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팔달구 교동 2-7의 수원교회 본당이 조성된 건 1954년이다. 교회는 1946년 11월 27일 수원의 장로교 신도 12명이 가정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린 것에서 출발했다. 16일 교회 측 관계자는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중심으로 수원에 장로교 교회가 없다는 걸 아쉽게 생각한 교인들이 모인 것이 교회의 시작이었다"고 설명했다.
1956년 미군의 물자 도움으로 준공
장로교 교회 필요, 신도들 직접 지어
콘크리트 건물 외부 벽돌 감싼 구조
1980년대 시국모임 등 거점 활용돼
인근에 '수원시 가족여성회관' 건물
"행궁 하천 자재 가져다 썼다" 증언
준공년도·육면체 화강암 외벽 비슷
수원교회도 하천 돌들 사용 가능성
가족여성회관, 국가등록문화재 지정
'뜨거운 역사' 수원교회도 가치 충분
이들은 남창동 소재 일본인 불교사원을 빌려 예배처소로 사용해오다 1954년 1월 미 제5공군으로부터 2층의 건물 신축 물자를 받아 1956년 11월 교회를 준공했다. 미 제5공군으로부터 불하받은 건물이지만 미군이 교회 건축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신도가 직접 교회 건축에 참여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북측으로 팔달산과 팔달공원과 붙어 있고 수원향교에 인접한 수원교회는 중동사거리·교동사거리 인근 수원 화성 팔달문에서 남쪽으로 300m 떨어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수원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교 교회인 수원교회(본관)는 장방향의 평면에 2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장변은 7칸으로 나눠 세로 돌출띠가 보이고 방형의 돌을 조적조(벽돌을 차례로 쌓아 올리는 방식)로 올렸다. 콘크리트 건물에 외부가 조적조 형태로 마감된 것인데 외벽 공사는 교인들이 손수 작업했다.
이런 마감 방식은 이천 양정교회, 화성 남양고등학교 건물과 유사하다.
이천 관고동 양정교회(4월 18일자 11면 보도=[전쟁과 분단의 기억·(6)] 폐허 위 쌓아올린 신앙 '오산감리교회·이천 양정교회')도 수원교회와 마찬가지로 1956년 지어졌고 조적조 형태를 하고 있다. 외벽을 돌로 마감해 언뜻 보기에도 수원교회와 많이 닮았다. 수원교회가 교인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특징을 보인다면 화성 남양고(3월 21일자 11면 보도=[전쟁과 분단의 기억·(4)] 전쟁 속 피어난 희망, 가평고·남양고·고양고)는 마을사람들이 직접 지었다는 유사성이 있다.
1950년 3월 면장 정영덕이 학교를 짓고자 했지만 상황이 열악해 학교만 설립하고 건물을 짓지 못했다. 이후 마을주민들이 직접 벽돌을 날라 1953년 건물을 지었고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남양고의 마감은 유사성을 보이는 세 건물 중 가장 거칠다.
수원교회·양정교회·남양고 옛 본관(현 행정동) 각각 교인, 학교, 마을이 설립한 건물들이다. 지역 최초의 교단 교회를 설립하고 학교를 지어 미망인과 전쟁 고아를 돌보려 했고 학교를 통해 교육을 하려 했던 시대의 열망이 담겨 있다.
수원교회에서 동남쪽으로 100m 정도 이동하면 비슷한 양식의 또 다른 건물을 볼 수 있다. 구 수원시청사이자 구 권선구청사이며 현재 수원시 가족여성회관으로 쓰이는 건물이다. 구 수원시청사는 외벽의 벽돌 마감이 수원교회를 빼닮은 것 같다. 시기도 겹친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수원 종로(현 후생내과 자리)에 있던 수원시청사 건물이 파괴되면서 새로운 청사로 지어진 게 유래다.
