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고 독수리 사진반 창립멤버 최광호입니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열린 개인전 ‘지금, 영겁의 얼굴’ 전시장에서 만난 최광호 작가. 2024.12.1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 12일 오후 서울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열린 개인전 ‘지금, 영겁의 얼굴’ 전시장에서 만난 최광호 작가. 2024.12.1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사진가 최광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진가 중 한 명’이란 아주 식상한 수식으로 우선 소개해야 한다. 이 같은 타이틀로 정리된 여러 목록에는 최광호란 이름이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부터는 최광호 작가를 설명하기가 무척 곤란해진다. 60회가 넘는 개인전을 가졌고 100회가 넘는 단체전에 참여한 광폭 행보를 보인 작가다. 그의 예술철학이라 할 수 있는 ‘사진으로 생활하기’ 혹은 ‘삶과 사진이 분리되지 않은 사진가’로 설명해야 하는데, 이 한 줄의 설명만으로 단번에 그를 이해하기 어렵다. ‘최광호 공부’가 필요하다.

최광호 작가는 삶에서 사진을 놓지 않는다.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카메라 없이도 사진을 만들어 내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온통 사진으로 남겼다. 자신의 결혼식 도중 카메라를 들었고, 훗날 제자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맡았을 때도 카메라를 들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벗은 몸, 심지어 가족이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도…. 특히 가족의 죽음을 담은 사진들은 최광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한다.

그는 1956년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그러나 “사진의 고향은 인천”이라고 했다. 인천에서 학창 시절과 청년기를 보냈고, 사진을 배웠다. 그의 삶과 사진 사이 녹진하게 붙어있는 인천을 떼어내 현상해보니 결국 가족이 나왔다. 최광호의 사진을 이해하려면 그의 가족과 인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현재 경남 밀양에 거주하면서 창원에 차린 카페 겸 작업실·갤러리를 오가고 있는 최광호 작가는 마침 서울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오는 28일까지 개인전 ‘지금, 영겁의 얼굴’을 개최하고 있다. 전시 개막일인 지난 12일 오후 전시장에서 만난 최광호 작가는 인천에서 온 ‘아임 프롬 인천’ 취재진을 반갑게 맞았다. 보라색 셔츠와 파란색 머플러로 멋을 낸 작가는 여전히 소년 같은 인상이었다.

선인고등학교
선인고등학교

강릉 소년 최광호 작가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인천으로 이사왔다. 아버지는 옹진군보건소에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같은 섬 지역 무의촌(無醫村)을 오가던 의사였다. 부모님 고향은 이북 강원도 원산이다. 아버지는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자 강릉에 머물렀고, 이북 땅이 보이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 옹진군보건소 근무를 지원했다고 한다. 그 시절 실향민들은 다 같은 마음이었다.

1970년대 옹진군 섬 주민들의 삶은 매우 열악했다. 의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최광호 작가 아버지 같은 무의촌 순회 진료 의사들이 무척 귀했을 것이다. 대한적십자사는 1976년 70t급 병원선 ‘백련호’를 건조해 서해 5도에서 운영했다. 옹진군 병원선은 몇차례 새로 교체되면서 현재까지도 섬을 다니고 있다.

“아버지를 따라서 대청도와 백령도를 갔던 기억이 있어요. 하루 종일 배를 탔어요. 군(軍) 잠수함이 저희가 탄 배를 쫓아오기도 했고요. 도화동에서 살았는데, 그때 인천의 풍경은 강릉과도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아요.”

최광호 작가는 선인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진을 처음 접했다. 증명사진을 찍으러 갔던 사진관에서 현상 과정을 지켜봤다. 현상액 속에서 사진의 화상이 쫙 올라오는 모습이 바다에서 파도가 칠 때 올라오는 거품과 똑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에게 사진의 첫인상은 바다의 파도였다.

