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터·묘소로 보는 독립유공자


파주 만세운동 주도 심상각 선생 집터·묘소
종손 심재만씨가 지켜… 방문한 이들 '가이드"
찾는 발길 줄지만 광복절 다시 손님맞이 준비

학도병 탈출 6천리 여정·'사상계' 발간 장준하
파주시, 통일동산 4천㎡ 터에 기념 공원·조형물
아직 개발로 사라지고 방치된 공간들 대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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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상각 선생 집터 뒷산의 묘소


'애국지사 심상각 선생의 묘'

파주시 광탄면 심상각 선생의 집터 뒷산을 10분여 올라가니 건국훈장 애국장 비석과 팻말이 선생의 묘소를 친절히 알려준다. 수풀이 우거져 있지만 팻말과 비석 덕분에 단번에 심상각 선생의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1919년 3월, 우산 심상각 선생은 파주 만세운동을 주동한 인물 중 하나다. 광탄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2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봉일천리 장터에 있던 1천여명과 합세해 봉일천 헌병주재소를 습격했다. 파주 만세운동은 경기 북부지역 최대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격렬한 만세운동 이후 심상각 선생은 중국 상해로 망명해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 내무부 장관인 박찬익 선생의 협조로 합류한 심상각 선생은 상해에서도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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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만세운동을 주도한 우산 심상각 선생의 건국훈장 비석. /이영선기자 zero@kyeongin.com

심상각 선생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건 약 15년만이었다.

심상각 선생은 국내에 돌아와서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파주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역임하는 등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광탄보통학교에 관한 별도 기록이 없기 때문에 설립 및 운영과정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후 심상각 선생은 자신과 함께 만세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동지들을 위한 위령제를 하는 등 애국지사 선양사업에 힘쓰다가 1954년 11월 9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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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만세운동을 주도한 우산 심상각 선생의 묘 안내판. /이영선기자 zero@kyeongin.com

심상각 선생의 집터와 묘소는 선생의 종손인 심재만(82)씨가 지키고 있다. 집터 바로 옆에 지은 집에서 살고 있는 심재만씨는 할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찾는 이들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심재만씨는 심상각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게 된 문서와 사진자료 등 그동안 모아둔 자료를 꺼내 하나씩 설명해줬다.

그는 "사실 할아버지에 대한 또렷한 기억은 없다"면서도 "할아버지와 (지금은 폭격으로 없어진) 집에서 같이 시간을 보냈던 기억, 종종 집에 경찰들이 찾아와 할아버지를 조사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상해임시정부에 계셨던 만큼 중국어를 비롯해 일본어와 프랑스어까지 여러나라 언어를 능통하게 구사하셨던 기억도 난다"며 심상각 선생을 떠올렸다.

그가 집터 앞에 직접 심상각 선생의 표창장과 훈장증을 만들어 설치하게 된 것도, '독립지사 심상각 생가·묘소 방문 기념'이라고 각인한 볼펜을 제작해 학생들에게 나눠주게 된 것도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부채감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점점 심상각 선생을 찾는 이들이 줄어들고 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1년에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하곤 했었는데 최근엔 눈에 띄게 발길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들뜬 목소리로 조만간 심상각 선생의 묘소에 벌초를 하러 간다는 계획을 전했다. 오는 15일 광복절을 맞아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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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만세운동을 주도한 우산 심상각 선생의 묘. /이영선기자 zero@kyeongin.com

■ 장준하공원에 조성된 '돌베개' 형상화한 묘


"우리는 무기를 가졌습니다.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물을 똑바로 겨냥한, 젊음이란 이름의 무기입니다."

장준하 선생의 자서전 '돌베개' 중 한 구절이다. 돌베개는 장준하 선생이 일본군 학도병에서 탈출해 임시정부를 찾아 떠난 6천리 여정을 담은 책이다. 장준하 선생은 1944년 일본군 학도병에 징집돼 중국 쉬저우에 배치됐지만 그 해 7월에 탈출, 1945년 1월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한다.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장준하공원에는 돌베개를 형상화한듯한 장준하 선생의 묘역이 있다. 높지는 않지만 널따란 돌로 만들어진 묘역은 단번에 돌베개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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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장준하 공원과 선생의 묘소.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장준하 선생의 묘소 옆에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자손만대에 누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지성일관 용왕매진하자"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놓여져 있다. 비석은 장준하 선생의 정신을 다시 각인시켜준다.

장준하 선생의 유해는 파주시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 안치됐지만, 장준하공원이 문을 열며 이장됐다. 파주시는 2012년 8월 연간 200만명이 찾는 통일동산 4천㎡ 터에 장준하공원을 만들었다.

이곳에는 장준하 선생의 생애와 공적을 기록한 조형물도 함께 마련됐다. 조형물에는 장준하 선생의 출생과 성장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언론 활동이 나열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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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장준하 공원과 선생의 묘소.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에서 활동했던 장준하 선생은 해방 후 1953년 월간지 '사상계'를 발행한다. 이 과정에서 장준하 선생은 민주화 운동을 펼쳐 수차례 투옥됐다.

장준하 선생은 투옥된 상태에서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으며, 이후 민주화운동을 멈추지 않다가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되기까지 한다.

장준하 선생은 유신반대운동을 벌이던 중 1975년 8월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사고로 숨졌다.

이렇듯 심상각 선생이 독립운동을 도모한 집터와 묘역,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겠다는 장준하 선생의 의지가 담긴 글귀가 새겨져 있는 장준하 공원으로 우리는 독립운동가를 기억한다.

한사람이 생애를 보낸 생가 혹은 집터, 생을 마치고 영면에 든 묘에는 그의 한평생이 깃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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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장준하 공원과 선생의 묘소.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그러나 독립운동가를 기억할 수 있는 집터도 묘소도 위기다. 집터는 도시개발로 인해 하나 둘 없어지고, 팻말이나 어떠한 안내 표식도 없이 말 그대로 방치된 집터나 묘역도 대다수다.

광복절 즈음만이라도 우리 동네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가보는 건 어떨까. 이들을 기억하는 발걸음은 이어져야만 한다.

/이영지·이영선기자 bbangz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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