1954년 착공, 1956년 준공으로 수원교회와 같고 콘크리트 구조에 화강석 계통의 돌을 육면체로 다듬어 외벽 마감을 한 것이 유사한 모습이다. 수원 구청사는 한국전쟁 이후 한국 모더니즘 건축이 시작되는 시기에 건립된 관공서로 서양식 기능주의 건축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2014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구 수원시청사 외벽 마감 자재는 행궁동·신풍동을 흘렀던 하천 바닥 마감재를 가져와 작업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문헌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1930년생으로 전후 기자생활을 시작한 이창식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의 전언이다.
행궁동·신풍동 일대는 일제 시대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일본인이 거주하며 이곳에 흐르던 하천도 정비됐는데, 바닥을 파고 주위를 벽돌로 마감하는 일종의 치수작업을 벌였다. 일본 패망으로 일본인이 사라지고 전쟁이 발발하자 건축 자재를 수급하기 어려웠던 지역민들이 하천 마감재로 쓰였던 단단한 돌을 가져다 건물을 짓는데 활용했다고 한다.
그의 전언에 따르면 구 수원시청사 외벽 역시 행궁 하천 마감 자재를 가져다 썼다. 실제로 현장에서 보고 만져보니 구 수원시청사 외벽 벽돌과 수원교회 외벽 벽돌은 색깔뿐 아니라 감촉이나 질감도 아주 비슷했다. 무엇이든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 교인들이 직접 마감한 건물이니 가까운 하천에서 벽돌을 가져다 썼지 않을까. 세월이 흘러 확인할 도리가 없으니 상상만 할 뿐이다.
현재 신풍동·행궁동 일대는 모두 복개돼 하천 흔적을 살펴볼 수 없다. 다만 물길은 덮어졌지만 물길 모양을 따라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걸으며 과거 이 바닥에 물이 흘렀다는 사실을 짐작할 뿐이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군사정권 시절 수원교회는 민주화 운동의 지역 거점 역할을 했다. 기독교 장로회 교단 소속으로 지역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했고 진보적 학생들이 포진한 한신대학교와 연결됐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서울 명동성당이 종교의 성스러움으로 서슬퍼런 정권의 화살을 막았듯 수원교회 역시 지역의 민주화 기지가 됐다. 이곳에서 여러 시국모임이 활발히 열렸다고 한다.
전후 설립돼 77년 역사를 보낸 수원교회에는 별관, 문화센터, 게스트하우스 등이 붙은 형태로 같은 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전쟁 문화 유산인 본관에선 여전히 주일마다 예배가 열린다. 내부는 2006년 리모델링 등 여러 차례 변형을 거쳤지만 외부를 비롯해 보전 상태는 온전하다.
현재 수원교회에는 700명 가량 신도가 모인다고 한다. 용인에 교인들이 세상을 뜬 뒤 묻히는 땅이 있는데 300여명 교인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화성 남양고에는 건립 당시 기록화가 남아 있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흰 옷을 입고 일을 한다. 남자들은 지게로 벽돌을 나르고 여자들은 머리에 벽돌을 이고 건물을 짓는다.
수원교회도 신풍동·행궁동의 하천에서 돌을 떼다 교회를 지었을 것이다. 교인들의 힘으로 만든 교회는 77년 세월을 견디며 세파의 든든한 방주로 역할했다. 아쉬운 게 있다면 구 수원시청사와 수원교회 건물의 달라진 지위다. 한 곳은 국가등록문화재지만 한 곳은 아직 미지정 문화재로 남아 있다.
관공서라는 이유로 문화재가 되고 종교시설이라는 이유 혹은 교육시설이라는 이유로 외면한다면 문화재 지정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는 곳, 기억해야만 하는 곳이 문화재가 된다.
수원교회 외벽 화강암을 조용히 만지면 70년 전 뜨거웠던 사람들의 열기가 전해지는 듯하다. 재건과 새 시대의 열망으로 가득한 시대였다. 이천 양정교회, 화성 남양고, 그리고 수원교회를 기억하자.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