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어샷. 주인공이 체어샷으로 대본에 써진 주인공을 이겨요. 우리가 이긴다고요…
아직은 모르는거죠. 대표는 자기가 믿는 걸 현실에서 소송으로 증명하려는 거고,
나는 내가 믿는 걸 소설에서 체어샷으로 증명하려는 거예요
대표는 손끝으로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더니 내게 담배를 한 대 빌리고는 실실 흘리는 웃음 따라 연기를 내뱉었다.
지금껏 들었던 수많은 퇴사 사유 중 기록할만한 내용이네. 진지하게 하는 말이니?
네.
글 쓰는 사람 대 글 쓰는 사람으로 조언해도 될까?
아니요.
나는 네가 가려는 길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아.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시인, 소설가 친구들인 거 너도 봤잖아. 물론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 그런 시대니까. 하지만 다 제쳐두고 진짜 작가가 되려면 네가 품고 있는 질문과 시선이 대중과 공명할 만큼 특별해야 해. 너, 특별하니? 무슨 센터 창작 수업에서 들은 칭찬 몇 마디로 이런 결정을 내리려는 게 아니길 바란다.
서점에서 하는 창작 수업입니다.
등단이 되든 안 되든 어차피 돈은 못 벌어. 그건 알지? 대부분 어떻게 돈을 버는 줄 알아? 피라미드야. 네가 듣는다는 그 창작 수업 선생처럼, 글 쓰고 싶다는 너 같은 애들 상대로 다시 쓸 수 있다며, 다단계 녹즙기 팔 듯이 열정 팔이 해서 입에 풀칠하는 게 그 바닥 현실이야. 그리고 너도 언젠가는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해야겠지. 잘 풀리는 경우를 가정한다 해도 말이야. 네가 가려는 미래가 그래. 준비됐어?
저는 그냥 글을 완성하고 싶을 뿐인데요.
그럼 회사 다니면서 써.
다니면서는 못 써요.
왜.
그게 제 문제니까요.
회사가?
예.
마치 내가 문제라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정말 그만둘 거니?
네.
단호하네. 그래서, 그렇게 완성하려는 건 무슨 이야기인데?
제가 쓸 수 있는 걸 쓸 겁니다.
여기서 좋은 추억만 가져가길 바란다. 이 바닥 좁아. 다 오가며 마주칠 거야. 나는 널 응원해. 부디 내 인맥이 널 돕는 데 쓰였으면 좋겠네.
저는 제가 써야만 하는 걸 쓸 겁니다.
그래. 고생했다. 이번 주까지만 나와.
예.
가끔 얼굴 보자.
조만간 볼 일이 있을 겁니다.
대표는 자기가 마시던 에스프레소 잔에 꽁초를 던져 끄더니 굳은 얼굴로 등기서류를 챙겨 먼저 떠났다. 나는 동네 구인 어플에 접속해 다시 펫시터와의 대화창에 접속했다.
저는 참치를 당신에게 맡긴 사람의 회사 직원입니다. 참치는 당신이 맡기 전부터 수차례 발작을 일으켜 입원 치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대표가 회사 단톡방에 남긴 기록을 모두 모아 정리했습니다.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필요하면 증언을 할 수도 있습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읽음’ 표시가 떴다. 펫시터에게 답장이 온 건 퇴근길 버스 창가 왼편에 앉아 느릿하게 지나는 고궁을 바라볼 때였다.
왜 나를 도와주는 건가요.
나는 이게 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쪽은 어떻게 되나요.
이번 주까지만 일하기로 했습니다.
그만둔 건가요. 나 때문에.
어차피 그만둘 생각이었습니다.
곤란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메일 주소 알려주세요.
정말 곤란한 문제가요.
메일 주소 알려주세요.
펫시터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내가 현관문을 열자 메일 주소를 보냈다. 나는 씻지도 않은 채 바로 책상 앞에 앉아 지금껏 내가 정리한 자료를 보냈다. 발송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가슴 한가운데 얹혀있던 끈적하고 무거운 응어리가 한꺼번에 사라진 것만 같았다. 나는 비로소 한 글자도 쓰여있지 않은 한글 문서를 켜고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2
이곳에서의 지난 1년은 내게 20리터짜리 종량제 봉투에 쑤셔 넣을 수 있는 정도의 짐만 남겼다. 나는 쓰던 머그컵만 챙기고 나머지는 전부 버렸다. 건물 밖으로 나서는 순간 평소와 달리 유난히도 거리가 조용했다. 사람도 없었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옆으로 비스듬히 비춰오는 햇살에 가로수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일요일 아침의 거리처럼, 이상하게 초현실적인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펫시터는 전봇대 뒤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 마주쳤을 때와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펫시터의 손은 멈추지 않고 부산스레 계속 움직였다. 주머니에 넣었을 때조차 집을 잘못 찾아간 두더지처럼 금세 밖으로 나와 코트 깃이나 단추 따위를 의미 없이 만져댔다. 나와 펫시터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정류장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펫시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보내준 자료, 잘 읽었어요.
