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학번에 기회준 인천… 강대국과 경쟁하려면 국제적 시각 필요”

이상은 산업통상자원부 산업환경과장. /김도윤기자 lkjkdy02@kyeongin.com
이상은 산업통상자원부 산업환경과장. /김도윤기자 lkjkdy02@kyeongin.com

40번째 아임프롬인천은 한 부산 소년의 인천상륙작전 이야기다. 산업통상자원부 산업환경과장으로 일하는 이상은(45) 서기관이 이번 이야기 주인공이다.

이상은 서기관에게 처음 인터뷰를 제안했을 때 “공무원인 제가 무슨 자격이 있겠느냐”며 완곡한 거절 의사를 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동북아 국제비즈니스 중심도시를 꿈꾼 도시 인천이 그에 어울리는 인재를 직접 양성하겠다며 설립한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대학 1기 입학생의 성장기를 꼭 들어야겠다고 설득하자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였다.

고향인 부산을 떠나 멀리 인천까지 상륙작전을 감행해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킨 한 소년의 도전적인 이야기를 소개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40여년 그의 인생에서 그가 실제 물리적으로 인천에 머무른 것은 5년 남짓한 시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에게 인천은 늘 감사하고 특별하며 고향이나 다름없는 도시다.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물류학부.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물류학부.

‘특별한 대학이, 특별한 학생을, 특별한 조건으로 모집합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97년 겨울 어느 날 부산의 한 도서관에서 펼친 일간지 신문광고 문구가 어린 이상은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 광고는 그가 인천과 인연을 만들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광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대학이 국제 통상전문가 양성을 위해 제1기 신입생을 모집합니다”라는 설명과 함께 “우수 학생을 조기 선발, 집중 육성함으로써 외국어는 물론 통상실무 능력을 완벽하게 갖춘 국제통상 전문가를 길러낼 것”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어린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조건도 파격적이었다. 입학생 전원 4년간 전액 장학금, 1년간 해당 전공지역 해외 우수대학 유학, 외국 교환학생과 3년간 생활관 공동생활 등 당시에는 흔치 않은 ‘특별한 조건’을 내걸고 있었다.

고교 생활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예비 대학생 이상은은 그 순간이 운명적인 만남이 될 것이란 것을 어느 정도 직감했다. 그는 6~7살 유년시절부터 ‘사회과 부도’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이미 세계지도를 외워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사회과 부도의 알록달록 화려한 그림이 어린아이의 눈을 사로잡았는데, 자연스럽게 여러 나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난 뒤 친구들과 ‘나라 이름 말하기’ ‘수도(首都) 이름 맞히기’ 게임을 하면 한 번도 지는 일이 없었다.

부산 출신… 파격 조건에 대입 ‘인천상륙’

“형편 안 좋은 친구들 모여 열심히 노력”

1년 유학 혜택… 많은 경험 위해 중국行

동시통역사 수준 어학 실력 키워 돌아와

행시 합격후 산업부 통상협상장서 활약

공로 인정 받아 2015년 ‘대통령 표창’도

“특히 동북아 지역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당시 유행하던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와 같은 일본 관련 책을 많이 읽었어요. 고등학교 즈음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국도 유럽연합(EU)처럼 동북아 지역 연합체 같은 걸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도 막연히 했던 것 같아요. 지리를 좋아하고 사회과 부도를 탐독하던 제 성향이었는데, 동북아시아도 역량을 합치면 무언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식의 국제 관계 속의 우리나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당시 이미 한 차례 입시에서 낙방을 경험한 터였다. 부모님은 서울대를 가지 않을 거라면 부산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초·중·고교 재학 중 늘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는 당시 서울대가 처음 도입한 ‘학교장 추천제’로 서울대 지리학과에 지원했고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지만 고배를 마셨다. 부모님은 부산의 명문대인 부산대 법대에 진학해 법조인이 되길 바랐는데 그는 법조인이 되길 원치 않았다. 고향 부산을 벗어나고 더 큰 도시를 경험하고 싶었다. 당시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이었는데, IMF 시기 부모님은 그의 유학 생활을 지원해줄 정도의 경제력이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4년 동안 학비 걱정 없이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조건이 맘에 들어 진학을 결심하고 입학하게 됐다. 전철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서울로 갈 수 있었던 인천의 위치도 나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인천대 진학을 ‘인천상륙작전’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그에겐 큰 도전이었다.

“저한테는 인천상륙작전입니다. 국가적으로는 IMF라는 위기 상황이었고,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에 서울로의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상황이 어린 학생에게는 크나큰 위기나 다름 없었습니다. 모험을 강행해 부산에서 인천으로 향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제일 큰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습니다. 실패할지 성공할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과감한 선택을 했고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은 서기관의 2006년 인천대학교 졸업식 기념사진. /이상은 서기관 제공
이상은 서기관의 2006년 인천대학교 졸업식 기념사진. /이상은 서기관 제공

그가 처음 입학한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대학은 21세기 동북아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들을 키우겠다는 목표로 1997년 설립돼 이듬해부터 신입생을 받았다. 사립 인천대의 시립화를 이뤄낸 후 국제적 인재를 직접 양성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김학준 총장과 최기선 시장이 의기투합해 이뤄낸 작품이다. 최기선 시장은 동북아 중심도시를 표방했다. 인천국제공항(Air port)과 인천항(Sea port), 송도정보화신도시(Tele port)를 연결하는 트라이포트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세워두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개혁·개방을 이뤄낸 중국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을 이뤄가던 시기였다. 또 냉전시대를 거치며 오랫동안 단절됐던 러시아와의 교류도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맞물리며 확대될 시기라는 배경도 있었다.

