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내셔널 브레일 프레스'

1927년 시각장애인이 설립

지난달 9일 미국 보스턴에 있는 '국립 점자 출판사'(National Braille Press)에서 브라이언 A. 맥도널드(Brian A. Mac Donald) 대표가 점자 아연판 인쇄기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2024.10.9 미국 보스턴/정선아기자 sun@kyeongin.com
지난달 9일 미국 보스턴에 있는 '국립 점자 출판사'(National Braille Press)에서 브라이언 A. 맥도널드(Brian A. Mac Donald) 대표가 점자 아연판 인쇄기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2024.10.9 미국 보스턴/정선아기자 sun@kyeongin.com

북미 전역이 사용하는 스타벅스 점자 메뉴판부터 유명 소설인 '해리포터'의 점자판까지…. 미국 시각장애인들이 글을 읽고, 정보를 얻고, 일상을 지낼 권리를 지켜주는 출판사가 있다. 미국 보스턴에 있는 '국립 점자 출판사'(National Braille Press, 이하 NBP)다.

지난달 9일 오후(현지시간) NBP 건물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벽면을 가득 채운 점자 책들이었다. 이곳 대표인 브라이언 A. 맥도널드(Brian A. Mac Donald)의 사무실 책상, 심지어 바닥에도 점자 책과 원고들이 쌓여 있었다.

NBP는 미국 시각장애인들이 읽는 각종 간행물을 발간하는 것은 물론, 점자가 표기된 교구를 개발하는 등 점자 교육을 지원하는 일에도 힘쓴다고 했다.

 

국립 점자 출판사’(National Braille Press)에서 브라이언 A. 맥도널드(Brian A. Mac Donald) 대표
지난달 9일 미국 보스턴에 있는 ‘국립 점자 출판사’(National Braille Press)에서 브라이언 A. 맥도널드(Brian A. Mac Donald) 대표가 점자 인쇄기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2024.10.9 미국 보스턴/김희연기자 khy@kyeongin.com

NBP 설립자는 이탈리아계 시각장애인 프랜시스 레라르디(Francis Ierardi)다. 그는 1901년 보스턴 소재 '퍼킨스 시각장애인 학교'(Perkins School for the Blind)에 입학하면서 가족과 함께 미국에 정착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 프랜시스는 시각장애인들이 라디오의 음성, 혹은 다른 사람들이 전해주는 말을 듣지 않고서는 아무 소식도 접할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전쟁 소식을 점자로 번역해 시각장애인들에게 배포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국립 점자 출판사’(National Braille Press)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점자 책 분류와 원고 정리 등 일을 하고 있는 모습.
미국 보스턴 ‘국립 점자 출판사’(National Braille Press)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점자 책 분류와 원고 정리 등 일을 하고 있는 모습. 2024.10.9 미국 보스턴/김희연기자 khy@kyeongin.com

프랜시스는 이를 계기로 점자 신문 제작을 위한 펀드 모금과 점역 기반(인쇄기 등) 마련 등 9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1927년 초 NBP를 공식 설립했다. 그해 3월 '더 위클리 뉴스'(The Weekly News)를 창간했는데, 북미·유럽에선 최초로 만들어진 점자 신문이라고 한다.

구독 쇄도 석달만에 '전국신문'
동화책 등 각종 콘텐츠도 펴내
북미 '스타벅스 메뉴판' 개발
소설 등 유명시리즈 동시 발간


처음에는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주(州)에만 배포할 계획이었는데, 다른 주에서도 이 신문을 구독하겠다는 요청이 쏟아져 발간 3개월 만에 전국지가 됐다. 당시 시각장애인들이 얼마나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북미와 프랑스 등에서 쓰이는 스타벅스 점자 메뉴판. 2024.10.9 미국 보스턴/정선아기자 sun@kyeongin.com
북미와 프랑스 등에서 쓰이는 스타벅스 점자 메뉴판. 2024.10.9 미국 보스턴/정선아기자 sun@kyeongin.com

오늘날 NBP는 주간신문에 그치지 않고 각종 점자 콘텐츠를 만들어 내고 있다. 동화책부터 소설까지 거의 모든 도서의 점자판을 계속 출간하는 것은 물론, 시각장애 학생들이 학습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교과서나 대학 전공 서적이 개정될 때마다 곧바로 점자판으로 펴내고 있을 정도다.

북미와 프랑스의 스타벅스 매장이 보유한 점자 메뉴판도 NBP가 개발했다. 이외에 항공기 안전 수칙, 코로나19 시기 배달이 가능한 식당, 컴퓨터 작동법 등 각종 정보를 담은 설명서도 점자판으로 만들고 있다.

NBP의 활동 중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시각장애인도 일반 독자와 같은 날 유명 시리즈의 '최초 공개'를 즐기도록 해당 작품의 작가, 기업 등과 협력해 점자판을 '미리' 제작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끈 해리포터는 시리즈별로 공개되는 시기가 달랐는데, NBP는 신작 공개 당일 해리포터 점자판 400권(초판)을 동시 발간했다. 시각장애인에게도 유명 신작을 비장애인 독자와 같은 날 읽을 권리를 지켜준 것이다. 이후 수요에 따라 추가 발행도 하고 있다.
 

"보통의 일상 함께 누리려 노력"

 

미국 보스턴에 있는 '국립 점자 출판사'(National Braille Press)가 해리포터 신작 공개 당일 동시 발간한 해리포터 점자판. 2024.10.9 미국 보스턴/정선아기자 sun@kyeongin.com
미국 보스턴에 있는 '국립 점자 출판사'(National Braille Press)가 해리포터 신작 공개 당일 동시 발간한 해리포터 점자판. 2024.10.9 미국 보스턴/정선아기자 sun@kyeongin.com

미국 보스턴에 있는 ‘국립 점자 출판사’(National Braille Press) 입구. 2024.10.9/ 김희연기자 khy@kyeongin.com
미국 보스턴에 있는 ‘국립 점자 출판사’(National Braille Press) 입구. 2024.10.9 미국 보스턴/김희연기자 khy@kyeongin.com

 

"보통 새 책이 나오면 시각장애인은 점자 번역이 이뤄진 뒤에야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간의 점자판 작업은 저자, 해당 출판사의 허가를 받아 원고를 확보하고 점역 작업을 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여야만 시각장애인도 일명 '스포'(Spoiler, 작품의 줄거리나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것)를 당하지 않고 작품을 즐길 수 있습니다."

브라이언은 "(음성 번역 등) 기술이 발전해도 점자는 여전히 유의미하다"며 "시각장애인도 보통의 일상을 누리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관련기사 (누군가 해야 할 일… 귀로만 공부 어려워 점자 콘텐츠 절실)

 

미국 보스턴/김희연기자 khy@kyeongin.com

※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