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푸드’, 그중에서도 ‘장’을 향한 이목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쏠리고 있다. 지난 3일(현지시간)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다.

국내에는 음식으로 예술을 빚어내는 장 명인이 있다. 이들은 농림축산식품부가 엄선해 임명하는데, 경기도에서는 권기옥 명인과 서분례 명인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두 명인은 장 담그기 문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자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는 동시에 애정 어린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백 마디 말보단 역시 ‘맛’이었다. 안성시 일죽면의 서일농원. 서분례(75) 명인(제62호)이 항아리에서 갓 퍼낸 된장을 검지에 덜어 기자에게 건넸다. 혀끝에 닿은 재래식 된장은 오묘한 깊은 맛을 냈다. 10만㎡(3만 평) 대지와 장독대 위의 항아리 3천여 개.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이 항아리들은 그 자체로 서 명인의 자부심이다.

“된장, 청국장은 내 새끼 같은 거예요. 내 새끼가 어디 가서 장원급제해온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정도죠.” 유네스코 등재를 ‘장원 급제’에 비유하면서는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 장독 하나하나에는 전통 장이 조명받지 못했던 시절의 설움, 그럼에도 묵묵히 장을 담그며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긴 세월이 담겨 있었다.

2일 오전 안성시 일죽면 서일농원에서 서분례 명인이 장을 관리하고 있다. 2024.12.2 /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
2일 오전 안성시 일죽면 서일농원에서 서분례 명인이 장을 관리하고 있다. 2024.12.2 /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

서 명인은 “전통 장을 담그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예술이나 마찬가지”라고 자긍심을 드러내며 “콩, 소금, 볏짚, 항아리는 물론 햇빛, 공기, 물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해서는 우리네 전통 장이 되지 않는다. 이제 전 세계에서 관심을 보이는 만큼 전통 보존과 세세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아직 대중에게는 생소한 ‘어육장’을 전승해온 권기옥(92) 명인(제37호)도 이날 즐거운 마음으로 넓게 펼쳐진 항아리들을 들여다봤다. 용인시 처인구에 위치한 상촌식품에는 700개에 가까운 장독들이 있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땅 아래도 장독이 묻혀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장 담그기 문화’

전통 장 담그는 것 예술이나 마찬가지

콩, 소금, 볏짚부터 햇빛, 공기, 물까지

어느 하나도 부족하다면 ‘장’ 되지 않아

‘어육장’ 메주에다 소·닭·대구 섞어 익혀

1년 땅속에서 발효하고 햇볕에서 또 1년

궁중이나 사대부가에서 귀하게 여긴 장

장독 뚜껑을 열자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어육장 명인의 항아리 안에는 소고기, 닭고기, 대구·도미·가자미 같은 흰 살 생선이 메주와 섞여 익어갔다. 1년을 땅속에서 발효시키고, 다시 햇볕에서 1년 이상을 숙성시킨다는 어육장은 궁중이나 사대부가에서 귀하게 여겼던 장이다.

권 명인은 우리나라 유일의 궁중장 명인이다. 그는 한국 고유의 장 담그기 문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그 명맥을 이어가는 것에 깊은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집집마다 장을 담가 먹는 문화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어육장을 전승해온 권기옥 명인. 용인시 처인구에 위치한 상촌식품에는 700개에 가까운 장독들이 있다. 2024.12.2 /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
어육장을 전승해온 권기옥 명인. 용인시 처인구에 위치한 상촌식품에는 700개에 가까운 장독들이 있다. 2024.12.2 /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

이 공동의 행위는 공동체의 평화와 소속감을 조성한다.

유네스코에서 밝힌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의 이유

권 명인은 “식품박람회에 참석해 우리 장에 대해 이야기하면 모두 놀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 피터 길모어 등 외국 셰프들도 직접 찾아와 장맛을 보고 갔다”면서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년간 정성 들여 만든 우리의 장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고, 이를 좀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도 덧붙였다. 이것이 유네스코 세계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 장 문화를 지켜나가는 길임을 권 명인은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후대로 전승… 두 명인 이루고픈 숙제

권기옥(92) 명인(제37호)

권기옥(92) 명인(제37호)

서분례(75) 명인(제62호)

서분례(75) 명인(제62호)