새로 단과대학을 설치하려고 하니 수도권 대학 정원 규제가 문제였다. 10개 학과에서 정원 5명씩을 줄이는 방식으로 첫해 50명을 모집하기로 했다. 인천대를 소위 SKY에 버금가는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로 상위 수능성적 3~4%를 지원 자격으로 내걸었다. 급격하게 나빠진 국내 경제사정 때문에 성적은 우수하지만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유년부터 세계 관심 ‘사회과 부도’ 탐독

“동북아, EU같은 연합체 안될까 생각도”

그는 비슷비슷한 형편의 급우들과 가족처럼 어울리며 행복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저를 포함해서 대체로 형편이 여유롭지 않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IMF 학번이니까요. 서울에 있는 소위 명문대를 갈 수 있는 실력은 충분하지만 여기 온 친구들이 많았죠. 너무 각별한 사이가 됐죠. 그러면서 다들 되게 열심히 노력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상은은 첫 학기를 제외하고 3학기 연속으로 학생회 준비위원장을 맡아 활동할 정도로 학과 선후배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이런 리더십을 함양한 건 중·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기 자신보다 주변 선후배를 먼저 챙기는 습관이 몸에 익어 자연스럽게 항상 리더 역할을 해왔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고 중학교 시절 계기가 될 작은 사건이 있었다. 그는 늘 학교 공부가 어렵지 않았고 또래와 비교해 아는 것도 많았다. 교실에서 선생님 질문에 제일 먼저 답변하는 학생은 그였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선생님이 내는 퀴즈를 독점하는 모습을 선생님은 물론 반 친구들이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이후에는 나보다 주변을 먼저 챙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인생에 내가 아닌 친구들을 중심에 두고 살았다.

대학 생활은 즐거웠지만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동북아국제통상대학 학생은 입학 후 3학기가 지나면 미·일·중·러 국가 가운데 한 대학으로 1년간 유학을 떠나야 했다. 학교 커리큘럼은 모든 스케줄이 해외 유학이 가능하게끔 실력을 갖추도록 설계됐다.

“하루하루 발전해가는 모교 자랑스러워”

국제도시 송도에서 글로벌 감각 키우길”

“대학교 1·2학년을 거의 고3처럼 보냈어요.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제가 많아 거의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가 입학할 당시에는 기숙사가 지어지지 않았다. 서구 심곡동 인천시인재개발원 숙소를 사용했는데, 외국인 교수도 함께 사용했다. 영어·일어·중국어·러시아어 외국어 교수님들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밥을 먹고 수업을 들으면서 모든 학생들이 외국어 공부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는 인천대를 선택한 자신의 결정이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더 노력했다.

“대학교 입학 후 ‘선택과 기회비용’에 대해 늘 고민했습니다. 나의 선택이 틀린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오늘의 내가, 현재의 내가, 이를 선택하지 않은 또 다른 나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늘 저를 지배했습니다.”

중국 유학시절 이상은(맨 오른쪽) 서기관과 친구들. /이상은 서기관 제공
중국 유학시절 이상은(맨 오른쪽) 서기관과 친구들. /이상은 서기관 제공

중국 유학 시절 경험한 26일 동안의 중국 기차여행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경험이다. 그는 중국대외경제무역대학에서 2학년 2학기부터 3학년 1학기까지 공부하며 1년 동안 중국에 머물렀다. 동북아국제통상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유학 생활인데 그는 친구를 만들고 가급적이면 직접 경험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중국 대학에서 만나고 사귀는 친구들이 앞으로 중국 사회를 이끌어갈 리더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한 그는 우선 친구들을 잘 사귀어 두자고 결심했다.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지만, 물가가 비싼 미국에서는 할 수 없는 ‘직접 경험’을 중국에서 더 늘리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중국 기차여행이었다. 낮에는 도시를 경험하고 밤에는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일정을 26일 동안 이어갔다. 베이징에서 출발해 뤄양, 시안, 청두, 충칭, 쿤밍, 광저우 등의 도시를 경험했다. 중국 유학 생활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동시통역사 수준의 중국어 능력을 갖추게 됐고, 중국 교육부가 주관하는 HSK 시험 고급 자격을 취득하게 됐다. 이때 갖춘 중국어 능력은 그가 공무원 생활을 하는데 중요한 자산이 된다. 그는 한·중 FTA 통상장관회의 총괄 사무관으로 활약하며 장관 협상 테이블에서 통역을 맡아 수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 12월에는 제1회 대한민국 공무원상(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상은 서기관의 중국 유학시절 모습. /이상은 서기관 제공
이상은 서기관의 중국 유학시절 모습. /이상은 서기관 제공

이상은은 자신을 길러준 모교인 인천대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자랑스럽다. 하지만 후배들이 지금의 위치에 안주하지 말고 더 국제적인 인재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인천대 후배들이 인천의 발전도 좋지만 국가의 발전에도 좀 더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우리 경쟁 상대는 결코 한국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강대국 사이에 있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인 저는 미국·중국·일본 등의 공무원과 협상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뛰어나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우리 나라의 어려움이 됩니다. 그들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 하며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를 꼭 해 주고 싶습니다. 지금 인천대는 송도라는 글로벌도시에 있습니다. 더 국제적인 시각과 목표를 갖고 우리 후배들이 글로벌 인재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