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 번쩍이는 신호등 /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동두천1·김명인)
보산역에서 멎은 기차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떠난 기차를 뒤로하고 역사를 내려가자 기둥에 색색으로 이방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기다랗게 늘어선 좌판 매점은 일률적으로 문을 닫았고 이스탄불이라 쓰인 케밥 집에 아랍계가 모여 마작을 친다.
미2사단 캠프 케이시 앞 '보산동관광특구'에 도착했다. 캠프 케이시는 한강 이북에서 가장 큰 미군 주둔지다. 한국전쟁으로 1951년 7월부터 미군이 주둔했는데 1990년대엔 1만2천명 수준에 달했다고 한다. 미군 주둔으로 사라진 '보안리'와 '축산부락'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 보산동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미군 주둔으로 사라진 보안리·축산부락 이름에서 딴 '보산'
미2사단 캠프 케이시 앞 무질서하게 건물 들어섰던 60년대
2007년 보산역 들어서고 광역교통망 개발로 유동인구 감소
주둔병력 나날이 줄고 기지들 폐쇄·반환 잇따라 상권 축소
1981년 동두천이 시로 승격했고 1997년 1월 보산동을 중심으로 중앙동, 소요동 일대가 보산동관광특구로 지정됐다. 동두천시 30년사는 "그 이전부터 미 2사단 정문 맞은 편에 위치, 미군 상대 나이트클럽·주점·상가 등의 영업. 내국인보다는 미국이나 외국인 상대. 1960년대부터 무질서하게 들어선 건물로 낙후되어 도시미관 정화와 지역경제, 도시 이미지 제고를 위해 관광특구 지정 개발 시작"이라고 설명한다.
1997년 시작한 보산관광특구의 역사는 10년 뒤인 2007년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전철 개통이다. 2007년 지상 3층 규모의 선하역사로 보산역이 들어서면서 일대의 미군들이 이태원이나 용산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광역교통망 개발로 유동인구가 도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전형적인 빨대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지난 29일 찾아간 보산동은 쇠락한 흔적이 역력했다. 보산동 구시가지를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3번국도(평화로)변과 신천 동측 구역으로 범위를 한정해 돌아봤다. 보산역 역사 아래를 중심으로 대로변에 미군들이 주로 찾는 통신점과 미용실이 늘어서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음식점과 주점이 빼곡하다.
가운데 마련한 광장, 잘 정비된 도로, 거리 위 현수막까지 모습은 갖췄지만 휴일을 기해 미용실을 오가는 몇몇 외국인 여성 외에 유동인구를 찾긴 어려웠다.
관광특구 남측 입구에서 바라보면 보산역 북측까지 대각선으로 연결되는 중앙로353번길과 경원선 하부 상패로 216번길에 동서로 길게 상업시설이 밀집해 있다. 한미우호 광장부터 캠프모빌 상단 상패로까지는 각종 음식점과 클럽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과거 동두천은 미2사단 병력 주둔으로 단숨에 경기 북부 최대규모 군사도시가 됐다. 한국전쟁 이후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천과 경원선 사이에 생활·상업공간이 중첩되며 우후죽순으로 사람들이 밀려왔고 1960년대부터 식당, 상가, 주점이 무질서하게 만들어졌다.
서측 하천변으론 주거지역이 일부 남아 있고 하천과 보산동 사이에는 제방이 높게 쌓아 올려져 있다. 보산관광특구 지정 등 여러 차례 정비돼 온 모습이라 1960년대 모습까지 확인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가로 장방형으로 길게 조성된 건축물이 장변으로 붙어 형성된 상업 점포는 외국인 관광특구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지역상권 축소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인 듯 보였다. 주둔 병력은 나날이 줄고 있고 기지들은 폐쇄와 반환이 잇따랐다. 오히려 그런 점이 보산동의 현재를 더 잘 보여주는 요소가 됐다. 미군 주둔과 철수에 따라 주변 지역 생태계가 형성·쇠퇴의 궤를 같이 했고, 수십 년 사이 도시 변천이 미군이라는 키워드로 설명된다.
