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서 평택까지 역사, 시민 품으로… 과거·현재를 톺아보자


1942년 일본군 보급용 비행장 건설하며 조성
6·25땐 훈련장 활용… 1951년 미군 제공 협정
市, 부지일대 공원·박물관 조성 방안 검토
주변 유래·가치 알릴 팻말·안내판 등 없어
휘황찬란 용산공원 청사진 비교하면 '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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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기지 반환이 결정된 건 2003년의 일이다. 한미 정상이 용산기지 평택 이전에 합의했고 2005년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2020년 기지 이전이 상당 부분 진행되며 공원 부지 일부가 개방됐다.

예약제이긴 해도 자유롭게 방문이 가능하다. 버스 투어도 이루어지며 방문객이 이국적인 장교 숙소 앞에서 찍은 사진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단골손님이 됐다.

용산기지에 조성될 공원 면적은 300만㎡에 이르고 공원을 둘러싼 역만도 9개에 달한다. 메가시티 중심지에 거대한 공원이 들어서는 건 기념비적인 일이다. 특히 고려말 몽골군 주둔지, 임진왜란 시기 왜군 병참기지,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 이어 해방 후 미군이 기지로 쓴 지역이 시민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렇듯 미군은 용산을 떠나 평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군의 새로운 주둔지 캠프 험프리스가 내다보이는 지근거리엔 일제 강점기 일본이 쓰다 미군이 물려받아 사용한 방공호가 남아 있다. 선말산, 부용산 방공호다.

선말산 방공호는 평택시 팽성읍 함정1리에서 함정2리 방향으로 남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관통한다. 부용산 방공호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모양새다. 함정리 마을은 '서원말', '선말'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조선시대 화포 홍익한을 배향한 '포의서원'이 선말산 동남부 기슭에 있어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이곳의 방공호들은 1942년 일본해군시설대가 안정리와 함정1리 사이에 보급용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조성됐다. 두 곳 방공호의 규모는 비슷하나 공사기법이 거칠고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선말산 방공호가 부용산보다 앞서 건설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부용산 방공호는 일제 패망 직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1951년 한국 정부가 미국과 팽성읍 일대 일본군 기지를 미군에게 제공한다는 협정을 맺으며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이곳을 훈련장이나 보급진지로 활용했다. 한국전쟁 이후 인근 마을 주민의 피난처, 창고, 휴게공간 등으로 사용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평택시 남산리 소나무숲의 미군 CPX 막사 모습.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이곳에서 자리를 조금 옮기면 팽성읍 남산리 강단산 일대 1만3천여㎡(4천평) 부지 소나무숲이 나온다. 차를 몰고 이곳을 지나가면 TV광고에나 나올 법한 높다랗게 자란 소나무가 드리워진 가로수 길이 주목을 끈다. 하늘로 뻗어 오래 자란 소나무는 제 키를 이기지 못하고 허리가 굽어 자연스럽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소나무숲 초입에 차를 두고 들어가니 차소리도 들리지 않고 인적도 드물다. 오직 솔잎 밟는 나의 발소리뿐이다. 오솔길이 있지만 관리는 되지 않는 듯했다. 15분 정도 천천히 걷다보니 공터가 나오고 소나무 숲과 어울리지 않는 미군 막사가 여럿 등장한다.

미군이 CPX 훈련을 위해 만들어 놓은 훈련장이다. CPX는 각급 제대의 지휘관 및 참모와 사령부 및 통신 요원 등을 훈련시키기 위한 일종의 전투 지휘 훈련인데 소나무 숲의 막사에는 남성-여성 막사가 나뉘어 있고 위험물질이 보관되고 있다는 영어 팻말이 붙어 있었다.

팽성읍 남산리를 포함해 함정리 일원은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해군비행장과 보급기지가 건설됐던 지역이다. 기록을 보면 1942년 302호 부대로 불리는 일본해군시설대는 팽성읍 일대 일본인 농장과 잔솔밭(어린 소나무 밭)에 한국인 2만명과 평택 지역 주민을 근로보국대로 징발해 비행장, 격납고, 보급기지건설을 시도했다.

비행장과 보급기지는 일제 패망 직전 완공했지만 패망하는 바람에 완공하지 못하고 해방을 맞았다. 소나무숲의 CPX 시설 아래엔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방공호가 있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평택시 남산리 소나무숲의 미군 CPX 막사 모습.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소나무숲은 야트막한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릉의 위쪽 평평한 부분에 막사가 자리 잡고 아래쪽 경사가 시작되는 곳에 방공호 입구가 있다. 방공호 입구는 길게 자란 풀로 막혀 닫혀 있었지만 방공호 지붕에 해당하는 구릉을 걸어보면 꽤 큰 규모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구릉 쪽엔 방공호 환풍구가 여럿 노출돼 있다. 평택시 조사에 따르면 내부 구조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다른 지역 방공호와 형식이 유사하고, 남산리 방공호는 비상 작전을 지휘했던 청사 대용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말산, 부용산과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엔 미군이 활용하며 일부 증축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선말산, 부용산 방공호는 입구 주변이 막혀 있어 진입할 수 없었고 남산리 방공호도 비교적 입구 부분까지 접근할 수 있었지만 폐쇄돼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만약 누군가 남산리 소나무숲에 방공호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곳이 미군 CPX 훈련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고요한 숲 한가운데 왜 미군 막사와 벙커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들 방공호 주변엔 이런 사실을 고지하는 팻말도 안내판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용산공원의 계획은 찬란하다. 용산공원 국민참여단은 지난 2021년 7가지를 제안했다. 편리하고 안전한 공원, 역사문화 가치를 지키는 공원, 보존과 활용이 균형을 이루는 공원, 가치와 가능성을 포용하는 공원, 문화 예술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공원, 주변지역과 상생하는 공원, 참여 과정이 역사가 되는 공원이다.

오래 거슬러 올라가면 몽골과 왜에 닿고 가깝게는 일제와 미군과 맞닿은 지역의 역사를 시민에게 되돌리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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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 선말산 방공호 입구가 막혀 있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수년 내 우리는 용산공원이 전면 개방되는 것을 볼 수 있을 테고 지나간 역사를 어떻게 계승하고 기억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평택은 어떨까. 캠프 험프리스 옆에 남아 있는 방공호들은 찾는 이 없이 잡초만 무성하다.

평택시는 남산리 CPX 훈련장 반환에 따라 이곳을 생태공원으로 조성하는 방안, 지하벙커를 활용해 역사공원으로 만드는 방안, 역사공원 내 한미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미군이 떠난 자리에 들어설 용산공원처럼 미군이 새로이 정착한 자리에도 공원을 조성하는 건 뜻깊은 일이 될 테다.

향후 지역 근대문화유산을 어떻게 활용해 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톺아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것인지,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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