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고독했던 패배자… 독립운동 숨은 영웅들 잊지 말자”
당시 조선서 손꼽히던 부자 남양주 이석영
독립운동에 3조 자산 소진 영양실조 숨져
안성·화성, 3·1운동 다른 지역보다 격렬
제암리 학살 비극… 스코필드 널리 알려
양평 출신 여운형, 총독부와 건준 협상
“조선 최고의 부호였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을 모두 팔고 결국 아사한 이석영 선생을 아십니까?”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은 남양주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을 만큼 조선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남양주에서 시작해서 서울 동대문에 들어와야 이석영 선생의 땅이 끝난다고 할 만큼, 유명한 부호였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1934년 숨을 거두게 된 이유가 다른 무엇도 아닌 영양실조였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조선 최고의 부호가 아사로 생을 마감하게 되기까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석영 선생은 3조 가량으로 추산되던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독립운동에 투자한다. 한국의 독립운동단체인 경학사,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창설하는 데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친 것이다.
독립군 양성을 위해 전재산을 소진한 뒤,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 이석영 선생의 무덤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생전 일기를 보면 ‘먹을 게 없어서 옆집에 옥수수를 꾸러간다’고까지 적혀있었다고 하는데,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외롭고 쓸쓸히 혼자 생을 마감한 것이다.
지난 10일 최태성 역사 강사는 수원 유신고등학교에서 특강을 열고 이석영 선생의 이야기와 같이 경기도 곳곳에 숨어있는 역사 이야기들을 학생들에게 전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1시간 가량 진행된 최 강사의 특강에는 유신고 1·2학년 학생 300여명이 참석해 열띤 강의를 경청했다. 최 강사는 학생들과 퀴즈를 주고받는 등 소통하며 경기도의 역사 이야기를 알려줬다.
최 강사는 경기도 지역별로 대표 사건들을 전했는데, 이석영 선생의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다.
이석영 선생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비교적 덜 알려진 이야기였기에 학생들은 특히나 집중해서 듣는 모습이었다.
그 다음으로 최 강사가 소개한 사건은 3·1운동, 그중에서도 화성과 안성 등지에서 일어난 ‘격렬한’ 3·1운동이다. 최 강사는 “시험문제에 ‘3·1운동은 비폭력 저항운동’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데, 그 이유가 특히 화성과 안성 때문”이라며 “화성에서 격렬하게 시위하는 과정에서 일본 순사 2명을 돌로 죽인다. 일본인 순사가 남한에서 한국인에게 돌에 맞아 죽은 유일한 지역이 화성이라서다. 일본이 민족대표 33인에 내란죄를 적용하려고 할 때, 남한에서 유일하게 내란죄 적용이 검토된 지역이 안성과 화성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격렬하게 들고 일어났던 화성과 안성은 ‘제암리 학살 사건’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를 맞게 된다. 당시 일본으로서는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며 이 지역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일본의 식민 통치가 부당하다는 것이 전세계에 알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의미를 가진다. 당시 학살사건 사진을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미국으로 보내면서 일본의 반문명적인 학살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
최 강사는 “역사의 시기를 두개로 나누라고 한다면 저는 3·1운동이 분기점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래서 화성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최 강사가 소개한 양평의 이야기는 양평 출신인 독립운동가 여운형 선생이다.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았지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까지 광복이 됐다는 사실이 전해지지 않던 사이 조선총독부가 협상을 위해 찾아갔던 정치인이 여운형 선생이었다.
최 강사는 “당시 라디오도 그렇고 워낙에 음향이 좋지 않은 열악한 상황이었기에 (일반 사람들) 대부분 광복된 걸 몰랐는데, 일본인들에겐 그저 공포였을 것이다. ‘여기 있다가 돌맞아 죽는거 아닌가’ 생각해서 조선총독부가 안전하게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조선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정치인을 만나자고 해서 여운형 선생을 만났고 이후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이날 최 강사는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가 걸린 사진을 보여주면서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순종의 기록을 언급한다.
“짐은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이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해 오던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한다.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자기 직업에 안주해,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해 행복을 함께 받으라.”
최 강사는 “마지막 황제의 멘트가 이랬다는 것이 충격적”이라며 이를 통해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다.
이렇게 부끄러운 행동을 하면 후세에 부정적으로 평가받게 되니 역사를 배워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석영 선생, 3·1운동에서 격렬하게 시위한 시민들, 여운형 선생은 나라가 없어질 위기에 처한 순간에 순종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
이들에게는 ‘후손들만큼은 식민지 조국의 백성으로 살지 않게 하겠다’는 꿈이 있었다. 최 강사는 “이들의 꿈 덕분에 지금 여러분들이 이 공간에서, 이 시간에 무언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린 역사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최 강사는 시 한 편을 읊으며 강의를 끝맺었다.
‘누구일까, 최초의 그 사람은. 금기된 미지의 것을 향해 첫발을 내딛어 삶의 영토와 인간의 지경을 넓혀준 최초의 패배자, 그 고독했던 사람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패배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 고독했던 패배자들을 우린 잊지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