시대 부산물로 다르게 태어난 이들, 배척받고 사회는 외면
상처 원인 '다름'으로 다른 차원의 예술 만들어낼 때 '감동'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 지금도 기억할까 그 때 교내 웅변 대회에서 /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 마디 말 /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 나는 돈 많은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동두천4·김명인)
1979년 세상에 나온 시인 김명인의 동두천 연작은 한이 서린 당시 지역상을 보여준다. 시인은 동두천에서 교사로 일하며 겪은 아이들, 정확히는 미군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당시 시대로 초대한다. 부모에게 버림 받은 아이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웅변해야 살 수 있던(견딜 수 있던) 시기였다.
지금은 시보다는 노래가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윤미래가 이렇게 노래하듯. "유난히 검었었던 어릴 적 내 살색 / 사람들은 손가락질 해 내 mommy한테 / 내 poppy는 흑인 미군"(검은행복·2007)
유튜브에는 윤미래의 얼굴을 모르는 중·고등학생 아이들이 그가 직접 부르는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유명한 영상이 알고리즘에 걸린다.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난 내 얼굴을 씻어내 / 하얀 비누를 내 눈물에 녹여내 / 까만 피부를 난 속으로 원망해" 남들과 다른 피부를 세수로 씻어내는 어린아이의 심경은 심장을 직격하고 "아빠가 선물해 준 음악에 내 혼을 담아 / 볼륨을 타고 높이 높이 날아가 저 멀리 / la musique! / 세상이 미울 때, 음악이 날 위로해주네" 씻어내고 싶었고 부정하고 싶었던 흑인 그루브가 아름다운 운율을 형성할 때 아이들도 운다.
노래를 들은 아이가 말한다. "저는 제가 미웠어요." 피부색이든 비만이든 못남이든 제 의지가 아니라 주어진 것에서 발현한 자기혐오를 극복한데서 오는 공감이다. 다르다는 것, 하나가 된다는 것, 손을 내민다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다.
시대의 부산물로 다르게 태어난 이들이 있다. 단일민족이란 헛된 망상에 배척받고 고아로 다방레지로 살 수 밖에 없었다. 부모는 그들을 버렸고 사회는 외면했다. 그들이 손을 내밀고, 차별의 이유였던 다름으로 다른 차원의 예술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감동을 준다.
"의자를 들게 하고 그를 세워 놓고 한 시간 (중략) 누가 누구를 벌 줄 수 있었을까 / 세상에는 우리들이 더 미워해야 할 잘못과 / 스스로 뉘우침 없는 내 자신과 / 커다란 잘못에는 숫제 눈을 감으면서 / 처벌받지 않아도 될 작은 잘못에만 / 무섭도록 단호해지는 우리들 (중략) 선생님, 그가 부르던 이 말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 선생님, 이 말이 동두천 보산리 / 우리들이 함께 침 뱉고 돌아섰던 / 그 개울을 번져 흐르던 더러운 물빛보다 더욱 / 부끄러웠다"(동두천5·김명인)
쇠락한 보산동에는 여전하게도 뒷골목의 정취가 흐른다. 홍등가이자 윤락가였던 과거이자 누군가에겐 영원히 잊고 싶을 유년의 기억. 보산동의 미래는 오히려 부끄러운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1979년 초등학생이었을 아이는 이제 반백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과거를 극복하고 또는 소화하고 어엿한 시민으로 또 어른으로 성장했는지 들려줄 때 보산동은 되살아날 수 있다. 보산동이란 공간에는 그곳에서 유년을 보낸 사람들의 한이 깃든 이야기가 서려 있다.
이제 한을 풀고 새로운 이야기를 써야 한다. 보산리에 다른 지역에선 찾을 수 없는 이야기, 다른 것이 하나되고 서로 다른 이들이 손을 내미는 이야기가 피어날 때 보산동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