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 일제 안양~안산 병참기지 잇던 박달교
최적 요지 이유 '도로공사' 일부 건설 추정
목조로 지어진후 미군 승계 콘크리트 재건
인근 기지 헬기장 사용… 전술핵 보관 기록도
북측 난간 없어 큰 중화기 지나게 개축 흔적
'박달2동' 호현동으로 변경 10월까지 투표
안양시는 만안구 박달2동 이름을 '호현동'으로 바꾸려 한다.
오는 10월까지 조사에서 주민 다수가 찬성하면 박달2동 명칭은 호현동으로 바뀐다. 호랑이 호(虎)에 고개 현(峴)자를 쓰는 호현은 우리말로 하면 범고개다. 호랑이가 사는 고개에 있는 마을이라 호현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박달동에는 모두 12개 마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개와 가장 가까운 마을은 웃말(上村)이었다. 말 그대로 가장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윗말 주민이 호랑이에게 잡혀 죽자 아래쪽으로 이주했고 그곳에 정착지가 형성됐다. 현재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에 있는 조선 태종의 아들 후령군 이간의 묘도 이 지역에 있었다고 하니 박달동에 사람이 모여 산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박달동 주민들은 음력 10월 2일에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호랑이에게 잡혀가지 않고 공생하길 바라는 데서 시작한 전통이었을 것이다.
웃말 외에도 가장 위쪽에 있는 박달리라고 해서 불린 웃박달리, 부자가 많아 부자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붓골, 안개가 자주 끼어 선녀가 산다해서 붙여진 선녀골(이상 안양시지) 등 박달동 12개 마을이 사라진 건 1930년의 일이다. 안양에서 수원으로 후령군 묘역이 이장된 것도 같은 시기다. 바로 일제 강점기, 일제가 이곳에 병참기지를 만들며 마을이 사라졌다.
지금이야 시흥에서 안양, 안양에서 시흥으로 이동하려면 고개를 우회하는 자동차 도로를 이용하면 되지만 일제시대만 해도 '곤두레미 고개'가 유일한 교통로였다고 한다(시흥문화대전). 안양시 박달동과 시흥시 목감동을 잇는 곤두레미고개는 강도가 많아 빨리 곤두박질치듯 지나가야 한대서 곤두레미라고 불렀다는 설과 곤드레만드레 취한 사람이 고개에 많아 곤두레미라고 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안양 사람들은 곤두레미고개를 넘어 시흥, 안산, 소래까지 이동했다. 곤두레미고개의 동쪽사면과 서쪽사면에서 모두 농사를 지었고, 경사가 완만해 자동차나 사람의 통행에 불편함이 없었다고 한다. 이 곤두레미고개가 폐쇄된 것도 바로 일제시대의 일이다. 지금도 시흥쪽 서사면에선 농사가 지어지고 동사면은 군부대가 주둔한다.
곤두레미고개 폐쇄, 12개 마을 이주, 후령군 묘역 이장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일제가 '평양 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을 만들면서 시행됐다. 이후 10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곤두레미고개는 여전히 폐쇄 상태다. 이 지역이 일제의 병참기지에서 미군 주둔지로 또 다시 한국 육군부대의 소재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박달교'를 말하기 위해 길게 박달교를 둘러싼 지역의 이야기를 했다. 박달교는 일제의 '안양 안산선 도로공사'의 일부로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는 당시 일제 조선군경리부가 만든 '안양-안산선 교체도로 공사 설계서'가 남아 있다.
군사 목적으로 안양과 안산을 잇는데 박달동 병참기지의 통행 필요성으로 박달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병참기지를 만들기엔 박달동은 최적의 요지였다. 서울과 가까우면서 주변 산에 둘러싸인 분지여서 안전성도 뛰어났다. 경부선 철도와 가까워 물자 수급에 유리했음은 물론이다.
현재 병목안시민공원이란 이름으로 재탄생한 안양시 만안구의 대표 공원은 실은 폐채석장이었다.
일제가 만든 채석장에서 캐낸 광물은 바로 이래 철길을 따라 철도로 운반됐다. 일제가 만들고 오랜기간 운영되다 버려진 채석장, 깎아지른듯한 절벽의 산에다 아름다운 공원을 만든 것이다. 병목안의 채석장과 박달동의 병참기지는 일제가 안양을 중요한 군사 요충지로 여겼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아직까지 보존된 박달교 설계도를 보면 정교한 계획에 따라 다리가 건설됐음을 알 수 있다. 길이 15m, 폭 4.1m로 설계돼 제작됐다.
다리를 통해 병기 탄약고 통행이 이뤄졌다. 박달교 건설 시기는 1930년으로 추정되며 아시아역사자료센터 기록에 '소화 16년 5월 개정공사' 기록이 남아 있다. 소화 16년은 1941년을 말한다. 일제는 박달동 인근에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안양을 주요지로 삼아 민간인을 수탈하고 병참기지화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목교로 지어진 박달교는 일제 패망 이후 병참기지 입지를 미군이 승계하며 콘크리트로 재건됐다.
미군은 박달교 건너 기지를 헬기장으로 사용하고 핵을 보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전술핵이 보관됐다는 당시 근무 미군의 기록이 남아 있다. 미군 주둔 당시 박달교는 길이 16m, 폭 15m로 확장된다.
큰 중화기가 지날 수 있도록 개축된 흔적이다.
실제로 현재 박달교를 보면 일제가 만든 부분과 미군이 개축한 부분을 육안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일제가 가설한 다리는 남측에 난간이 남아 있고 미군이 확장한 북측은 난간이 없다. 또 일제가 조성한 교각 하부의 구조와 미군이 확장한 교각 하부와 천장 역시 건설 양식이 달라 금방 확인 가능하다.
일제 강점기 박달교의 건설은 오직 수탈과 병참기지화에 목적이 맞춰졌다. 안산과 안양 사이 도로를 만든 것 역시 군사 목적에서였다. 적어도 조선시대부터 그곳에 정착한 선녀말, 웃말 등 12개 마을을 없앴고 곤두레미고개의 통행도 통제됐다.
인접한 채석장에선 광물이 수탈돼 철도로 운반됐다.
식민지의 수탈을 그럴듯한 근대화로 포장해도 포장지 속에서 풍기는 악취는 가려지지 않는다.
일제는 수암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았지만 군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군사교각이었다.
분명히 박달동 주민을 위해 다리를 만들지 않았다. 아직 남아 있는 조선군경리부의 도로공사 결재 문건, 교각 설계도는 이 수탈이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이뤄졌는지를 그 자체로 웅변한다. '식민지 근대화'는 착취와 수탈을 의도적으로 오역한 허구이며 그 증거는 박달교에 남아있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