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경원선 철도노선 일부… 현재 교각·터널만 남아
6·25 당시 탄약고… 폭격 균열로 특이 자연현상 발생
유사사례 일본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관광지 변모
역사적 의미 되새겨야… 착취 역사 재조명 노력 강조
연천군 신서면 경원선 폐철교에서 남쪽 방향으로 200여m. 여기에 연천 폐터널이 있다. 조금만 더 이동하면 강원도 철원이다. 일제 강점기, 서울 용산에서 출발한 경원선은 연천~철원을 거쳐 원산까지 이어졌다.
콘크리트 교각만 남은 철교 흔적과 인접한 폐터널은 일제가 기획한 추가 노선의 흔적으로 보인다. 폐터널 서쪽으로 경원선이 지나는데 1912년 경원선 개통 이후 새로 터널을 뚫어 신규 노선을 신설하려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는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철도도 사라져 교각과 터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연천 폐터널 역고드름은 6·25 전쟁 당시 미국의 폭격으로 터널 상판에 균열(7월 2일자 11면)이 생기면서 나타났다. 위에서 아래로 맺히는 게 일반적인 고드름인데 균열 사이로 물이 흐르며 바닥에서 위로 솟는 모양의 역방향 고드름이 형성된 것이다.
길이 100m, 폭 10m의 폐터널이 전쟁 당시 북한군의 탄약고로 활용됐기 때문에 폭격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철도용 터널로 만들어졌으나 노선 신설을 앞두고 일제가 패망하며 활용되지 않았고 잠시 탄약고로 쓰였다 폭격 이후엔 관광지가 됐다. 안전사고를 우려해 펜스가 둘러쳐진 지금은 터널 안으로 접근할 수 없다. 터널→탄약고→관광지로 변모하게 된 폐터널의 과거는 기구한 한국 근현대사와 포개진다.
비슷한 운명이면서 더 알려진 사례도 있다. 경원선이 개통한 해(1912년)에 일제는 시흥광산 개발을 시작했다. 시흥광산은 황금광산으로 개발됐다. 191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수백kg의 황금이 이곳에서 발굴된 것으로 전해진다.
1972년까지 쓰인 시흥광산은 이후 최근까지 40년 동안 새우젓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다. 동굴의 저온이 저장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경기도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탈바꿈한 이곳은 광명동굴이다. 황금광산과 새우젓 보관고를 거쳐 관광지로 변모한 것이다.
연천 폐터널, 시흥광산과 비슷한 사례면서 세계적으로 더 알려진 경우도 있다. 폐터널, 시흥광산처럼 일본과 직접 연관돼 있다. 바로 일제시대 조선인 강제노역이 이뤄진 사도광산. 이달 중 일본 니카타현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심사가 이뤄진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심사를 통해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지난달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가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보류' 의견을 내며 관심은 더욱 고조됐다.
'보류' 의견에는 "광산 채굴의 모든 기간에 걸친 추천 자산의 전체 역사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해설·전시 전략과 시설을 현장에 개발하라"는 요구가 담겼다고 한다. 일본은 에도시대(1603~1867)로 유산의 가치를 한정했지만 조선인들이 강제노역한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연천 폐터널, 시흥광산, 사도광산은 모두 조선인의 노역이 들어갔다는 게 공통점이다. 폐터널은 역고드름이란 자연현상으로 주목받지만 터널 가설공사에 동원된 지역민의 노동착취 현장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 사도광산이 가장 오래된 자연광산 중 하나라는 것만큼이나 조선인 1천500여명이 강제노역한 장소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2019년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사도광산에서 자행된 조선인 강제노역은 1939년 2월부터 시작됐다.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인의 이름과 인적 사항도 남아 있고 이들에게 미지급된 임금의 내역까지 존재한다.
반면 시흥광산이나 폐터널에 동원된 지역민의 존재는 잊혔다. 일제는 경원선을 통해 대륙침탈의 인프라를 건설했고 연천에 또 다른 터널을 뚫어 수탈의 범위를 넓히려 했다. 지역민 노동 착취로 만들어진 경원선의 잔재는 경기 북부에 여전하다.
사도광산이 에도시대 광산으로만 기억돼선 안 되는 것처럼 연천 폐터널도 역고드름의 장소로 기억해선 안 된다. 자연현상만 강조한 볼거리에서 역사적인 연원이 드러난 기억거리로 변화해야 한다.
조선인 역사를 배제한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물은 지우고 과거를 윤색하려는 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우리 땅에서 벌어진 조선인의 노역과 수탈의 흔적을 얼마나 기억하려 노력했는지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것도 필요한 시기다.
우선 일제가 연천 폐터널을 통해 새로운 노선을 추가하려 했던 부분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경부선, 경의선에 이어 경원선까지 동원해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수탈의 기록을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연천 폐터널의 역고드름은 실은 상처다. 북한군 머리 위에 쏟아진 포탄은 세월이 흐르며 잊혔지만 흔적이 남아 역고드름을 만들었다. 어찌보면 고드름이 거꾸로 자라는 현상이 아니었다면 폐터널의 존재는 더 쉬이 잊혔을지 모른다.
터널 상판의 작은 균열이 이곳이 어딘지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북한군 탄약고 이전에 철도 터널로서 연천 폐터널은 한반도 병참기지화의 남은 상징이다. 사도광산에 분개하는 한편 우리에게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수탈의 아픔을 되새기고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 또 잊히는 것을 막아야 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
/신지영·이영선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