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사동 234번지와 242번지 사이
100여척 배 오가던 안산 마지막 포구
이방인에게 보금자리 되어준 곳

경인일보 자료실에 남아있는 옛 사리포구 전경. /경인일보 아카이브
경인일보 자료실에 남아있는 옛 사리포구 전경. /경인일보 아카이브
7월 6일 안산 호수공원 중앙광장과 포구광장을 연결하는 안산제5보도육교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왼쪽엔 옛 사리포구 234번지 오른쪽엔 242번지가 위치했다. 현재 사리포구는 매립돼 시민들의 휴식 공간인 호수공원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세워졌다. 2024.7.6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7월 6일 안산 호수공원 중앙광장과 포구광장을 연결하는 안산제5보도육교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왼쪽엔 옛 사리포구 234번지 오른쪽엔 242번지가 위치했다. 현재 사리포구는 매립돼 시민들의 휴식 공간인 호수공원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세워졌다. 2024.7.6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저는 ‘안산토박이’입니다. 안산에서 태어나 안산에 있는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렇게 서른해 동안 안산 곳곳을 누비며 살아왔습니다. 덕분에 ‘안산의 아들’이라는 닉네임(?)을 얻었고, 그 덕에 레트로K 안산편 취재에 참여했습니다. 안산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던 저도 불과 30년 전까지 안산에 어업을 하던 포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어촌보다는 ‘공업도시’, ‘계획도시’, ‘이주민의 도시’, ‘세월호의 도시’가 제게 더 친숙하기 때문이죠.

반월국가산업단지가 위치한 공업도시 안산은 대표 관광지인 대부도가 있어 서해와 밀접한 바닷가 도시이기도 합니다. 저도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엔 대부도로 소풍을 많이 갔습니다. 방아머리 해수욕장에서 밀물 땐 물장구를, 썰물 땐 갯벌 체험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성인이 돼서는 광활한 서해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보기 위해 차를 몰고 구봉도 낙조 전망대도 여러 번 갔죠. 이들 대체로 안산 중심에서 차를 타고 1시간 이상은 가야 하는 지역입니다.
그렇게 보니, 안산의 본질은 ‘어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성곶포·조구나루·원당포·별망포구·사리포구 등 조선 후기 때부터 번성했던 포구와 나루가 한둘이 아니죠.
외곽지역에서만 어업을 했던 건 아닙니다. 시 중심부에서 차로 10분, 걸어서 30분이면 갈 수 있는 사동 호수공원도 한때는 주말에 많으면 수천 명이 찾는 포구였습니다. 포구의 이름은 사리포구. 30년 전까지 이 공원에 100여척이 넘는 배들이 왔다 갔다 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안산 사동 234번지와 242번지 사이에 위치해 있었던 사리포구는 1950년 형성돼 1999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1987년 시화방조제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배들이 경기만으로 나갈 수 없게 되자 제대로 된 어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죠.
50년 가까이 안산 시민과 경기도민의 일터이자 관광지였던 사리포구는 안산의 마지막 포구였습니다. 그나마 안산 시민들에게 친숙한 이름이죠. 50년 전 사리포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30년 가까이 흐르는 지금 포구에서 일했던 주민들은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7월 6일 안산 호수공원에 사리포구를 추억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2024.7.6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7월 6일 안산 호수공원에 사리포구를 추억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2024.7.6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고향 다 다른 이주민들, 먹고 살자고 손 잡았다

사리포구를 일군 건 6.25 전쟁 이북 실향민과
댐건설로 살 곳을 잃은 호남지역 이주민들입니다

사리포구를 일군 건 국가도, 지자체도, 안산 토박이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1950년 6.25 전쟁 당시 이북에서 넘어온 실향민들과 1962년 정부의 섬진강 다목적댐 건설로 살 곳을 잃자 안산으로 온 호남 지역 이주민들입니다.

말투, 고향, 출신, 배경 등이 다른 이주민들은 오로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똘똘 뭉쳤습니다. 어업 경험이 있던 실향민들이 주로 배를 몰았고, 호남 지역 이주민들 가운데 남자는 선원 생활, 여자는 생선 장사를 했죠.

