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사진이 분리되지 않은 사진가’
인천 선인고 독수리 사진반서 입문
3번째 개인전 ‘포토그램-육체’ 실험
동생 죽음이 탄생시킨 ‘광호타입’
가족에 대한 애절함 작품 세계 반영
“노무현 대통령, 최고의 사진 모델”
“사진은 ‘지금’ 삶의 방식 얘기하는 것”

사진가 최광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진가 중 한 명’이란 아주 식상한 수식으로 우선 소개해야 한다. 이 같은 타이틀로 정리된 여러 목록에는 최광호란 이름이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부터는 최광호 작가를 설명하기가 무척 곤란해진다. 60회가 넘는 개인전을 가졌고 100회가 넘는 단체전에 참여한 광폭 행보를 보인 작가다. 그의 예술철학이라 할 수 있는 ‘사진으로 생활하기’ 혹은 ‘삶과 사진이 분리되지 않은 사진가’로 설명해야 하는데, 이 한 줄의 설명만으로 단번에 그를 이해하기 어렵다. ‘최광호 공부’가 필요하다.
최광호 작가는 삶에서 사진을 놓지 않는다.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카메라 없이도 사진을 만들어 내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온통 사진으로 남겼다. 자신의 결혼식 도중 카메라를 들었고, 훗날 제자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맡았을 때도 카메라를 들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벗은 몸, 심지어 가족이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도…. 특히 가족의 죽음을 담은 사진들은 최광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한다.
최광호는 1956년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그러나 “사진의 고향은 인천”이라고 했다. 인천에서 학창 시절과 청년기를 보냈고, 사진을 배웠다. 그의 삶과 사진 사이 녹진하게 붙어있는 인천을 떼어내 현상해보니 결국 가족이 나왔다. 최광호의 사진을 이해하려면 그의 가족과 인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현재 경남 밀양에 거주하면서 창원에 차린 카페 겸 작업실·갤러리를 오가고 있는 최광호 작가는 마침 서울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오는 28일까지 개인전 ‘지금, 영겁의 얼굴’을 개최하고 있다. 전시 개막일인 지난 12일 오후 전시장에서 만난 최광호 작가는 인천에서 온 ‘아임 프롬 인천’ 취재진을 반갑게 맞았다. 보라색 셔츠와 파란색 머플러로 멋을 낸 작가는 여전히 소년 같은 인상이었다.
포토그램

강릉 소년 최광호 작가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인천으로 이사왔다. 아버지는 옹진군보건소에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같은 섬 지역 무의촌(無醫村)을 오가던 의사였다. 부모님 고향은 이북 강원도 원산이다. 아버지는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자 강릉에 머물렀고, 이북 땅이 보이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 옹진군보건소 근무를 지원했다고 한다. 그 시절 실향민들은 다 같은 마음이었다.
1970년대 옹진군 섬 주민들의 삶은 매우 열악했다. 의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최광호 작가 아버지 같은 무의촌 순회 진료 의사들이 무척 귀했을 것이다. 주로 천주교에서 백령도, 덕적도 등지에 병원을 지었다. 미국 뉴저지 출신 부영발(Edward James Moffet·1922∼1985)는 1959년부터 1973년까지 백령도 천주교회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김안드레아 병원을 운영했고, ‘서해 낙도의 슈바이처’라 불린 최분도(Benedict Zweber·1932~2001) 신부는 1966년 들어간 덕적도에 병원을 짓고 미군 쾌속정을 병원선으로 개조해 섬들을 돌며 환자들을 돌봤다. 이러한 민간 차원의 노력은 공공의료 정책을 이끌어 냈다. 대한적십자사는 1976년 70t급 병원선 ‘백련호’를 건조해 서해 5도에서 운영했다. 옹진군 병원선은 몇차례 새로 교체되면서 현재까지도 섬을 다니고 있다.
