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튜드 적용한 프랑스· 일본·인천 사례
파리 요양시설 ‘시테 베르테’
치매 107명 입주 ‘평범한 일상’
‘인간의 권리 존중’ 이색적 행사
인간 중심 돌봄 기법 휴머니튜드(Humanitude·인간과 태도의 합성어)를 적용하는 요양시설에서 치매 환자들은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법이 아닌, 자율을 실현하기 위해 타인과 ‘연결’되는 방법을 배운다.
이들 요양시설은 ‘치매 환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다소 낯설지만 명확한 원칙 아래 운영된다. 통제와 허락 없이 환자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돌봄 인력은 치매 환자의 선택을 돕는 보조자 역할을 수행한다.
■ 프랑스, 수평적으로 연결된 관계

지난달 30일 방문한 프랑스 파리 근교 쉬시앙브리에 있는 요양시설 ‘시테 베르테’(Residence de la Cite Verte). 이곳에서 생활하는 치매 환자 107명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닌, 독립된 공간에서 시설을 이용하는 거주자다.
2022년 시테 베르테에 입주한 마르셀 카르다로폴리(Marcelle Cardaropoli·90)의 방은 16㎡ 남짓한 공간에 화장실, 침실, 발코니로 구성됐다. 침대부터 협탁·의자·전등·시계·서랍장·액자·접시까지 집에 있던 물건을 가져와 똑같은 자리에 배치했다. 그는 아침 식사를 하고, 이웃과 담소를 즐기고, TV를 보면서 밤늦게 잠이 든다. “정원의 푸르름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며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더니 발코니에 식물로 채운 야외 공간을 소개했다.
이날 시테 베르테에서는 ‘시내 나들이’가 있었고, ‘노래 교실’이 열렸다. 알파벳을 조합해 단어를 만들어 내는 스크래블 등 보드게임도 인기였다. 입소자들은 주일에는 미사에 참여하고 정기적으로 합창·요리를 배운다. ‘우리 삶을 변화시킨 발명품’을 주제로 한 콘퍼런스도 이달 열린 행사 중 하나였다.

시테 베르테는 치매 환자가 성별 구분이 사라진 것처럼 대하지 않는다. 요양시설이 금기시하는 노인의 성적 욕구를 도외시하지 않는다. 부부·연인의 경우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한다. 이와 관련 요양시설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이색적인 행사도 가끔 개최한다. 신체 일부를 드러낸 무희들이 등장하는 스트립쇼가 대표적이다. 치매 환자들은 아슬아슬한 옷차림으로 바이올린을 켜거나 춤추는 연주자·무희들의 공연을 관람한다. 인간의 모든 권리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행사다.
가운 벗은 의사… ‘수평적 돌봄’
울타리 밖 이웃에 시설 개방도
“고립되지 않고 사회와 상호작용”
시테 베르테는 치매 환자가 언제든 돌봄 제공자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수평적이고 연결된 관계를 형성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환자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의사는 흰색 가운을 입지 않는 게 원칙이다.
다른 돌봄 인력도 환자와 구분되는 옷을 착용하지 않도록 한다. 환자와 의료진이라는 수직적 위계 관계 속에 형성되는 단절감을 줄이기 위해서다. 의료진은 식사 중인 환자들과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누면서 ‘안색은 좋은지’ ‘음식을 잘 삼키는지’ ‘다른 환자들과 소통에 어려움은 없는지’ 세심하게 살펴본다. 환자들은 언제든지 주변에 있는 의료진에게 요구 사항을 말할 수 있다.

시설 울타리 너머 이웃과 관계를 잇는 방법도 고민했다. 60대 이상 노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곳에 탁아소, 유아 놀이터를 배치했다. 이들 시설은 쉬시앙브리 주민이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개방된다. 식당·미용실·피부관리실·교습실·세탁소·기도실·체력단련실 등도 마찬가지다.
시테 베르테 현장 운영 책임자 마갈리 도스 산토스(Magali Dos Santos·43)는 “거주자들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각자 원하는 삶을 살도록 개방적이고 수평적 관계를 제공한다”며 “유아와 부모, 청년 등 다양한 주민이 시설을 이용하도록 한 것도 특정 세대가 사회에서 고립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할 수 있게 지원하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치매 어르신, 질환자 아닌 ‘사람’… 약 대신 ‘서는 법’ 처방했다
휴머니튜드 적용한 프랑스·일본·인천 사례
도쿄 ‘코호엔 니시오이’ 요양시설
환자-요양보호사 대화 목적 ‘존중’
카드놀이·음악감상도 스스로 결정
서구 제1시립노인치매요양병원은
매일 아침 ‘서기’부터 다시 가르쳐
독립 존재로 의지 실현 ‘첫째 목표’
■ 일본, 소통으로 얻는 자유