이처럼 지역 주민들이 똘똘 뭉쳐 만든 사리포구는 1980년대 전성기를 맞습니다. 80년대 시화반월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안산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찾는 손님이 많아졌기 때문이죠. 또 사리포구는 주변 풍경이 아름답고 거리가 가까워 주말이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오는 휴양지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1993년에 촬영된 시화반월공단의 전경. /경인일보 아카이브
1993년에 촬영된 시화반월공단의 전경. /경인일보 아카이브

당시 사리포구의 수산물시장인 물량장에선 매일 배에서 어획된 25~30t(톤)가량의 싱싱한 새우, 꽃게, 가재, 망둥이 등이 주로 판매됐습니다. 특히 김장철엔 새우젓을 사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손님들이 몰려들었다는 일화가 참 유명하죠. 한창 잘 나갈 땐 147척의 배가 상시 어업하고, 270여개의 횟집포장마차에선 다라이(대야)를 가져다 놓고 손님들을 반겼다고도 합니다. 하도 손님들이 많아 주말이면 차 댈 곳이 없었고 장사가 너무 잘돼도 너무 잘돼, 사리포구에선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사리포구에서 20여년동안 장사를 해오신 노영자씨(71). 사리포구를 잊지 못해 ‘사리공주네’라는 간판으로 오이도에서 장사를 이어가고 있다.  2024.7.3 /김대훈기자 kdh2310@kyeongin.com
사리포구에서 20여년동안 장사를 해오신 노영자씨(71). 사리포구를 잊지 못해 ‘사리공주네’라는 간판으로 오이도에서 장사를 이어가고 있다. 2024.7.3 /김대훈기자 kdh2310@kyeongin.com

사리포구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했던 노영자(71)씨는 당시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놀러오기 좋은 곳이라 인기가 좋았어요.
물 들어올 때 되면 여자손님 업고 뛰어다니고 그랬는데
참 재미있었어요.

사리포구 포장마차 운영했던 노영자(71)씨

“덕적도에 살다가 6살 때 사리로 이사 왔어요. 부모님이 실향민이셨고 초창기에 아버지가 배를 가지고 어업을 하셨어요. 아버지가 처음 사리포구에 왔을 때, 정말 아무것도 없는 동네였어요. 아버지가 고기를 잡아오면 엄마가 다른 동네로 나가 쌀로 받아오고, 다른 먹을 것으로 물물교환해서 오면 그걸로 생계를 이어 나갔어요. 그러다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고, 아버지 처럼 배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면서 점점 포구의 모습이 돼갔어요. 우리같은 2세대들이 성장하면서 이제 갓 잡아온 생선을 회로 썰어 파는 좌판들도 생기고 횟집들도 생기구요. 저도 남동생이 배 타서 잡아온 고기로 포구에서 포장마차를 차려 장사했죠. 그때 얼마나 장사가 잘됐냐면, 소래포구보다 우리가 훨씬 인기가 더 좋았어요. 주말되면 큰 버스가 수십대가 몰려와서 따로 버스 주차장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수원, 안양 같이 인근에서도 오기 좋고 서울 사람들도 주말에 왔다 가기가 좋잖아요. 손님들이 회 먹고 술 마시다 보면 물이 막 들어올 때가 되거든요. 저희가 여자 손님들은 막 업고 뛰어나오고 그랬는데, 참 재미있었어요.”

영자씨는 힘들었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신나게 장사하면서 이웃들과 돈독한 정을 나눴던 그때를 참 그리워했습니다.

사리의 맛은 인심이었어요.
그 집 숟가락 몇갠지 알 정도로 친하니까요.
어려서부터 먹고 살려고 일 밖에 안했는데
저는 그게 다 추억이에요.
그냥 우리를 사리에 두었으면 더 잘 살지 않았을까 싶고…

사리포구 포장마차 운영했던 노영자(71)씨

“우리 사리의 맛은 ‘인심’이었거든요. 서로 아끼고 도와주면서, 인심이 정말 좋았어요. 좌판에서 같이 장사하면서 밥도 같이 해먹고 함께 놀기도 했어요. 그 집 숟가락이 몇갠지 까지 다 알 정도로 친하니까요. 특히 남자들은 고기를 잡고 여자들이 좌판에 나와 장사하면서 아이들도 키우고 어른들도 모시고 했단 말이에요. 사는 모습도 비슷하고 서로서로 집안 경조사도 챙겨주고 하다보니 우리끼리 ‘맏며느리 모임’을 만들자 했고 그게 벌써 30년 째 한달에 한번, 지금까지 만나고 있어요.”

