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 북한강의 첫 전력시설 가평 청평댐


수상관광 레저 핵심지에 담긴 아픈 역사
일본 전범기업 주도했던 프로젝트 일환
1945년 해방 이후 전기생산 주요 인프라
연인원 300만명 동원 공식 사망자만 4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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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가 그렇듯 전력시설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다. 편리함과 환경오염 같은 현대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 땅 위에 처음 철도가 놓였던 일, 처음 전기를 생산했던 일을 말한다.

전범기업 하자마구미(間組)가 만든 고양 쌍굴. 서울로 운반할 석탄을 옮길 요량으로 만든 이 터널을 공사하며 지역민 500여명이 숨졌다. 지금도 고양 쌍굴 근처 화전동 공동묘지에서 이들을 기리는 위령비를 찾아볼 수 있다. 차량기지인 경성조차장에서 출발한 열차는 쌍굴을 통해 경성으로 이동했고 경의선을 따라 물자를 옮겼다.

경성~개성~평양~신의주로 이어진 경의선은 한반도 주요 도시의 근대화를 이끈 열차였다. 이처럼 철도는 근대화에 공헌한 중요한 인프라지만 건설의 목표는 '수탈'이었고 건설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숨져갔다. 전력시설도 마찬가지였다.

하자마구미는 압록강에 수풍발전소를 만들었고, 또 다른 전범기업 카지마구미(鹿島組)는 가평에 청평댐을 지었다.

청평댐이 건설되기 전 북한강은 춘천과 인천까지 수상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고 한다.

유려한 풍광을 자랑하던 북한강 뱃길에 댐이 들어서게 된 건 전쟁의 영향 때문이었다. 중일전쟁(1937~1945) 초기 인천 군수공장에 댈 전력이 급해진 데다 경인 지역 공업화·도시화로 일제는 수도권에 인접해 있고 산세가 가파른 북한강에 댐을 짓기로 했다.

일본인들이 주축이 된 한강수력전기 주식회사가 설립됐고, 공사는 카지마구미가 맡았다. 1939년 8월 착공해 1943년 10월 준공(1·2호기)된 청평댐은 1945년 해방과 함께 한국의 주요 인프라가 된다.

전기생산시설인 수력발전댐 대부분이 수력자원이 풍부한 북한의 압록강, 두만강, 장진강 등에 설치된 탓에 한국에선 청평댐과 화천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48년 북한의 단전 조치로 전력 수급이 어려워진 게 대표적인 예시였다. 여기에 청평댐은 한국전쟁에서 주요 타깃이 되는 바람에 시설에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1951년 복구 공사를 시작하고 1967년 3호기를 설치, 2011년 4호기 준공까지 거쳐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청평댐의 모습이 비로소 갖춰졌다.

경기도를 대표하는 수상관광 레저의 핵심이자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찾는 대성리의 물줄기, 정치인과 부호들의 별장이 가득한 수변 휴식공간인 청평댐에는 이런 역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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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댐 준공과 함께 만들어진 초소. 댐 관리용으로 짐작되며 일반인 접근이 어려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23일 청평댐을 찾았다. 북한강의 첫 전력시설인 청평댐은 길이 470m, 높이 31m로 웅장하다. 물리적으로 물을 가둬두는 중력댐의 위용이 대단했다. 청평수력발전소는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중요시설로 분류돼 있다. 발전소 정문 쪽으로 향하는 길에 철조망 사이 비죽 솟은 흰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청평댐 준공과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초소의 모습이다.

초소는 모두 2개가 있는데 모두 콘크리트에 작은 창문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초소는 청평댐 관리를 위해 댐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인 접근이 어려운 곳에 위치한 덕분에 물리적인 훼손 없이 보존된 상태다. 초소에 바로 인접해 '공난자공양비'가 있다. 공난자공양비는 청평댐이 완공되기까지 지역민의 애환과 노고를 설명해준다.

공난자공양비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강수력전기 주식회사는 청평발전소 공사를 소화 14년(1939년) 9월 착수해서 4년 동안 진행했다. 동원된 인원은 연 300만 명이다. 그들의 공로로 준공이 이루어졌고 여기에 증거를 남긴다. 공사 과정에서 홍수 방지나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노동은 매우 힘들었으며 그때 조난당한 사람은 실제 기록에 의하면 43명이다. 준공하면서 이곳에 희생자들의 명단을 표시한다.'

명단에는 김락구, 최용일, 김향권, 전판세, 고기연, 정태복, 정경장, 이와모토 윤형, 심상선, 최문재, 한석재, 김상복, 이재봉, 최기수, 이완운, 마쓰다 이마오, 원춘상, 박노석, 히라카와 세이조, 김남식, 기순경, 양석조, 이재선, 피삼산, 윤억병, 박상규, 오카다 세이이치, 구종식, 최사봉, 박봉년, 김봉율, 권영원, 김본수만, 김상규, 노만삼, 임순산, 이연일, 장규열, 금한근, 기무라 종철, 이태준, 동원길모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연 300만명 노동력 속에는 일제가 1938년 국가총동원령을 공포하고 소집한 '근로보국대'가 포함돼 있다. 학생이나 여성 등도 근로보국대에 소속됐고 이들은 공사에 쓰이는 모래와 자갈을 물로 씻는 노동에 투입됐다고 전해진다. 제대로 된 콘크리트 건축물을 짓기 위해선 모래, 자갈이 깨끗해야만 하는데 이 작업에 근로보국대가 동원된 것이다.

청평댐
청평댐 모습. 댐 아래 작은 7개 교각이 보인다. /가평군 제공

청평댐 건설 과정을 짐작할 수 있는 건축물이 바로 청평댐 바로 앞에 남아 있다. 댐 앞에 남아 있는 7개의 청평댐 교각이다. 지금은 다리 상판이 사라진 채 교각만 남아 있지만 건설 시 이 다리를 통해 자재를 댐까지 운반했다고 한다. 'ㅂ'자를 거꾸로 세운 형상을 한 교각은 누군가 저게 무슨 시설인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어떤 용도의 건축물인지 알기 어려워 보였다.

근로보국대가 씻은 모래와 자갈도 다리를 통해 현장에 투입되었을 것이다.

해방 전 만들어진 청평댐은 해방 이후 그리고 전쟁 직후 한국 전력에 큰 역할을 했다. 일제시대 근대화의 '빛'이다. 북한강 최초의 수력발전시설은 조선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연인원 300만명이 동원됐고 한국수력전기(주)가 공식 확인한 사망자만 43명이다.

80년을 건재한 청평댐 주변은 음식점, 카페, 숙박시설 등 위락시설로 흥성거린다. 여기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오래 전 조선인이 강물에 모래와 자갈을 씻던 모습이 보이고 수많은 죽음 위에 건설한 근대 인프라를 확인할 수 있다. 거대한 청평댐 아래 작은 7개 교각들은 마치 청평댐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리고 빛보다는 그림자에 눈길이 더 머물렀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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