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그룹사운드 키보이스를 비롯해 히파이브, 히식스 등을 이끈 전설의 기타리스트 김홍탁(사진)이 지난 7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0세.

고인은 1944년 인천 내동에서 태어나 창영초, 동산중·고등학교 등을 나왔다. 중학교 시절부터 기타를 잡았으며,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동기·선배들과 캑터스(Cactus)라는 밴드를 구성해 인천 미군 부대 등지에서 공연하며 실력을 쌓았다.

고인은 1963년 결성된 한국 최초 그룹사운드 키보이스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이후 5인조 히파이브, 6인조 히식스 등 밴드를 이끌며 한국의 밴드 음악 태동기의 중심에 섰다.

1995년 우리나라 최초의 실용음악 고등교육기관 ‘서울재즈아카데미’(현 SJA실용전문학교)를 설립한 고인은 2009년까지 원장으로 있으면서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수많은 유명 뮤지션이 이곳 출신이다.

경인일보가 보도한 ‘아임 프롬 인천’(2023년 12월21일자 1·11면 보도)이 고인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로 남았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건국 이래 한국을 빛낸 사람 가운데 음악가가 많았다”면서 “클래식 연주자들(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이 나라를 빛냈다면 이제는 ‘팝 뮤지션’이 그 역할을 할 차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임 프롬 인천]

[아임 프롬 인천] "팝뮤지션이 나라 빛낼것"… '키보이스' 김홍탁의 예견

붙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키보이스뿐 아니라 5인조 히파이브(He5), 6인조 히식스(He6) 등 이후 김홍탁이 몸담은 밴드는 매번 엄청난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한국 밴드 음악의 태동기는 김홍탁이 이끌었다 해도 절대 과한 표현이 아니다.김홍탁은 자신을 '밴드 뮤지션'이라고 말한다. 그저 "밴드가 좋아서 일생 동안 밴드 음악을 계속해 온 밴드 뮤지션"으로 소개한다.그는 중학교 2학년 시절 기타를 처음 선물로 받았고 그 시기 신포동에서 만난 미군 병사에게 기타를 배울 수 있었다. 고교 시절부터 밴드를 조직해 미군이 출입하는 클럽에서 연주하며 일찌감치 '스타 연주인'의 길을 걸었다.그는 "이런 경험이 자신에게 더 없는 행운이었는데, 인천이기에 가질 수 있었던 행운"이라며 "어찌보면 K팝의 시발점은 인천"이라고 말했다. 또 "건국 이래 한국을 빛낸 사람 가운데 음악가가 많았다"면서 "클래식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 등이 나라를 빛냈다면 이제는 '팝 뮤지션'이 그 역할을 할 차례라고 생각한다. 그걸 믿는다"고 덧붙였다.김홍탁은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K팝의 나라가 되려면 한 장르만 주목을 받아선 안 된다. 다양성을 갖춰야 한다"면서 "BTS를 넘어서는 유명한 팝 음악 연주자도 이제는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 관련기사 ([아임 프롬 인천·(16)] 신포동 미군 클럽 휘저은 한국 대중음악 레전드 "지금의 K팝, 뿌리는 인천")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https://www.kyeongin.com/article/1711536
[아임 프롬 인천·(16)] 신포동 미군 클럽 휘저은 한국 대중음악 레전드

[아임 프롬 인천·(16)] 신포동 미군 클럽 휘저은 한국 대중음악 레전드 "지금의 K팝, 뿌리는 인천"

선물한 기타… 음악에 눈 떠동산고 시절 '캑터스' 리더로 클럽 연주'키보이스' '히파이브' '히식스' 명성'서울재즈아카데미' 설립… 후배 양성"내년엔 고향에서 큰 콘서트 열고파"우리나라 최초 록밴드로 불리는 키보이스를 비롯해 히파이브, 히식스 등의 밴드를 이끈 인천 출신 전설의 기타리스트 김홍탁. 김홍탁의 유년 시절 인천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 김홍탁은 해방 직전인 1944년 인천 내동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 최초 성공회 성당인 내동 성공회성당이 잘 보이는 집이었다. 김홍탁의 아버지(김창선)는 창영초등학교를 나왔고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와서 법원 공무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보다 4~5년 아래인 김홍탁의 어머니 홍정희 역시 창영초등학교 출신이다. 아버지는 책과 공부와 음악을 좋아했고, 어머니는 결혼 전까지 곱게 자란 여성이었던 것 같다고 김홍탁은 기억했다.김홍탁의 유년 시절 기억은 한국전쟁으로 시작된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1학년이 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김홍탁은 인천 영종도로 피란을 가야 했다. 영종도에는 친척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는 피란 과정에서 아버지·어머니와 잠시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다. 김홍탁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는 영종도로 피란을 나온 것이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법원 공무원인 아버지는 인민군에게 끌려갔고 어머니는 집을 지켜야 했던 상황이었다. 김홍탁의 아버지는 1·4후퇴가 지나서야 인천의 한 경찰서에서 식물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한다.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이 남하하며 점령한 남측 지역에는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다. 경찰과 관청 공무원 등은 가장 우선적인 숙청 대상이었다. 이들은 북한군에 의해 수감되거나 학살됐고, 가족들도 고초를 겪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김홍탁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사흘 전에 아버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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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호실이다. 발인은 9일 오후 3시40분. 장지는 인천 영종도 선산이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