“동해는 막 파도가 치는 바다였는데, 인천에 와서 보니 서해는 바다가 아니고 호수 같았어요. 인천의 첫인상입니다. 아버지를 따라서 대청도와 백령도를 갔던 기억이 있어요. 하루 종일 배를 탔어요. 군(軍) 잠수함이 저희가 탄 배를 쫓아오기도 했고요. 도화동에서 살았는데, 그때 인천의 풍경은 강릉과도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 인천은 고등학교 시절과는 엄청나게 달라진 인천이죠.”
최광호 작가는 선인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진을 처음 접했다. 증명사진을 찍으러 갔던 사진관에서 현상 과정을 지켜봤다. 현상액 속에서 사진의 화상이 쫙 올라오는 모습이 바다에서 파도가 칠 때 올라오는 거품과 똑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에게 사진의 첫인상은 바다의 파도였다.
최광호 작가는 훗날 또 한 명의 한국 대표 사진가가 되는 친구 정주하와 함께 전설의 선인고 사진 동아리 ‘독수리 사진반’을 만들었다. ‘아임 프롬 인천’ 13번째 손님이었던 나명석 자담치킨 회장(11월 9일자 11면 보도)도 독수리 사진반에서 활동했던 사진기자 출신이다. 백선엽·백인엽 형제가 운영하던 선인학원이 여러 학교를 건설하며 한창 세를 불렸던 1970년대에는 이른바 ‘선인왕국’에 빈 건물이 많았다. 학교에선 특별활동 동아리를 만들면 빈 건물의 공간을 내주고, 오후 수업도 일부 빼줬다고 한다. 최광호 작가는 독수리 사진반을 만든 이유에 대해 “수업 시간에 땡땡이를 치면서 즐겁게 놀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 작가인 윤광인 선배의 사진관이 학교 앞에 있었어요. 윤광인 선배가 독수리 사진반 친구들에게 사진을 가르쳐 줬어요. 당시 인천에는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에 다니는 선배들이 많았어요. 그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같이 사진을 찍으면서 배웠죠. 다른 사람들은 공모전 사진을 찍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저는 카메라를 들고 동인천이며 화수동이며 해안을 따라서 거리를 배회하면서 찍는 게 참 좋고 즐거웠습니다. 사진기를 사려고 정주하 작가랑 인천항 제2도크(갑문·1974년 5월 준공) 공사장에서 일하기도 했고요. 당시는 사진을 하면 건달이 된다고 집안에서 반대하던 시절이었는데, 왜 그렇게 좋았는지 지금도 모르겠네요.”
고등학교 졸업 후 신구대학 사진인쇄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첫 개인전은 1977년 서울 출판문화회관에서 연 ‘심상일기’다. 일기를 쓰듯 찍은 사진들을 모았다. 최광호 작가는 지금도 첫 개인전 때와 마찬가지로 촬영을 위해 일부러 어딘가를 찾기 보단 주변의 일상에서 하루하루 삶을 찍는다. 일상의 사소한 생활을 찍는 것이 작품의 시작이다.

최광호 작가의 세 번째 개인전 ‘포토그램-육체’는 1979년 인천 중구에 있었던 인천시 공보관에서 열렸다. 이 실험적인 전시부터 사진가 최광호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우선 ‘포토그램’(Photogram)이란 기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포토그램은 사진기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 등의 감광 재료와 현상 약품만을 이용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기법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최광호의 초기 포토그램은 밝은 공간에서 인화지 위에 정착액을 바른 물체를 직접 얹어 그 물체의 상(像)을 인화하는 것이다.
전시명 ‘포토그램-육체’에서 알 수 있듯, 최광호 작가는 정착액에 자신의 몸을 담갔다가 인화지에 찍었다. 그렇게 자신의 적나라한 육체를 인화했다. 당시 전시를 본 사진계 인사들은 ‘이게 무슨 사진이냐’며 비웃었다고 한다. 화가, 조각가, 문인들은 전시를 보곤 작품이 참 좋다고 했다고 한다. 이 같은 파격의 계기는 외할머니의 죽음이었다.
