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뻑” 나간 2054년… 꺼지지 않는 컴컴한 진실
솔비·김완선 등 본업과 작품활동 겸업 ‘아트테이너’ 40명 참여
램프 불빛에 의존하는 관람 방법… 악플·환경오염 메시지 전해

2054년 지구가 이른바 ‘뻑’이 났다. 미래의 세상은 AI 로봇에 의해 인류문명이 사라졌고, 남겨진 예술품으로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 경기아트센터의 기획전 ‘생존구역:BBUCK On&Off’는 불빛을 잃은 생존구역 안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갈 변화의 방향을 고민해 보기 위해 마련됐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 대부분은 배우와 가수 등 본업과 함께 작품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아트테이너’들이다. 권지안(솔비), 김완선, 구준엽, 이민우, 장혜진, 고준을 포함해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국내 아트테이너와 조니뎁, 밥딜런 등 해외 아트테이너 및 동료 예술가 약 40명이 설치·조각·평면·비디오아트 등 12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아트테이너들의 활동은 ‘자기치유’를 바탕으로 한다. 전시는 미술 시장에 대한 도전장이라기 보다,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시대 정신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또 긍정적 사회공헌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판매된 작품의 수익금 일부가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에 기부되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이다.
전시는 특이하게도 전시장의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 램프 불빛 하나에 의존해 감상하게 했다. 어두워진 세상에서도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찾아보는, 콘셉트에 충실하면서도 독특한 관람 방식이다.
이번 전시에서 단연 인상적이었던 섹션은 D존이었다. 온라인의 삶이 익숙해진 시대에서 수많은 거짓 루머와 사이버 불링이 인간의 정신을 좀먹었고, 그로 인해 무너져간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가 은밀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담겨있다.

권지안의 작품 ‘A(k)pple land Menual’은 ‘사과’를 모티브 삼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사과’와 과일인 ‘사과’의 중의적 의미가 다소 묵직하게 드러난다. 모니터엔 온갖 악플들이 번갈아가며 나타나고 책상 위엔 반쪽의 사과들이 얹어져 있다. 사과의 색깔별로 알파벳을 매칭시켜 벽면에 전시된 작품의 뜻을 유추해보도록 했다. 책상 위 색을 잃은 사과들을 움직여 볼 수 있는데, 그 사과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지은(쥬니)의 영상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붉은 드레스에는 자신에게 악플을 달았던 이들의 SNS 계정과 내용이 가득 적혀있다. 익명 뒤에서 숨어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이들이 긴 길이의 드레스를 채울 만큼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이를 당당하게 드레스로 만들어 입어 보이는 작가의 용기와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어 낸 대담함이 인상적이다.
C존에 있는 최재용의 ‘노마드랜드’는 뻑이 난 지구에서 유목민처럼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 작업했다. 텐트의 폴대가 황폐하고 메말라 버린 지구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 가운데, 설치된 텐트 안에 적혀 있는 관람객들의 글과 곳곳에 찍힌 방문 날짜 등이 서로의 생존과 안부를 묻는 듯했다.

전시장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혜진의 ‘Flow Sonata’ 연작들은 그가 꾸준히 쌓아온 작품 세계를 짐작하게 해준다. 아름다운 지구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이 작품들은 작가 특유의 화풍과 더불어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만난 풍경들, 그 속에 놓인 피아노가 주는 음악적 위로가 묘하고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다.
동시대에 일어나는 여러 현상뿐 아니라 각자의 삶을 달리 바꿔놓은 예술적 활동의 의미까지 짚어본 이번 전시는 내년 1월 19일까지 계속된다.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