방금 퇴근하면서 단톡방을 나왔습니다. 이제 다시 못 들어가니까, 그 내용으로 충분하기를 바랍니다.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바쁜가요.
지금 물어보세요.
계속 곰곰이 생각했어요. 왜 나한테 연락한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요즘 제가 창작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창작 수업이요?
네, 소설 창작 수업이요.
아아… 네.
쓰면서 느낀 건데, 내가 어디까지 거짓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해요. 10을 속이고 싶으면 적어도 7은 진실해야 해요. 지금 제가 쓰는 이야기에는 저도 나오고, 그쪽도 나와요.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뭐라고 부르죠?
토이비입니다.
일단 루이입니다. 아무튼, 대표도 나와요. 적도 필요하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니요, 아직 설명을 덜 했어요. 차라리 마주친 적이 없었다면 편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영수증도 아무 생각 없이 들고 있었을 테고, 신용불량자란 말을 들었을 때도 기억하지 못했을 겁니다. 무엇보다 토이비 님이 남긴 글귀도 읽지 않았을 테니까요.
글귀요.
어제는 당신이 고양이를 구했지만.
내일은 고양이가 당신을 구할 겁니다.
네, 그거요.
제가 믿는 말이에요.
안고 있던 고양이는…
아, 치치. 제가 키우던 고양이에요. 1년 전에 죽었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아파요. 그 뒤로 펫시터 아르바이트를 조금씩 했어요. 저는 고양이를 좋아하고, 고양이가 집마다 밝힌 온기를 느끼는 게 좋아요. 물론 모든 고양이가 행복한 건 아니지만.
이런 일을 겪고도 그 말을 믿으세요?
네.
나라면 고양이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텐데.
그 친구는 그냥, 아팠을 뿐이니까요. 그 집에 마지막으로 다녀간 직후부터 줄곧 연락이 왔어요. 너 때문에 참치가 죽고 있다고, 네가 참치를 죽였다고. 처음에 무심코 죄송하다고 말하자, 계속해서 연락이 왔어요. 참치가 거품을 문 사진이나, 동물병원에서 치료받는 사진, 2박 3일 동안 저의 행적을 세세히 캐묻는 장문의 메시지와 저주들… 거기에 대응하다 보니 어느 순간 꼬투리가 잡혀 정말 내가 죽인 것처럼 상황이 변했어요. 무서워서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 사람이 보낸 메시지를 읽고 있으면 질식할 것 같아서 전부 지워버렸어요.
그러면 안 됐는데.
소송장 받은 뒤로는 집 밖으로 안 나갔습니다. 지쳤던 걸까요. 아마도 그랬을 거예요. 줄곧 외면했던 생각도 다시 떠올랐고요.
무슨 생각이요.
부부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아이를 갖듯이 나도 그런 목적으로 고양이에게 의지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요. 거기까지 닿자 어쩌면 정말 내가 고양이를 죽인 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이렇게 끝이구나. 이 사고가 최종선고구나, 그렇게 받아들이려던 차에 루이 님이 보낸 자료를 받은 거예요.
어쩌면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거예요. 대표는 소송을 취하하지 않고, 토이비 님은 패소하고, 고양이는 살아 돌아오지 않고.
그래도 괜찮아요. 고맙다는 말, 하고 싶었어요. 고마웠습니다. 메시지 받고 저번에 마주친 사람이구나, 떠올렸고 보내준 자료 읽어보면서 내 잘못이 아닌 걸 아는 사람이 있구나, 생각했어요.
…
여전히 답은 모르겠어요. 나한테 왜 연락한 건지. 소설을 쓴다고 했죠?
네.
이 이야기를?
그대로는 아니에요. 저만의 메타포가 있어요.
들려줘요.
듣고 싶어요?
내 이야기이기도 하잖아요.
좋아요. 레슬러… 레슬러에 관한 이야기에요. 멕시코 노갈레스 국경 인근의 트레일러 파크에 사는 한 레슬러가 있어요.
…레슬러랑 멕시코라고요?