최광호 작가는 훗날 또 한 명의 한국 대표 사진가가 되는 친구 정주하와 함께 전설의 선인고 사진 동아리 ‘독수리 사진반’을 만들었다. ‘아임 프롬 인천’ 13번째 손님이었던 나명석 자담치킨 회장(2023년 11월 9일자 11면 보도)도 독수리 사진반에서 활동했던 사진기자 출신이다.

“사진 작가인 윤광인 선배의 사진관이 학교 앞에 있었어요. 윤광인 선배가 독수리 사진반 친구들에게 사진을 가르쳐 줬어요. 저는 카메라를 들고 동인천이며 화수동이며 해안을 따라서 거리를 배회하면서 찍는 게 참 좋고 즐거웠습니다. 사진기를 사려고 정주하 작가랑 인천항 제2도크(갑문·1974년 5월 준공) 공사장에서 일하기도 했고요.”

고등학교 졸업 후 신구대학 사진인쇄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첫 개인전은 1977년 서울 출판문화회관에서 연 ‘심상일기’다. 일기를 쓰듯 찍은 사진들을 모았다. 최광호 작가는 지금도 첫 개인전 때와 마찬가지로 촬영을 위해 일부러 어딘가를 찾기 보다는 주변의 일상에서 하루하루 삶을 찍는다. 일상의 사소한 생활을 찍는 것이 작품의 시작이다.

1979년 ‘포토그램-육체’ 파격 실험 화제

정착액에 몸 담갔다 인화지에 찍어내

일본 유학서 ‘사진은 사는(生) 것’ 화두

최광호 作 ‘포토그램-육체’(1979).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최광호 作 ‘포토그램-육체’(1979).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최광호 작가의 세 번째 개인전 ‘포토그램-육체’는 1979년 인천 중구에 있었던 인천시 공보관에서 열렸다. 이 실험적인 전시부터 사진가 최광호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우선 ‘포토그램’(Photogram)이란 기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포토그램은 사진기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 등의 감광 재료와 현상 약품만을 이용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기법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최광호의 초기 포토그램은 밝은 공간에서 인화지 위에 정착액을 바른 물체를 직접 얹어 그 물체의 상(像)을 인화하는 것이다.

전시명 ‘포토그램-육체’에서 알 수 있듯, 최광호 작가는 정착액에 자신의 몸을 담갔다가 인화지에 찍었다. 그렇게 자신의 적나라한 육체를 인화했다. 당시 전시를 본 사진계 인사들은 ‘이게 무슨 사진이냐’며 비웃었다고 한다. 화가, 조각가, 문인들은 전시를 보곤 작품이 참 좋다고 했다고 한다. 이 같은 파격의 계기는 외할머니의 죽음이었다.

“인천 집에서 모시고 살던 외할머니가 치매에 걸렸어요. 병간호를 하면서 외할머니 모습을 계속 찍었어요. 목욕하려고 벗을 때도 찍고 식사할 때도 찍고 그랬죠. 그러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부모님이 장례를 치르고, 부평화장장(인천가족공원)에서 화장을 한 유골을 제가 받았는데, 너무 따뜻하고 뭉클했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그 유골을 산에다 그냥 훅 뿌려버리는 거예요. 그때부터 몸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제 몸에 사진 정착액을 바르고 인화지에 찍는 작업까지 왔어요. 그 작업은 제 사진 인생을 뒤집어 놓은 대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 아내도 만났다. 최광호 작가는 선배 윤광인 작가가 인천에서 운영하던 사진학원에 자주 들렀는데, 아내는 그 학원 수강생이었다. 아내도 강릉 출신이었다. 3차례나 개인전을 치른 작가지만, 생활은 빠듯했다. 결혼을 하려면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했다. 최광호 작가는 1980년 언론인 한창기(1936~1997)가 운영하는 ‘뿌리깊은나무’ 사진기자로 “운 좋게” 입사했다. ‘뿌리깊은나무’에서 근무한 3년 동안은 최광호 작가에게 행운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전국 곳곳을 누비며 ‘뿌리깊은나무’의 ‘한국의 발견’ 시리즈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고 한다.