행사·강의… 사비 들여 전시 열기도

문화 지키기 위해 바쁘게 다닌 지난날

양산형 아닌 전통방식 후세대 전해야

1인 가구 늘어나며 대기업 장 찾아

그저 소수의 미식가 식재료 아니기에

문화 홍보에 꾸준한 정부 차원 지원을

“장은 가족의 정체성을 반영하며 가족 구성원 간의 연대를 촉진한다. … 이 공동의 행위는 공동체의 평화와 소속감을 조성한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가 한국의 장 담그기를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에 등재하기로 결정하며 밝힌 이유다. 역사에 남을 경사스러운 일이었지만, 권기옥·서분례 명인은 한편으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전통 장을 온전한 형태로 후대에 전승해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나는 비단옷 입고 밤길을 간 거에요.” 권기옥 명인은 우리의 ‘장 담그기’ 문화가 점차 사라지고 잊히는 동안, 전통 장을 알리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던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권 명인은 정기적으로 행사를 열고 강의에 나가는 것은 물론, 사비를 들여 인사동에서 궁중 장 전시를 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열심히 전통 장을 만들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른다. 나라에서도 관심이 없었다”며 “궁중 장의 명맥이 끊어질까 봐 지금껏 해오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서분례 명인 역시 “나 같은 사람이 죽고 나면 전통 장은 이제 없어질지도 모른다. 등재된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제대로 전통을 지켜 장을 담그는지는 의문”이라며 “양산형으로 나오는 장은 전통 방식을 지키지 않는다. 우리가 갖고 있는 전통적인 장 담그기 기술을 다음 세대까지 연결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분례 명인은 양산형으로 나오는 장이 아닌 전통 방식을 지켜 만드는 기술을 다음 세대에게 연결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2024.12.2 /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
서분례 명인은 양산형으로 나오는 장이 아닌 전통 방식을 지켜 만드는 기술을 다음 세대에게 연결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2024.12.2 /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

장을 담글 수 있는 마당 있는 집이 점차 사라지고, 핵가족 또는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우리나라의 변화는 간편하게 사 먹을 수 있는 대기업의 장을 찾게 됐다. 전통 장이 그저 소수의 미식가를 위한 식재료에 머무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다. 계승자가 있을지라도 꾸준한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없다면 대중화는 물론, ‘음식의 예술’인 전통 장 담그기를 지속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권기옥 명인의 전수자인 며느리 서은미 씨는 “여긴 상황이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대다수의 전통 장을 담그는 곳들이 가내수공업 정도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농림축산식품부에서 홈페이지나 온라인마케팅, 시설에 대한 부족한 부분을 지원해 주고 있으나 장을 팔아 이익을 낸다고 생각해서인지 명인 자체에 대한 지원은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무리 전통 장의 우수성을 알리려 해도 개개인이 하기엔 한계가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매일 정성을 들여 전통의 방식으로 만드는 장이 있다는 것을 국민들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대량생산으로 판매되는 획일적인 장맛, 양산형 장과 구분 없이 재래식 장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식품 규제 역시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소비기한 표기가 대표적이다. 어육장은 적어도 1년을 땅속에 묻은 뒤 꺼내 숙성과정을 거쳐야 하고, 된장 등 다른 장들도 수년을 익히고 묵힐수록 그 맛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계승자가 있을지라도 꾸준한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없다면 대중화는 물론, 음식의 예술인 전통 장 담그기를 지속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2024.12.2 /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
계승자가 있을지라도 꾸준한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없다면 대중화는 물론, 음식의 예술인 전통 장 담그기를 지속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2024.12.2 /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

전통 장을 알리고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장 박물관’의 필요성도 언급됐다. 서분례 명인은 “전통 방식의 장 담그기를 체험하고, 장에는 어떤 좋은 성분이 있는지, 또 발효 과정에서 유익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그 과정을 체계적으로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는 것은 앞으로 후대에까지 문화를 잘 전승해야 한다는 숙제가 남았다는 것이기도 하다”며 “공장제로 만든 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전통적인 우리 장이 지닌 의미를 모르는 경우는 많았다. 장을 담가 먹는, 그런 공동체로서 향유하는 장 문화의 지속발전을 위해 교육은 물론 꾸준한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짚었다.

/구민주·유혜연기자 ku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