는 네모 반듯한 모양의 기둥이었다. 이곳에서 용치는 일상의 풍경이다. 용치 바로 맞은 편에서 전기부품가게를 운영하는 주민은 창밖으로 매일 용치를 보며 살고 있다.

"70년대에 설치된 걸로 알고 있지. 통일로까지 이어져서 김일성이, 북한 못 들어오게 하는 저지선이야 저게. 그땐 당장 쳐들어올 수도 있다니까 아무 말 안 했지. 근데 지금은 쓰이지도 않아. 무섭기도 하고 불편해서 주민들이 철거해달라고 요청도 하지만, 또 일상에선 아무 생각 안하고 또 같이 살지."

직접 용치를 설치했다는 주민도 만났다. "박정희 대통령 때니까 70년도에 설치된거야. 설치 공사하는데 나도 참여했는데 이게 8차 저지선으로 알고 있어. 전차가 진입 못하게 간격도 신경써서 만든 것이지.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한텐 워낙 익숙하고 또 (용치의 의미를) 알지만,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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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시에 설치된 용치. /박종우 작가 제공

도내 54개소 중에 일부는 멸실된 상태
독일·프랑스 등 철거보다는 보존 대세
"적절한 선별 거쳐 문화유산 대접해야"

경기도 내 용치는 북한과 맞닿아 있는 연천군, 파주시 등 북부지역에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도내 용치는 총 54개소이며 이 가운데 일부는 접근할 수 없거나 멸실된 상태다. 모양도 제각각이다.

▲타원형 L자 ▲오각형 L자 ▲육각형 L자 ▲타원형·원뿔형 기둥 ▲사각 기둥 ▲오각기둥 ▲육각·육각뿔 기둥 ▲철제 기둥 등 현재까지 모두 8개 유형이 확인됐다. 언뜻 보면 하천을 건널 수 있는 돌다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내 용치를 살펴보면 대부분 여러 개가 모여 있는 '용치군'을 이룬다. 용치 하나의 높이는 1.5m~2.0m정도 되는데, 용치군이 설치된 총 길이는 하천 폭에 따라 짧은 곳도 있고 고양 공릉천처럼 약 1㎞에 달할 정도로 긴 곳도 있다.

의정부 중랑천 양 옆을 가로질러 약 130m 길이로 설치된 용치는 2열로 총 65개다. 육각뿔 기둥과 원형 기둥 두 가지로 설치됐는데, 용치 하나당 높이가 2m를 넘어 사람 키를 훌쩍 넘긴다. 공릉천 하류에 있는 파주 용치도 하천과 육지에 걸쳐 약 1.3㎞에 이르는 길이로 조성됐다. 고양 공릉천에 있는 용치와 더불어 도내 최대 규모다.

연천에 있는 용치는 전곡리 한탄강변을 따라 육지에만 설치됐다. 총 길이는 584m로 6~10열로 이뤄져 있다. 사각 기둥 형태이며 대부분 한 단으로 설치됐는데, 일부 용치는 두 단으로 쌓여 시간이 지나면서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치는 누군가의 죽음을 목적에 둔 군사시설인데, 현재는 대부분 방치돼 있다. 주민들에게도 익숙하지만, 불편한 존재다. 반면 용치를 설치하고 관리하는 군은 군사시설로서 존치하려 한다. 한국전쟁은 정전 상태이고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한 군사시설로서 여전히 가치가 유효하다는 것이다.

주민과 군의 입장이 서로 상반된 입장과 더불어 최근엔 용치가 한국전쟁과 분단 이후 한반도 역사를 담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높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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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설치된 용치.

해외에도 용치가 있다. 해외의 경우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 발견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부터 사용됐다는 주장이다. 국내와 마찬가지로 해외 용치도 적군의 진격을 막거나 늦추기 위한다는 목적은 같았지만, 국가마다 모양이 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분단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하며 그 중에서도 용치를 꾸준히 기록해온 박종우 작가는 국내 뿐 아니라 해외 용치도 연구하고 있다.

해외 용치도 국내와 마찬가지로 상당 부분 방치되거나 철거됐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사실상 용치를 사용할 이유가 없어졌고 도시, 마을에 있던 용치는 도시가 조성되면서 자연스레 없어진 것이다.

전쟁 유적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과거와 달리, 현재 유럽 국가에선 전쟁 유적을 보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후회하는 분위기가 짙다.

박 작가는 "독일의 경우 통일되며 분단시대 유물이 국민의 아픔을 키운다며 베를린 장벽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라졌다. 그래서 최근엔 아픈 유산도 유산인데, 너무 철저하게 없앴다는 목소리가 있다. 그래서 최근 과거 동독의 감시탑인 B Tower 등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분단의 유산으로, 용치 중에서도 보존 가치가 있는 것을 선별해 근대문화유산으로 대접해야 한다"며 "용치처럼 극명하게 전쟁 시설물이라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용치는 우리 현대사가 낳은 비극의 산물이다. 태어난 이후 단 한번도 활용된 적 없고 세월이 흘러 전쟁의 공포가 옅어지며 천덕꾸러기로 취급받지만, 그렇다고 당장 없앨 수도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여전히 우리는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서. 전쟁의 그림자는 오늘도 우리 일상에 서늘한 공포로 자리하고 있어서다.

무엇보다 어떠한 이유로도 한반도의 평화, 우리의 일상이 파괴되지 않아야 함이, 우리가 용치의 역사적 가치를 되새김질해야 하는 이유다.

/공지영·신현정기자 jy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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