네, 끊지 말고 들으세요. 주인공의 링네임은 저스트에요. 등에 문신으로 링네임을 저스티스(Justice)라고 새기려다가 아파서 저스트(Just)까지만 새겨서 저스트에요. 중요한 건 아니지만… 여튼 주인공은 주중에는 알로에 농장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링에 올라요. 얼굴이 못생겨서 가면을 써야 하고, 변변찮은 악역만 맡아서 매번 두들겨 맞아요. 좋지 않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어 알로에 농장에서나 링에서나 전부 제대로 된 보수를 받지 못해요. 링 밖의 진짜 인생이나, 링 안의 가짜 대본에서나 큰 차이가 없는 거죠. 주인공이 사는 이유는 오직 하나,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 때문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고양이가 집을 나가요. 삶에 의욕을 잃은 주인공은 밭에서 알로에 수확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고, 십장은 그날의 일당을 주지 못하겠다고 말해요. 주인공은 대들어보지만 얻어터지고 돈도 받지 못하고 트럭 뒷자리에도 앉지 못한 채 집까지 걸어가요. 한참을 걷다가 마테차 파는 여자를 만나요. 주인공은 돈이 없다는 걸 숨기고 마테차를 마시고, 또 또르띠야까지 먹어요. 다 먹고 천연덕스럽게 떠나려는데 여자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주인공을 붙잡지 않아요. 주인공이 왜 자기를 붙잡지 않냐고 묻자, 여자는 자기도 그런 적이 있다고만 대답해요. 주인공은 주말에 링에 올라요. 언제나처럼 얻어터지는 역할이에요. 얻어터지다가 객석을 보니 인력대기소 소장과 레슬링 협회장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그 순간 주인공은 뭔가… 대본에서 벗어나 충동적으로 약속되지 않은 플레이를 하기로 결심해요. 그런 내용입니다.
이게… 우리 얘기인가요? 완성했어요?
아뇨. 하지만 결말은 정해놨어요.
주인공이 뭘 하는데요?
…체어샷이요.
체어샷.
체어샷. 주인공이 체어샷으로 대본에 써진 주인공을 이겨요.
우리가 이긴다고요.
정확히 저나 토이비 님이 이기는 건 아니죠. 아무튼 그래요.
현실이랑 달라도 그냥 쓰는 거죠?
아직은 모르는 거죠. 대표는 자기가 믿는 걸 현실에서 소송으로 증명하려는 거고, 나는 내가 믿는 걸 소설에서 체어샷으로 증명하려는 거예요. 설령 소송에서 진다고 해도 토이비 님이 틀렸다는 건 아니니까, 토이비 님은 저랑 상관없이 끝까지 싸웠으면 좋겠습니다.
…버스가 와요.
이제 갑니다.
떠나면 다시는 안 올 건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버스에 탔다. 토이비가 뒤에서 말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거죠? 체어샷을 한 다음에는요! 고양이는요!
젠장, 저도 몰라요. 어떻게든 되겠죠.
문이 닫히고, 버스는 출발했다. 토이비는 그 자리에 붙박힌 채 점점 멀어져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뒤통수에 달라붙은 시선은 전혀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
마지막 소설 창작 수업을 모두 마친 다음 날, 나는 또렷한 정신으로 잠에서 깬 채 오늘이 주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곱씹었다. 더 이상 출근할 곳은 사라졌고, 내가 쓰던 소설도 어제의 합평을 기점으로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었다. 나는 밖으로 나와 걸었다.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을 잘 때를 제외하면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두 가지뿐이다. 글을 쓰거나, 걷거나. 해결되는 건 없다. 언제나처럼 발걸음으로 생각을 반죽하다, 한발 한발 쌓인 피로가 나를 짓누르면 잠시나마 잡념에서 해방될 뿐이다.
어제 수업을 마치고 다른 일정이 없던 나는 같은 처지의 선생과 영양사와 함께 맥도날드에서 뒤풀이를 했다. 늦은 밤이라 아르바이트생들은 지쳐 보였고, 넓은 가게 2층에는 얼음만 남은 콜라를 빨대로 반복해서 빨아대며 조훈현과 이창호의 바둑 기풍에 대해 토론하는 노인 둘이 전부였다. 선생이 트레이에 음식을 받아 조심조심 걸어오는 모습을 보며 문득, 그가 동료처럼 느껴졌는데 왜 그렇게 느낀 것인지는 설명하지 못하겠다.
