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하지 말고, ‘지금의 나’를 받아들여 주세요”
인천 40년 공직… 초로기 치매 판정
치매학교 다니며 카페 돕고 강연도
“남기고 싶은건 볼펜으로 눌러 쓰죠”
치매 판정을 받으면 가족·친구·동료 등 지인들과 연결고리가 사라져 멀어진다. 치매 환자·가족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다. 이들은 일상 속에서 치매 환자의 인간다움, ‘휴머니튜드’(Humanitude·인간과 태도의 합성어)를 지키는 방법은 ‘피하지 않고 잘 들어주기’에 있다고 했다.
“지금의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 주면 좋겠어요. 안쓰러워하거나 어려워하지도 말고…. 기억을 잃는다고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지난 14일 인천시광역치매센터 두뇌톡톡 뇌건강학교에서 인천시 ‘치매극복 희망대사’로 활동 중인 이기범(65)씨를 만났다. 고교 졸업 후 남구(현 미추홀구) 용현3동사무소 주사보로 시작해 40년을 일한 공직자 출신이다. 퇴직을 앞두고 깜빡깜빡하는 증상이 나타났다. “당신 왜 자꾸 내 말을 까먹느냐”며 참다못한 아내 손에 이끌려 간 병원에서 초로기(初老期) 치매 판정을 받았다. “이제 여행이나 다녀볼까”하며 퇴직 이후를 준비하던 중 ‘꿈에서도 생각지 못한’ 결과였다.
인천시광역치매센터 두뇌톡톡 뇌건강학교에 다니면서 카페에서 일했다. 남 앞에 나서는 걸 꺼리는 성격이지만 “다른 분들에게 용기를 심어 달라”는 센터 측 요청에 등 떠밀리다시피 해 연단에 오르기 시작했다. 치매극복 희망대사 직함을 얻으면서 ‘민원 창구 밖’ 세상에서 더 많은 이를 만나게 됐다.
그는 기억을 잃고 행복의 역치가 낮아져 이전보다 더 자주 일상 속 만족과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망각의 병’ 치매에 막연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요즘에는 혼자 여행 떠나는 상상을 해요. 이 계획이 오늘 제 머릿속에서 사라져 내일은 다시 기억하지 못할 막연한 꿈으로 남을 때도 있겠죠.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리는 게 지금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치매 환자·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전에는 언제든 가능했던 일이 현재는 능력이 되지 못해 못하기도 하고, 가족의 걱정으로 포기할 때도 생긴다”면서도 “그래도 스스로의 즐거움을 찾으면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치매극복 희망대사 이씨의 일상을 들어 보면 치매 판정이 꼭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지지 않고, 기억을 잃는 병을 앓아도 행복을 꿈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은 다 잊히는 법인데 저 같은 경우는 조금 더 빨라진 것뿐. 꼭 남겨두고 싶은 건 안 지워지게 볼펜으로 꾹꾹 눌러쓰면 되죠.”
※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