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도 얼어붙은 행군… 70여년 묻혀있던 참혹한 비극


졸속·급조 동원 민간인들, 영하 기온서
식량도 피복도 없이 '남쪽 이동' 강요

"해골같은 꼴로 1만명 이상의 장정들
전염병에 학교강당, 사과창고서 숨져"

정부 무능·관리부실에 대규모 피해
시간 흘러 과거기록 찾기도 쉽지 않아


스물 다섯 유정수는 1950년 12월 23일 오전 8시 수원공설운동장에 섰다. 미 공군 기록(USAF)에 따르면 당시 기온은 영하 1도, 한낮 최고기온이 영상 2.4도에 불과했다. 특히 그가 행군을 한 새벽시간은 영하 4도까지 기온이 떨어졌다. 변변치 못한 옷차림에 체감 기온은 훨씬 더 떨어졌을 것이다.

유씨는 방위군이었다. 6·25 발발로 급하게 동원된 '국민방위군'이었다.

다음 주면 6·25 발생 74년을 맞는다. 비교적 상세한 국군의 행적에 비해 제대로 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국민방위군의 실상은 지난 2020년 경인일보가 발굴한 고 유정수씨의 일기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유씨 기록을 제외하곤 '전환시대의 논리'를 쓴 리영희(1929~2010) 교수와 고 정진석(1931~2021) 추기경의 증언이 그나마 알려진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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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 고 유정수씨 유품, 일기장, 신분증. /경인일보DB

정 추기경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국민방위군 징집이 종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라고 설명했다. 1950년 12월 말 서울 창경원에 모여 남양주 덕소에서 꽝꽝 언 남한강을 건넜던 일이다. 폭설에 눈 위에 지쳐 쓰러져 있다 겨우 강을 건넜는데 얼음이 깨지며 뒤쪽에 있던 무리가 빠져 죽은 것이다. 하루 10시간 이상 걸으며 주먹밥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 앞선 사람이 지뢰를 밟아 죽는 모습을 보는 고행이었다.

리 교수의 증언도 일맥상통한다. 국민방위군이 진주로 남하했는데 해골같은 꼴을 한 만명 이상 장정이 학교강당, 사과창고에서 죽어간 것이다. 감자 한 알, 고구마 한 개로 겨우 남쪽에 다다랐지만 옷은 누더기에 신발은 해어져 맨발이었고 사람이 넘쳐 교실에 수용되지 않은 사람은 밖에서 얼어죽어야 했다.

참상이었다. 이 비극의 원인이 된 국민방위군은 무엇인가. 정 추기경, 리 교수, 그리고 유씨는 왜 국민방위군에 편입됐던 걸까.

1950년 말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한 것이 계기다. 전선이 밀리기 시작하자 당시 정부는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 장정들은 제2국민병에 편입시킨다', '제2국민병 가운데 학생을 제외한 자는 지원을 받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킨다', '육군참모총장은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받아 국민방위군을 지휘 감독한다'는 원칙으로 국민방위군 부대를 편성했다.

한 마디로 모든 절차가 졸속이었다. 엉겁결에 징집된 민간인들은 육군참모총장도 국방부 장관의 지시도 받지 못했다. 군대라면 보급이 있어야 했을 테지만 피복도 식량도 없었다. '남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뿐이었고 이 명령은 곧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라는 명령이었다. 전선이 아니라 길에서 교실에서 강당에서 창고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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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 고 유정수씨 유품, 일기장, 신분증. /경인일보DB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6~2010년 활동)는 "정부는 미처 관리대책 등을 마련하기도 전에 중공군의 남침으로 인하여 급속히 수십만에 달하는 국민방위군을 남쪽으로 무리하게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워낙 급작스런 이동작전이었으므로 피복, 식량, 의약품, 수용시설 등 모든 면에서 준비가 부족하여 대규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하였다"고 기록했다.

7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정확한 징집 규모는 물론 피해 규모도 밝혀지지 않은 국민방위군 사건의 전모는 유씨 일기에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징집에 응한 유씨는 고향 화성에서 또래 남자 몇몇과 함께 수원공설운동장으로 향한다. 현재 수원공설운동장 자리에는 구 경기도청사가 있다. 팔달산 아래 구청사 운동장이 바로 수원공설운동장, 집결지 위치다. 유씨 기록엔 수원공설운동장에 족히 만 명이 되는 사내들이 집결한 것으로 나온다.

서울(창덕궁), 경기북부(안산초등학교·아현초등학교), 경기남부(수원공설운동장), 인천(축현초등학교·동산중학교) 등에 모인 국민방위군은 각기 남쪽으로 향한다. 유씨는 용인, 장호원, 문경, 상주, 의성, 영천을 거쳐 청도에 도착했다.

12월 23일 출발해 1월 4일까지 이어진 행군이었다. 이들은 당시 전쟁포로보다 적은 양의 밥을 먹으며 한겨울 행군에 나섰다. 유씨 일기에는 하루 배식이 '백미1일4홉반'이라는 기록이 있다. 전쟁포로는 이보다 많은 1일5홉5작의 식량이 주어졌다. 1되는 곡식을 두 손으로 움켜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을 뜻하고 10홉이 1되에 해당한다. 말 그대로 한줌 식량으로 버틴 셈이다.

충청북도 괴산과 경상북도 문경의 경계를 이루는 이화령을 고생 끝에 넘은 이야기, 그 과정에서 동사자가 속출한 전언 등이 일기에 담겼다. 도착해서도 문제였다. 앞서 리 교수 증언처럼 교육대 생활도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약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거나와 100명 이상이 한 교실에 몰려 자고 찬 바닥에 가마니 두어장으로 냉골을 견뎌야 했다. 소금도 없는 주먹밥을 배식하고 끝내 배식은 '1홉1작'으로 줄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은 전염병 피해로 이어졌다. 급성열병 질환 '발진티푸스'였다.

경인일보는 유씨 일기에 이어 강화도에서 부산으로 행군한 류기안씨의 수기를 추가로 입수해 지난 2020년 이같은 사실을 증명했다.

류씨의 수기에는 "아침 햇볕이 솟아 따뜻해질 무렵에 가마니 방바닥을 디려다(들여다) 보면 움질거리는 것이 모두 이였습니다. 이런 고생은 호사하고 어찌도 복합한 곳에 인원이 많은지 이루 말할 여지조차 없었습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부산 경험을 서술한 대목인데 발진티푸스는 바로 이(louse)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이다. 비위생적이며 다수가 밀접한 환경은 발진티푸스의 발현을 촉진했다. 1951년 발진티푸스로 숨졌다고 기록된 사례만 5천667명으로 전해(1950년 2천523명)와 이듬해(1952년 923건)에 비해 높다. 기록되지 않고 그저 열을 앓다 숨진 국민방위군이 얼마나 될지는 가늠할 수가 없다.

보급품 미비로 얼어 죽고 전염병을 앓다 죽은 국민방위군은 당시 정부가 얼마나 무능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국민방위군 일기
일기 전문 온라인
74년이 흘러 다시 6·25다. 장터가 열릴 준비가 한창인 구경기도청사 운동장, 카페가 즐비한 남양주 덕소에서 과거 일어난 비극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풍경은 바뀌었고 국민방위군 피해자는 세상을 떠났다. 남은 것은 기록이며 기록을 읽고 기억하는 자다.

경인일보 홈페이지에는 국민방위군 유정수씨의 일기 전문이 공개돼 있다. 일독을 권한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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