일본 도쿄 시나가와구 요양시설 ‘코호엔 니시오이’(Kohoen Nishi-Oi)는 기상·식사 시간을 정하지 않는다. 환자 증세에 따라 달리 판단하지만, 기본적으로 입소자가 원하지 않으면 세면·목욕을 강요하지 않고, 답답해 하면 산책을 다녀올 수 있게 한다. 경인일보가 지난달 찾은 코호엔 니시오이는 통제가 아닌 환자의 자율성을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치매 환자와 요양보호사 간 대화는 환자를 존중하기 위한 목적이자 수단이었다. 시설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병원 외래 진료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돌봄 제공자는 “동행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라고 묻는다. 최대한 환자의 자율성을 지원하는 게 코호엔 니시오이 수칙이다.
이곳에서 ‘어떤 행사를 열면 좋겠는지’ ‘건강검진을 위해 저녁 시간대 거주 공간을 방문해도 되는지’ ‘목욕은 무슨 요일에 했으면 좋겠는지’ ‘식사는 정해진 식단이 좋은지 아니면 가족이 사다 준 간편 조리식이 먹고 싶은지’ 등 모든 돌봄 서비스는 환자 의향과 기호로 결정한다.

80대 치매환자 이시카와 묘세(Ishikawa Myose)는 2주간 자신을 간호했던 도쿄의과대학 실습생이 보낸 편지를 꺼내 보이면서 “함께 트럼프 카드를 하고 만돌린을 연주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 피아노를 치거나 음악을 듣는 것까지 (간병인과) 얘기해서 결정한다”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침대 머리맡에 둔 남성의 사진이 남편이냐는 질문에 “그랬던가”라며 잠시 머뭇거렸지만, 다른 이들과 어울려 대화를 나누고 소통할 때는 정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코호엔 니시오이는 치매 환자를 ‘질환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했다. ‘소통하기’를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내걸면서 돌봄을 받는 환자의 기분을 고민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다.
코호엔 니시오이 시설장 타나카 토모에(Tanaka Tomoe·78)가 돌봤던 환자의 경우 식사를 거부했는데, 구강 상태가 좋지 않아 간병인이 임의로 음식을 잘게 으깨서 줬던 게 주된 이유였다고 한다. 소통 없는 일방적 배려에 상대는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예전에는 돌봄 중 다른 환자가 급한 요청을 하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라고 ‘통보’하는 방식이었지만, 지금은 ‘여기 환자를 먼저 도와주고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라고 상황을 ‘설명’하게 됐다”며 “환자가 소리를 지르거나 폭력적으로 불만을 나타내는 성향이 줄었고, 직원들 업무 만족도는 크게 높아졌다”고 말했다.
■ 한국(인천), 독립된 존재로 걷기

“오늘은 복도 끝까지 걸어가 볼까요?”
인천 서구에 있는 제1시립노인치매요양병원에 입소한 치매 환자들은 매일 아침 병동 복도에서 ‘서는 법’을 배운다. 의료진이 환자 양쪽 겨드랑이를 잡고 지탱하자 휠체어에 앉아 있던 환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환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복도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지만, 이내 자신감을 얻은 듯 좀 더 빠른 속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환자는 벽에 설치된 난간을 짚으며 걷는 데 집중했다. 환자가 앞으로 더 나아가기를 주저하자 간호사 2명이 다가와 팔꿈치와 손을 감싸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환자는 자신이 머무는 병상에서 열 걸음 떨어진 화장실까지 걷는 것을 목표로 하다가 병실 문밖으로, 병동 복도로 매주 목적지를 달리하며 걸음 수를 늘려간다고 했다.
스스로 서고 걷게 하면서 환자 신체 기능을 유지·회복하는 것이 병원의 첫째 목표다. 휴머니튜드는 걷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스스로 인간임을 증명하는 행위로 규정한다. 독립된 존재로서 의지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시립노인치매요양병원에서 2년째 치료를 받는 김시영(90)씨는 “여기서는 매일 걷도록 유도한다”며 “(스스로 움직일 수 있어서) 언제든 화장실을 갈 수 있고 쉬고 싶을 땐 의자에 앉아 잡지를 읽는다”고 했다.
김진옥(65) 시립노인치매요양병원 간호원장은 “환자를 눕혀 두지 않고 최대한 걷고 움직이도록 다양한 활동을 마련하고자 했다”며 “신체 기능이 향상되면서 환자들이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의료진에게 반응을 보이고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