“인천 집에서 모시고 살던 외할머니가 치매에 걸렸어요. 병간호를 하면서 외할머니 모습을 계속 찍었어요. 목욕하려고 벗을 때도 찍고 식사할 때도 찍고 그랬죠. 그러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부모님이 장례를 치르고, 부평화장장(인천가족공원)에서 화장을 한 유골을 제가 받았는데, 너무 따뜻하고 뭉클했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그 유골을 산에다 그냥 훅 뿌려버리는 거예요. 그때 제가 부모님께 굉장히 화를 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몸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제 몸에 사진 정착액을 바르고 인화지에 찍는 작업까지 왔어요. 그 작업은 제 사진 인생을 뒤집어 놓은 대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 아내도 만났다. 최광호 작가는 선배 윤광인 작가가 인천에서 운영하던 사진학원에 자주 들렀는데, 아내는 그 학원 수강생이었다. 아내도 강릉 출신이었다. 3차례나 개인전을 치른 작가지만, 생활은 빠듯했다. 결혼을 하려면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했다. 최광호 작가는 1980년 언론인 한창기(1936~1997)가 운영하는 ‘뿌리깊은나무’ 사진기자로 “운 좋게” 입사했다. ‘뿌리깊은나무’에서 근무한 3년 동안은 최광호 작가에게 행운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전국 곳곳을 누비며 ‘뿌리깊은나무’의 ‘한국의 발견’ 시리즈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고 한다.
광호타입

그러나 ‘뿌리깊은나무’에서 최광호 작가는 사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진 못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사진계 선배로부터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소리도 들었다. 최광호 작가의 스승인 육명심 신구대학 교수 밑에서 함께 배운 동료 작가 하봉호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말에 최광호 작가도 동행을 결심했다. 1983년이다. 일본 오사카 예술대학교 학부와 대학원(다큐멘터리사진 전공)을 졸업하고, 뉴욕대학교 대학원(순수예술 전공)을 졸업했다. 1993년 귀국했다.
“한국의 스승은 신구대학 사진과와 서울예대 사진과를 창설한 육명심 교수님이고요. 일본에서 만난 선생님은 이노우에 세류입니다. 이노우에 세류 선생님에게 사진이 뭐냐고 물었어요. 선생님은 가장 먼저 ‘사진은 사는 것(生)이겠지’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사진이 사는 것이란 고민을 일본에서 처음 하게 된 것이죠. 당시 한국에서 사진을 하는 어떤 사람에게 물어도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냥 잘 찍으면 되는 것이었죠. 일본 유학 동안에는 사진이 사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사진이란 예술이 무엇인지 더 고민했습니다.”
귀국 후 최광호 작가는 더욱 왕성하게 활동한다.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국경일을 기록해 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6·25와 이산가족이란 주제로 도달했다. 실향민인 부모님 생각이 났다고 한다. 그즈음인 1994년 8월 중순 경기도 가평으로 떠난 가족 여행에서 최광호 작가의 동생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장례를 치른 8월15일은 최광호 작가의 기념일이 돼버렸다. 해마다 8월15일이면 자신의 청량리 작업실에서 동생을 잃은 가평까지, 다음 해에는 동생의 유해를 안치한 벽제까지, 그 다음 해에는 동생이 졸업한 인천 제물포고등학교까지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무려 10년 동안 8월15일에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걷다 보니 동행자도 생겼다. ‘하늘땅 815’ 시리즈로 묶인 작업들이다.