거리는 어둠에 잠겼고, 검은 차창은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사해 우주에 지금 이 공간만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선생은 이제 자신을 선생이 아닌 동료로 여겼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나와 영양사는 선생을 끝까지 선생이라고 불렀다. 선생은 소설 말고 다른 화제로 이야기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우리는 소설로 엿본 서로의 모습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결국 소설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영양사의 소설이 마음에 들었다. 전후 사정을 알고 읽긴 했지만 묘한 이야기였다. 거식증을 앓는 주인공이 아파트 화단의 가시나무를 뽑아와서 집에서 키운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먹고 토하며 싸우고, 가시나무는 자란다. 마침내 영양사가 말했던 기억을 대면하고 소화할 수 있게 되자 주인공이 가시나무를 어딘가로 심으러 가며 소설은 끝난다.
이야기가 뻗어나갈 수 있는 방향에 대해 열정적으로 떠드는 내가 부담스러웠는지 영양사는 선생에게 지금 무슨 이야기를 쓰고 있냐고 물으며 화제를 돌렸다. 선생은 개를 산책시키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답했다. 그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대신, 충분히 안에서 발효되기 전에 남들에게 앞으로 쓸 이야기에 대해 말하면 거기서 생긴 구멍으로 마법 같은 공기가 다 새어나가 결국 이야기를 쓸 흥미를 잃게 된다며 자기는 여전히 소설 쓰기에 대해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서 나쁠 것이 없다고 말했다. 또 선생은 창작 수업을 하기로 했던 결정을 수업하는 내내 후회했다고 말했다. 나의 추측처럼 수강생이 너무 적게 들거나, 내가 쓴 소설이 기대 이하여서는 아니었다. 그저 우리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자기도 갖고 있지 않은데 가르친답시고 뭔가를 말해야 하는 상황을 반복해서 마주하는 게 무서웠다고 말했다.
나는 이야기를 완성하고 일을 그만뒀는데 기분이 개운하지 않다고, 이런 찜찜한 기분은 내가 잘못된 결말에 다다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실직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일을 그만뒀다는 말에 선생은 당황했다. 선생은 혹시 이 수업 때문에 그만둔 거냐고 물었고, 나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관련이 없지는 않다고, 일을 그만둬야 균형이 맞는 것 같아서 그랬다고 답했다. 놀랍게도 영양사도 일을 그만뒀다고 고백했다. 물론 그녀의 경우에는 쓰던 소설 때문은 아니고, 몸이 약해져서 좀 쉬면서 글도 좀 써보다가 나중에 다시 똑같은 영양사 일을 할거라고 덧붙였다. 선생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다가 대뜸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대표가 했던 피라미드와 다단계 비유를 인용하며 우리가 미래를 몰랐던 건 아니니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농담했고, 선생은 더없이 정확한 표현이라며 웃었다.
우리는 모두 현실에서 패배했으면서 각자의 후회를 소설로 바로 잡으려 했고, 우연의 일치인지 뭔지 그 과정에서 전부 직업을 잃었다. 결국 소설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그렇게 대화는 흩어졌고, 나는 적당한 끝인사도 하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생의 대걸레가 발밑으로 들어올 때쯤 둘과 헤어졌다.
나는 갈 곳이 없었지만 계속 걸었다. 혼자 걸을 때마다 누군가가 나를 따라온다. 앞서가는 것도 아니고 보폭을 맞춰 걷는 것도 아니다. 조금 처진 채 나를 따라온다. 형태는 자주 바뀐다. 이어폰을 껴도 그의 말이 들린다. 최근에는 복면 차림의 저스트가 오른손에 접이식 의자를 쥔 채 나를 따라온다. 그는 레슬러고, 덩치가 나보다 훨씬 큰 데다가 웃장을 깐 상태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만 같다. 나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고백했다.
펫시터와 다시 만나지 못했어.
그는 스페인어로 말했지만 이어폰에서 더빙된 목소리가 들렸다.
알아.
넌 내가 부끄럽겠지.
네가 네 삶을 용납할 수 있었다면,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어. 전화가 올 거야. 잘 받아.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야.
그의 말대로 전화가 왔다. 저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망설이다가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배은망덕한 새끼.
네.
이럴려고 그만뒀냐? 내 등 뒤에 칼 꽂으려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을 골랐다. 닫힌 눈꺼풀 위로 오전의 짙은 햇살이 심장박동 따라 붉게 비쳤다. 핸드폰에선 머리끝까지 열받은 대표가 욕을 퍼붓는 소리가 노이즈처럼 끊이지 않고 작게 들려왔다. 나는 상상했다. ① 자리에서 일어난다. ② 앉고 있던 의자를 접는다. ③ 의자를 들고 목표에게 걸어간다. ④ 의자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다음, 힘껏 휘두른다.
아직 퇴직금이 안 들어왔던데 이번 주까지 입금해주세요.
나는 전화를 끊었다. 공원 한가운데에서 길은 어디로든 뻗어 있었다. 저스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다른 전화를 기다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