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영웅들이 지킨 대한민국, 분단 아픔을 증언하다

 

현재 경기도 내부 존재 ‘상징적 유적’

연천 초성리 ‘부서진 비석’ 모습 보존

인근 6·25전쟁 기념비 모여 공원형성

1977년 주한미군 철수 반대하다 전역한

싱글러브 장군 공적비도 설치돼 눈길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 38도선 표석. 2024.11.18 /이영선기자 zero@kyeongin.com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 38도선 표석. 2024.11.18 /이영선기자 zero@kyeongin.com

전쟁 그리고 분단.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두 가지 키워드를 설명하는 상징적인 유적이 경기도에 있다. 경기 북부 접경지역을 가로지르는 38도선이다. 지도 위 북위를 기준으로 남북을 가른 38도선은 북방 경계가 상승하며 경기도 안에 들어왔다.

38도선은 장벽이 없는 국경선이다.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철조망은 없지만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라졌다. 현재는 38도선 주변에 경기도민이 산다. 도로가 놓이고 휴게소도 들어섰다. 총을 든 경계병은 없지만 한때 이곳이 북방경계선이자 남방한계선이었다는 점을 알려주는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38도선 표석이다.

6·25 참전 기념탑과 참전 용사상.
6·25 참전 기념탑과 참전 용사상.

■ 남북 분단의 시작

“해방 이후 북위 38도선에 한반도 최초의 분단선이 그어졌다.”

내년이면 남북이 분단된 지 80년이 된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35년의 길고 어두웠던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면서 한반도에는 그토록 바랐던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일본이 항복한 후 북위 38도를 경계로 일직선을 그어 북쪽은 소련, 남쪽은 미국이 점령했다. 38도선이 그어진 배경에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 갈등이 있었다.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음을 염려해 미국에서 38도선을 그어 소련군의 점령 지역을 북쪽으로 한정 지었다.

이후 1945년 12월 미국과 영국, 소련이 모인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힘없던 조선 내부에선 신탁통치 찬반 논쟁이 벌어졌지만 결국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반도는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됐다.

6·25전쟁으로 부서진 38도선 표석이 분단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부서진채 보존되고 있다.
6·25전쟁으로 부서진 38도선 표석이 분단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부서진채 보존되고 있다.

■ 부서진 38도선 표석

접경지역의 38도선의 의미는 크다. 같은 동네가 38도선에 따라 두 곳으로 갈라지기도 하고, 옆 동네와 분단이 되기도 했다. 6·25 전쟁 이후 군사분계선이 새롭게 정해졌지만, 최초의 분단선이라는 38도선의 상징성이 있다.

접경지역인 경기북부 곳곳에도 38도선을 나타내는 표석들이 곳곳에 위치해 있다. 서울에서 연천으로 이어진 평화로를 따라가다 보면 선사시대 유적지인 연천을 나타내는 조형물이 있다. 매머드를 비롯해 각종 선사시대 동물과 이들을 사냥하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모형으로 만들어진 구조물 옆에는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 38도선 표석이 있다.

‘38도선’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표석이 있고, 부서진 비석도 놓여 있다. 선사시대 구조물이 부각돼 표석은 상대적으로 묻히는 느낌이다.

부서진 비석을 보면 더 쓰라리다. 부서진 비석은 6·25 전쟁 이전에 세워진 38도선 표석으로 전쟁으로 인해 파괴됐다. 두 동강 난 듯 윗부분은 유실된 채 바닥 부분만 울퉁불퉁하게 남았다.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부서진 상태지만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지난 1991년 새로 건립된 38도선 표석에는 아래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여기는 겨레의 한이 맺힌 남북 분단의 현장 38도선입니다. 이 경계비는 1971년 5월 자연석으로 건립 이후 지역 주민의 표석이 돼오다 일부 여론에 의해 1984년에 철거되었으나 남북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많은 실향민들의 통일을 위한 염원과 우리의 아팠던 과거를 후손들에게 일깨워주고 길이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UN 가입을 기념하고자 이 비를 여기에 다시 건립합니다.’

38도선 표석을 보면서 힘없던 한반도의 아팠던 과거, 남북 분단의 아픔을 느끼는 순간이다.

38도선 돌파 기념비.
38도선 돌파 기념비.

■ 호국 영웅들이 지킨 38도선

초성리 38도선 표석 인근엔 호국 영웅을 기리는 비석들이 모여 하나의 공원을 이루고 있다. 강대국들에 의해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분단되고 5년의 신탁통치 기간이 끝나갈 무렵,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다.

분단의 기준이 됐었던 38도선에서 남한과 북한은 치열한 전투를 펼친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38도선 인근에서 교착된 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토를 얻기 위해 고지전을 펼치기도 했다. 분단과 전쟁의 아픔이 38도선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38도선 돌파 기념비는 연합군의 38도선 돌파를 기념해 건립됐다. 미국 제70전차대대 제191분견대, 그리스 원정군, 태국군 제21보병연대 1대대로 구성된 공격 임무 부대가 지난 1951년 5월 28일 세번째 돌파 작전에 성공한 것을 기념한다. 태국군의 활약이 돋보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승전보를 기념하는 비석과 호국 영웅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도 있다.

“내가 별을 몇 개 더 다는 것보다는 수백만 한국인의 생명이 더 소중하다.”(싱글러브 미 예비역 소장)

미국 육군 예비역 소장인 싱글러브 장군은 지난 1977년 미국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지시에 반대하고 강제 전역당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싱글러브 장군의 자유 민주주의 수호 정신을 기리는 시민들이 건립했다. 또한 북파공작 특수임무를 수행한 HID 윤태혁 소령의 공적비도 설치돼있다.

미 육군 싱글러브 장군 공적탑(왼쪽)과 HID 윤태혁 소령공적비.
미 육군 싱글러브 장군 공적탑(왼쪽)과 HID 윤태혁 소령공적비.

돌파 기념비와 공적비 너머엔 6·25 참전 기념탑과 참전 용사상도 용맹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인해 60만명의 국군 피해, UN연합국 200만명 참전, 15만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호국 영웅들이 38도선과 대한민국을 지켰다. 연천에서도 665명의 군민이 참전해 고향을 지켰다.

광복 후 평화를 위한 염원은 강대국들에 의해 분단으로 이어졌다. 이후 전쟁이 발발하면서 남북 분단이 80년에 접어들고 있다.

독립 후 힘없던 한반도의 슬픔, 6·25 전쟁의 상흔이 38도선 표석에 스며들어있다. 호국 영웅들이 목숨 걸고 지켰던 38도선, 그 아픔과 한을 기억한다.

/이영선기자 zero@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