동생의 죽음은 ‘광호타입’이라는 기법을 탄생하게 했다. 필름을 현상할 때는 ‘20℃에서 15분’처럼 지켜야 할 시간과 온도가 있다. 그래야 우리가 아는 ‘사진’이 나오게 된다. 최광호 작가는 동생이 죽고 난 후 ‘태어난 순서와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일’을 무척 고민했다고 한다. 인생이 정한 대로 되지 않는데, 사진 현상이라고 정해 놓고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필름을 넣어 둔 통에 현상액을 부어 둔 채로 몇 시간을 방치했다. 그리고 인화도 하루 종일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인화지를 밤새 인화액에 담갔다고 한다. 금색에 가까운 누런색 사진이 나왔다. 정한 온도와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하는 사진 작업, 붙일 이름이 마땅이 없어 그냥 ‘광호타입’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2008년 서울 갤러리 노암에서 개최한 개인전 ‘가족, 최광호’를 통해 작가는 가족사진가로도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70년대 말 외할머니의 죽음부터, 동생, 장인과 장모가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사진으로 담아 전시했다. 최광호의 작품 세계에서 가족은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작가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 겨우 입을 뗐다.
“실향민이라 친척이 없고 저희 가족밖에 없다 보니 가족은 제게 그리움 같아요. 그래서 더 절실하게 가족한테 집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릴 적에는 TV에서 죽은 간첩의 시체가 나오기도 했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그 시체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거예요. 그때는 왜 그러셨는지 몰랐는데, 성인이 돼서 다시 물어보니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했다’는 겁니다. 가족에 대해 더 애절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죠.”
1996년 4월 당시 ‘단군 이래 최대 화재’라고 불린 강원도 ‘고성 산불’도 작가 최광호를 자극했다. 불구경이나 가보자며 찾은 고성의 잿더미 풍경이 잊히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보상금을 더 받고자 산불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나무도 마구 베었다. 최광호 작가는 ‘인간이 자연에게 참 나쁜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자연 앞에서 인간도 솔직해 보자며 최광호는 벗었다. 그 잿더미 위에서 셀프 ‘벗음 사진’(누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틈이 나면 고성에 가서 벗고 찍었다. ‘땅의 숨소리’ 시리즈는 이렇게 탄생했다. 사진에 구멍을 뚫기도 한다. 밝은 곳이 아닌 암실에서도 포토그램을 작업한다. 그러면 엑스레이(X-Ray)처럼 사진이 나온다.
지금, 영겁의 얼굴

2000년대에는 평창의 폐교에서 10년 동안 머물렀다. 2020년에는 즉흥적으로 경남 밀양에 정착했고, 딸과 함께 창원에 작업실 겸 갤러리 겸 카페를 냈다. 평창에 살다 밀양에 사니 1년에 열네 달을 사는 것 같다고 한다. 밀양은 11월에도 춥지 않고 2월이면 꽃이 피는 따뜻한 동네다. 최광호 작가의 사진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노무현(1946~2009) 전 대통령이다. 2002년 대선 후보자 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을 찍은 것을 시작으로 인연이 이어졌다. 그 사진을 모아 2019년 10주기 사진전을 열었고, 올해 15주기 사진전도 개최했다.
“사람을 품는 그 인간성에 정말 만나 보면 반할 사람이에요. 사진 모델로서는 최고의 퍼포먼스꾼이죠. 대선 후보자 시절 혜화동 자택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는데, 노 대통령이 저한테 한 첫 마디가 ‘제가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까?’였어요. 제가 ‘고등학교 나와서 이만큼 오신 것도 기적 아닙니까’라고 답했죠. 노 대통령은 ‘기적, 재밌네요. 기적은 꿈이 있어야 일어납니다.’라고 했고요. 다시 제가 ‘대표님은 꿈을 꿔 본 적이 있나요?’라고 묻자 노 대통령이 ‘있지’라고 말하면서 ‘내가 중학교 때 다른 애들은 도시락 싸왔는데, 나는 배가 고파서 창가에서 이렇게 꿈꿨지’라며 손을 웅크리는 포즈를 취하는데, 그 순간을 막 찍어댔어요. 필름을 다섯 통은 쓴 것 같아요. 막 찍으니까 노 대통령이 ‘자네도 재밌네’라고 웃었죠.”
