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던 시대에 평택국제중앙시장은 유일하게 눈과 귀와 코를 사로잡는 공간이었습니다. 1958년에 ‘중앙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출범한 평택국제중앙시장은 1952년 오산공군기지가 송탄에 건설되면서 미군 주둔지가 형성됐고, 이들 미군을 상대로 한 상점들이 들어서며 시작됐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헐벗던 시절이었죠. 유일한 소비자였던 미군을 잡기 위해 미군부대 앞 가게들이 하나둘 생기고 송탄역 철로길을 넘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자연히 소비 공간도 커졌습니다. 그렇게 시장이 형성되자, 점차 보통의 우리도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생필품을 구하기위해 오는 큰 상권이면서도, 사실 이때부터 평택국제중앙시장을 찾는 일은 놀거리 볼거리 하나 없던 흑백시절에 ‘컬러TV’를 구경하는 일과 같았다고 볼 수 있죠.
여기 오면 다 구할 수 있어요
오랫동안 국제중앙시장에서 장사를 해온 정창무 평택국제중앙시장 상인회장의 기억도 그랬습니다.
“미군기지가 생기면서 신장쇼핑몰이라고 해서, 미군을 상대로 한 상점들이 하나 둘 늘어난 거리가 생겼어요. 그땐 우리가 워낙 못 살때잖아요. 그런 경제규모로 비교해보면, 주한미군 씀씀이가 (우리한텐) 엄청나니까 정말 좋은 상권이었죠. 오죽하면 그때 이 시장을 부르는 별명이 ‘달러박스’였어요. 그렇게 물건들이 넘치고, 사람들이 몰리다보니 내국인을 상대로 한 중앙시장이 같이 생겨났구요. 그땐 아무것도 없을 때잖아요. 근데 여기에 오면 다 구할 수 있으니, 그때 규모가 엄청 컸어요. 지금이랑 크게 달라진 게 없을 정도로.”
누구보다 앞서나간 ‘세련미’ 가득한 시장
‘다양성’의 상징… 원조 식당들 즐비
수제 햄버거·피자 1세대들 모였던 곳
미군 양장점 인기… 혼수 이불도 구매
민웅기 경인일보 기자는 평택사람입니다. 평택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인 그의 어린 기억에, 지금은 매우 흔한 ‘버거킹 햄버거’는 아버지를 떠올리는 추억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전화국에 다니셨어요. 한번씩 미군부대에 전화 관련 업무를 위해 출입을 하시곤 했는데 그런 날엔 꼭 아버지가 버거킹 햄버거를 사서 포장해오셨어요. 그땐 한국에 버거킹이 공식적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때였기도 했고, 전국 미군기지 중에서도 버거킹이 입점한 데는 별로 없었거든요. 지금이야 햄버거가 흔하지만 그때 버거킹 햄버거는 다 못먹을 정도로 너무 크고, 맛있는데 미국음식이 그렇듯 너무 짜고, 그래도 신기해하면서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민 기자의 추억처럼 당시 송탄은 유일하게 한국에서 햄버거와 피자를 맛볼 수 있는, ‘세련된’ 동네였습니다. 한국에 버거킹, 피자헛 같은 미국 햄버거와 피자 프랜차이즈가 90년대 들어 하나 둘 공식적으로 매장을 내기 한참 전부터 수제 햄버거와 수제 피자가 성행했던 곳이기 때문이죠. 정창무 회장도 피자를 굽는 그 냄새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들은 기억에는, 대한민국에서 피자를 처음 구운 1세대들이 여기에 다 있었어요. 처음 이 곳에서 피자집을 시작하신 (지금은 작고한) 분께 들은 건 김포공항에 미군이 처음 들어왔을 때 피자 굽는 기술을 배우셨대요. 첫 피자집 사장님 직원으로 일하며 피자굽는 기술을 배우신 분들이 또 주변에 피자가게를 차렸구요. 미군기지 내부에 도미노피자가 있었지만 또 이렇게 수제 피자들이 맛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피자 프랜차이즈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주춤해졌죠.”
반대로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햄버거들은 지금도 ‘수제’의 맛을 잘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미스진버거’ ‘미스리버거’가 당시 평택 미군부대 햄버거의 원조격으로 지금도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죠. 양상추와 토마토에 얇은 고기패티를 넣는 요즘 햄버거들과 달리, 잘게 썰은 양배추에 두툼한 고기패티를 넣은 게 특징입니다.
먹을거리 뿐 아니라 패션도 앞서나갔습니다. 맞춤 양복을 제작하는 양장점이 큰 인기를 끌었거든요.
“미군들이 수제 의류를 정말 좋아했어요. 출장오거나 훈련왔을 때 여러벌을 맞춰가고, 가족 옷까지 맞춰가는 경우도 많았어요. 처음부터 양복 제작기술이 좋았다기보다, 이때 양장점을 창업한 1세대들이 영어를 말할수 있는 분들이 꽤 있었어요. 영어로 소통하면서 (필요에 맞게) 양복을 제작하고 기술이 늘면서 장사가 잘되니 직원들이 늘고, 그 직원들이 기술을 배워 양장점을 차려 운영해서 2세대까지 이어졌죠. 아직까지 2세대들은 옛날 그대로 운영을 하고 있어요.”