1997년 사리포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에, 사리포구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영자씨는 그때 오이도로 넘어와 다시 장사를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이도로 옮긴 지 벌써 20년이 훌쩍 넘어갔지만, 사리포구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영자씨가 운영하는 횟집 이름은 ‘사리공주네’. 영자씨의 출발이 사리였다는 걸 꼭 알려주고 싶었답니다.

“다 사라진 것에 대해서 생각하면, 서글퍼요. 아직도 그 근처에 사니까, 출퇴근길에 ‘사리 사거리’를 지나거든요. 어려서부터 줄곧 먹고 살려고 일 밖에 안해서 장사한 게 전부인데, 저는 그게 다 추억이에요. 우리를 그냥 사리에 두었으면 더 잘 살지 않았을까 싶고..”

7월 6일 안산 호수공원에  1962년 정부의 섬진강 다목적댐 건설로 살 곳을 잃자 안산으로 온 호남 지역 이주민들을 기억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2024.7.6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7월 6일 안산 호수공원에 1962년 정부의 섬진강 다목적댐 건설로 살 곳을 잃자 안산으로 온 호남 지역 이주민들을 기억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2024.7.6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사리역 만든 것도 사리포구 주민들의 생활력

사리포구 가는 길엔 꼬마 협궤 열차도 있었습니다. 1937년 일제강점시 시절 만들어져 1995년 폐선된 수인선을 다니던 열차였죠. 사람들은 동명의 역인 사리역에서 내려 사리포구를 찾았습니다.

사리역을 만들 때도 사리포구 주민들의 강한 생활력이 또 한 번 발현됩니다. 당시는 버스 노선이 많지 않았기에 주민들의 교통은 오직 수인선 협궤 열차 하나였습니다. 사리포구 주민들 입장에선 가장 가까운 거리가 좀 있는 일리역(현재 한대앞역 인근)이었죠.

주민들은 직접 땅을 내놓거나 정부에 요청하는 등 끈질긴 노력 끝에 1966년 간이역 임시 정류장인 사리역을 세웠습니다. 영화 <기적> 처럼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거죠. 이들의 염원이 열차를 달리게 했습니다.

그렇게 1995년 폐선될 때까지 수원행엔 통학하는 학생들이, 인천행엔 농작물을 재배해 판매하는 보따리 상인들이 협궤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앞사람과 무릎이 닿을 듯 말 듯 좁디좁은 객차였지만 열차엔 사리 주민들의 설렘, 희망, 피로가 서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사리역을 추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리포구에 맏며느리 모임이 있다면, 사리역 주변 마을에선 막내로 태어나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이들이 만든 모임도 존재합니다. 한우물 모임, 일명 ‘막둥이 모임’이라고 불리죠. 9살 차이가 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형, 동생하면서 40년 넘게 만남을 이어오고 있답니다. 가깝게는 수원, 멀게는 의정부까지 몸은 안산을 떠났지만 마음은 언제나 함께라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1981년에 촬영된 사리역 풍경. 교복을 입은 소녀가 간이역이었던 사리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경인일보 아카이브
1981년에 촬영된 사리역 풍경. 교복을 입은 소녀가 간이역이었던 사리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경인일보 아카이브
7월 6일 안산 사리역 모습. 수인분당선 정차역 중 하나인 사리역은 2020년 9월 12일 지역 주민 교통 편의라는 이유로 다시 재개업했다. 2024.7.6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7월 6일 안산 사리역 모습. 수인분당선 정차역 중 하나인 사리역은 2020년 9월 12일 지역 주민 교통 편의라는 이유로 다시 재개업했다. 2024.7.6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지금 그 자리엔 안산 호수공원과 아파트 단지들

1997년 7월 시화호와 시화방조제 모습. /경인일보 아카이브
1997년 7월 시화호와 시화방조제 모습. /경인일보 아카이브

1987년 시화방조제 착공이 본격화되면서 사리포구의 운명도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방조제가 완공되면 바다로 나가는 길이 막혀 어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죠. 심지어 사리포구 사람들은 공사가 시작된 지 모르고 있어 대응도 늦었습니다. 불이 한창 타오를 때 꺼져버릴 위기에 처한 셈이죠.