노무현 대통령이 “이렇게 꿈꿨지”라며 포즈를 취했던 그 사진은 서울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 ‘지금, 영겁의 얼굴’에서도 전시됐다. 전시 개막일인 12월12일은 1977년 첫 개인전 ‘심상일기’의 개막일과도 같다. 우연이지만, 최광호 작가는 필연처럼 다가왔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얼굴들이 전시됐다.
“사진이란 현장이란 의미에서 ‘지금’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지금이란 단어가 아주 절실해요. 모든 사람이 지금을 잘 살면 미래도 잘 삽니다. 또 지금은 과거에 이만한 시간이 있어서 지금인 것이잖아요. 과거에 그만한 시간이 있듯 미래도 그만한 시간을 갖거든요. 지금의 믿음이 이 순간을 아름답게 가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에게 사진이 뭐냐고 물으면 지금 스스로의 삶의 방법을 현장에서 사진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영겁의 시간도 지금이라는 시간과 연결돼 있어요. 태초의 시간이 있어 지금이 왔고, 또 지금은 먼 미래를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영겁’이란 단어를 떠올린 이유입니다.”
사진 말고는 어떤 취미가 있을까. 최광호 작가는 “요새는 끄적끄적 그림을 그린다”며 “그리고 모든 세상을 최광호 식으로 보는 게 취미”라고 말했다. 다시 인천 이야기로 돌아와, 이번 전시에 걸린 1975년께 인천 자유공원에서 열린 시민 촬영대회에서 찍은 사진을 본다. 제목은 ‘그 무엇’이다.
“5년 전 밀양으로 이사가서 이삿짐을 풀다가 이 사진을 발견했어요. ‘그 무엇’이라는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왜냐면 지금도 ‘그 무엇’이라는 고민을 하는데, 그때도 ‘그 무엇’이 고민이었던 거죠. 그때는 청소년기의 사춘기적 고민이라면 지금의 ‘그 무엇’은 어떠한 생명이나 진실, 바르게 사는 삶을 추구하는 그런 쪽이에요. ‘그 무엇’이란 단어가 이렇게 바뀌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인천을 떠올릴 때 가장 인상적인 기억이 됐어요.”
인천을 종종 찾는다. 당연히 인천에 올 때마다 많은 사진을 찍는다. 그의 나이 육십이었던 2016년 7월 인천 선광미술관에서 1970년대 찍은 인천 풍경을 전시한 개인전 ‘1975, 귀향’을 개최한 적이 있다. 최광호 작가는 언젠가는 다시 인천을 주제로 한 작업을 할 생각이 있다고 한다.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사진으로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늘 고민하며 살고 있다”며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정말 완전하게 사진으로 사는 사람이다.

■ 약력
1970년 강릉 강동초등학교 졸업
1973년 강릉 강릉중학교 졸업
1976년 인천 선인고등학교 졸업
1978년 신구대학 사진인쇄과 졸업
1980~1983년 뿌리깊은나무 사진기자
1987년 일본 오사카예술대학교 사진과 졸업
1989년 일본 오사카 예술대학교 대학원 다큐멘터리사진 전공 졸업
1992년 미국 뉴욕대학교 대학원 순수예술 전공 졸업
■수상
1999년 제3회 일본 도쿄 국제사진비엔날레 교세라상
2002년 제1회 동강사진상
2006년 제5회 강원다큐멘터리사진상
2024년 제33회 동서미술상
■ 전시
1977년 ‘심상일기’(서울 출판문화회관)를 시작으로 2024년 12월 ‘지금, 영겁의 얼굴’(서울 스페이스22)까지 개인전 60회 이상 개최, 단체전 100여 회 이상 참여.
■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동강사진박물관 등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