동생 사망 계기, 10년간 기일마다 걸으며

‘하늘땅 815’ 작업… ‘광호타입’ 기법도

“사진의 고향 인천 주제 다시 작업할 것”

젊은 시절 인천에서 찍은 최광호 작가의 자화상.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젊은 시절 인천에서 찍은 최광호 작가의 자화상.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그러나 ‘뿌리깊은나무’에서 최광호 작가는 사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진 못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사진계 선배로부터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소리도 들었다. 최광호 작가의 스승인 육명심 신구대학 교수 밑에서 함께 배운 동료 작가 하봉호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말에 최광호 작가도 동행을 결심했다. 1983년이다. 일본 오사카 예술대학교 학부와 대학원(다큐멘터리사진 전공)을 졸업하고, 뉴욕대학교 대학원(순수예술 전공)을 졸업했다. 1993년 귀국했다.

“한국의 스승은 신구대학 사진과와 서울예대 사진과를 창설한 육명심 교수님이고요. 일본에서 만난 선생님은 이노우에 세류입니다. 이노우에 세류 선생님에게 사진이 뭐냐고 물었어요. 선생님은 가장 먼저 ‘사진은 사는 것(生)이겠지’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사진이 사는 것이란 고민을 일본에서 처음 하게 된 것이죠. 당시 한국에서 사진을 하는 어떤 사람에게 물어도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냥 잘 찍으면 되는 것이었죠. 일본 유학 동안에는 사진이 사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사진이란 예술이 무엇인지 더 고민했습니다.”

귀국 후 최광호 작가는 더욱 왕성하게 활동한다.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국경일을 기록해 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6·25와 이산가족이란 주제로 도달했다. 실향민인 부모님 생각이 났다고 한다. 그즈음인 1994년 8월 중순 경기도 가평으로 떠난 가족 여행에서 최광호 작가의 동생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장례를 치른 8월15일은 최광호 작가의 기념일이 돼버렸다. 해마다 8월15일이면 자신의 청량리 작업실에서 동생을 잃은 가평까지, 다음 해에는 동생의 유해를 안치한 벽제까지, 그 다음 해에는 동생이 졸업한 인천 제물포고등학교까지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무려 10년 동안 8월15일에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걷다 보니 동행자도 생겼다. ‘하늘땅 815’ 시리즈로 묶인 작업들이다.

동생의 죽음은 ‘광호타입’이라는 기법을 탄생하게 했다. 필름을 현상할 때는 ‘20℃에서 15분’처럼 지켜야 할 시간과 온도가 있다. 그래야 우리가 아는 ‘사진’이 나오게 된다. 최광호 작가는 동생이 죽고 난 후 ‘태어난 순서와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일’을 무척 고민했다고 한다. 인생이 정한 대로 되지 않는데, 사진 현상이라고 정해 놓고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필름을 넣어 둔 통에 현상액을 부어 둔 채로 몇 시간을 방치했다. 그리고 인화도 하루 종일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인화지를 밤새 인화액에 담갔다고 한다. 금색에 가까운 누런색 사진이 나왔다. 정한 온도와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하는 사진 작업, 붙일 이름이 마땅히 없어 그냥 ‘광호타입’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개인전 ‘지금, 영겁의 얼굴’ 전시작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개인전 ‘지금, 영겁의 얼굴’ 전시작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최광호 작가는 인천을 종종 찾는다. 당연히 인천에 올 때마다 많은 사진을 찍는다. 그의 나이 육십이었던 2016년 7월 인천 선광미술관에서 1970년대 찍은 인천 풍경을 전시한 개인전 ‘1975, 귀향’을 개최한 적이 있다. 최광호 작가는 언젠가는 다시 인천을 주제로 한 작업을 할 생각이 있다고 한다.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사진으로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늘 고민하며 살고 있다”며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정말 완전하게 사진으로 사는 사람이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