결국 시화방조제는 1994년 완공됐습니다. 따라서 사리포구에서 경기만으로 향하는 뱃길도 막혔습니다. 50년 가까이 지속됐던 어업은 끝이 났고, 어촌계를 꾸리며 활동했던 지역 주민들도 사리를 떠나면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옛 수인선 열차권. /경인일보 아카이브
옛 수인선 열차권. /경인일보 아카이브

사리역도 같은 운명을 걸었습니다. 버스 노선이 확대되면서 수인선 승객들이 줄었습니다. 협궤 열차가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1995년 폐선에 이르렀죠. 1937년 3월부터 운행했던 수인선은 1995년 12월 31일 마지막 운행을 끝으로 멈췄습니다.

사리포구가 사라진 자리엔 안산 호수공원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섰습니다. 호수공원은 매일 산책하는 시민들로 붐빕니다. 시민들은 여기서 운동도 하고, 대화도 나누고, 돗자리를 펴 휴식을 취합니다. 한때 이곳이 드넓은 경기만으로 향하는 뱃길이었다는 사실은 사리포구 역사를 기록한 조그만 비석만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리역은 2020년 수인선이 재개통되면서 새 역사로 재탄생했습니다.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폐선됐지만 25년 만에 교통 편의라는 이유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보다 더 쾌적한 환경에서 더 멀리 갈 수 있지만 예전 분위기를 느낄 수 없어 아쉬워하는 주민들이 많습니다. 협궤 열차가 달렸던 철길은 그대로 방치된 게 대부분입니다. 일부 구간만 추억을 위해 모형 열차를 세워두고 남겨두었습니다.

1992년 3월 고잔역에 들어서는 수인선 협궤열차. /경인일보 아카이브
1992년 3월 고잔역에 들어서는 수인선 협궤열차. /경인일보 아카이브
7월 6일 안산 고잔역 인근 옛 수인선과 협궤 열차를 추억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2024.7.6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7월 6일 안산 고잔역 인근 옛 수인선과 협궤 열차를 추억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2024.7.6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국가 주도 개발에 사라진 지역 공동체… 오늘, 다시 기록하는 지역 주민들

7월 1일 안산 사동 청소년시설 1도씨에서 사동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동지역사모임 선생님(왼쪽부터 신대광, 이명숙, 송보림)들이 촬영에 임하고 있다. 2024.7.1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7월 1일 안산 사동 청소년시설 1도씨에서 사동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동지역사모임 선생님(왼쪽부터 신대광, 이명숙, 송보림)들이 촬영에 임하고 있다. 2024.7.1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그리고, 사리포구와 옛 사리역의 역사를 기록하는 모임이 안산 사동에 있습니다. 2015년 결성된 사동지역사모임입니다. 사동지역사모임의 신대광 선생님은 사리포구와 사리역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서로 다른 이주민들이 사리포구에서 어떻게 뭉쳤을까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주민이라서 뭉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려면 마을을 함께 만들어야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사리포구의 역사를 아는 게 중요한 이유가 이 때문이죠. 하지만 사리포구와 옛 사리역을 추억할 수 있는 유산은 방치된 상태에요. 꼬마 열차가 다니던 빈정철교만 하더라도 안산과 화성 경계에 있어 아무런 지자체도 신경 안 쓰고 있죠. 좋은 지역 문화유산으로 만들 수 있을 텐데 지자체에서 나설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7월 6일 안산 고잔역 인근 옛 수인선과 협궤 열차를 추억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2024.7.6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7월 6일 안산 고잔역 인근 옛 수인선과 협궤 열차를 추억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2024.7.6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

강산이 네 번 흘러가는 동안 어촌 마을은 수도권 최대의 공업도시로 바뀌었습니다. 포구는 공원이 되고, 누군가의 고향과 인심 넘치던 지역 공동체는 사라졌습니다. 이주민들이 지역 주민으로 거듭나면서 일군 사리포구와 옛 사리역은 이제는 현존하지 않습니다. 다라이와 꼬마 협궤 열차에 담겼던 희망과 추억은 이제 책이나 사진,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중앙 주도의 개발 시대에서 지역이 놓쳤거나 포기해야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비석에 새긴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중앙 주도 개발 시대가 지역에 남긴 흔적을 되짚어보는 지금, 부활한 사리역에선 열차가 오늘도 안산시민들의 설렘, 희망, 피로가 담긴 이야기를 싣고 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