중앙시장에서 오랫동안 이불가게를 해온 정남주 동신이불 사장도 달러박스라고 불리던 그때 그 ‘호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장사한 지 57년 됐거든. 송탄이 쑥고개로 불릴 때, 아무것도 없을 때 맨손으로 와서 장사를 시작했어요. 환전소를 그때는 미군달러박스라고 불렀는데 이 지역이 (미군 통해) 외화획득이 잘 되다보니 상인들에게 면세를 해줬어요. 그만큼 모든 수입원이 미군들한테 나오던 시절이 있었지. 예전엔 미군들이 본국에 부치는 소포들이 엄청 많았어요. 가게들 문 앞마다 미국에 부칠 소포가 한가득 쌓여있을 정도로. 이불도 인기품목 중에 하나였어요. 미군들이 직접 사기도 하고, 여기서 미군하고 만나 국제결혼하는 사람들이 혼수로 사가기도 많이 했지. 우리는 그걸 ‘한식이불’이라고 불렀는데 예단으로 많이 해갔어. 처음엔 미싱 하나 놓고 하나하나 다 수작업으로 수를 놓았는데, 너무 장사가 잘 돼서 2층에 미싱 대여섯대 놓고 직접 원단 사다가 수놓고 이불을 만들어 팔았지.”
화려함의 끝판왕, 끝이 없는 청춘들의 시간
관광특구 지정 후 새벽 4시까지 운영
수원·천안서 찾아와… 주말은 북새통
나이키 등 패션브랜드 최초 입점도
한국사회 보수적 기조 볼 수 없던 곳
주말이면 서로 어깨를 부딪히고 걸어야 했어요
70~90년대 평택국제중앙시장은 밤새도록 놀고 싶은 청춘들의 탈출구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관광특구’의 효과를 톡톡히 누렸는데요. 관광특구라고 해서 별것은 없습니다. 특별히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거나 정부가 정책지원금을 더 주는 것도 아니었죠. 하지만 노는 것에 엄격했던 그때 그시절을 감안하면, 이 곳은 유일하게 ‘시간’을 구애받지 않고 놀수 있다는, 엄청난 혜택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예전엔 통금이란 것도 있었고 또 90년대까지도 유흥업소는 밤 12시까지만 영업을 하도록 했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관광특구로 지정이 되면서 새벽4시까지 영업이 가능했거든요. 위로는 수원권역에서, 아래로는 천안권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놀기 위해 이 곳에 왔어요. 자기들 동네에서 먹다가도 시간이 끝날 쯤 여기로 넘어와서 술을 먹고 놀았죠. 지금은 시장 초입에 삼보데파트 건물이 사실은 예전에 ‘삼보극장’이에요. 젊은 사람들이 워낙 많이 오니까 장사가 잘 됐죠. 그때는 주말이면 서로 어깨를 부딪히고 걸어야 할만큼 사람이 몰렸어요.”
인근 지역의 젊은이들이 몰려든 건 비단 시간의 자유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곳은 한때 가장 인기가 많은, 외국의 패션브랜드들이 공식 진출을 하기 전에 매장들이 줄지어 있던 곳이기도 했죠.
“국내에 나이키가 본격 진출하기 전에 먼저 나이키 매장이 문을 연 곳이 이 곳입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나이키 매장일거에요. 시장 한 라인이 전부 나이키, 아디다스 같은 의류 브랜드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어요. 여기는 당시에 보수적인 사회분위기로 통용 안 되는, 이를테면 탱크탑 같이 노출이 좀 있거나 아방가르드한 의류들도 먹힐 만큼 자유스러웠어요.”
유행에 민감하고 새로운 볼거리에 도전하고 싶은 청춘에게 평택국제중앙시장은 당시 주변에선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놀기 좋은 놀이터였던 셈입니다.
현재와 뒤떨어진 환경, 그럼에도 소중하다
2000년대 다양한 국가 문화 접목돼
주차·간판 등 고쳐야할 부분도 존재
이국적 분위기, 세대를 잇는 ‘레트로’
지금도 여전히 500여개의 점포가 평택국제중앙시장에서 운영 중입니다. 규모도 변하지 않았고, 상당수 점포들도 수십년째 그 명맥을 이어가며 다양성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미스진과 미스리 버거가 이어온 송탄 햄버거의 맛은 송스버거 같이 청년 창업자들이 요즘의 맛을 잘 섞어 송탄을 오게 만들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부터는 동남아, 유럽 등 현지인들이 직접 시장 안에 자국 음식을 선보이는 가게를 창업하며 여전히 평택국제중앙시장만의 ‘다양성’을 확장해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야성 같던 인기는 예전만큼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정창무 회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상권, 그래서 ‘레트로’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관심이 가끔 속상하다고 했습니다.
“창업1세대들이 은퇴를 하고 젊은 사람들이 요즘은 새롭게 창업도 많이 하는 분위기이지만, 1세대들이 했던 그 환경 그대로라는 게, 속상해요. 우리끼리 뭔가 우리 시장만의 특색을 좀 더 만들어보려고 벽화사업도 해보고 하지만 보도블럭, 간판 하나 모두 옛날 거 그대로이니 변하지 않는 상권에 누가 오겠어요. 가끔 시장 찾는 옛날 분들이 ‘레트로’해서 좋다고 하는데 차 하나 대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오기 불편한 시장에 오지 않습니다. 우리 상인들이 젊은 세대의 소비지향을 읽으려고 노력해도 투자가 없으니 쉽지 않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시장의 특징은 내국인 상권과 외국인 상권이 조화를 이루며 다양한 재미를 주는 건데 기본적인 환경이 좀 갖춰지면 좋겠습니다.”
정말 시장을 한바퀴 돌아보니, 이 곳은 이국적인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독특한 시장이었습니다. 강산이 7번을 변해도 그 색깔이 죽지 않고 여전히 진한 바탕으로 남아있는 것이 소중하다고 느낄만큼. 옛 손님들에겐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레트로한 정취를, 새로운 손님들에겐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시장으로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