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묘한 구성 드러내며 ‘자기타파’의 과정을 과감히 선행”
본심에 오른 작품들 간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던 것은 저마다의 특색과 장점 그리고 실력을 고르게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고 따라서 두루 기쁜 일이겠으나 심사자는 그만큼 더 깊은 고민에 빠져 미세한 차이까지 짚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종 논의를 세 작품으로 줄이는 데도 끝까지 신중을 기했다.
‘구제’는 무엇보다 재미가 있었다. 일본인 남성 청바지 하나가 엮어내는 우연의 연쇄, 우연을 바탕으로 하여 발생하는 관계의 인드라망, 우연과 관계가 직조해 내는 존재(Sein) 자체의 양상을 이토록 경쾌하고 흥미롭게 서술해 낸다는 게 놀라웠다.
산문의 재치와 시의 웅숭깊음까지는 좋았으나 순환 혹은 연기론의 가없는 세계관의 개입은 외려 소설을 관념에 가둔다는 인상을 주었다.
‘더미’는 차분하고 단단하다. 익숙하게 흘러가는 우리의 삶이 무심코 묻어버리는, 그러나 묻어서는 안 되는 것들까지 묻어버리며 다 그런 거지, 뭐가 어때서? 라고 묻는 우리에게 날카로운 쇠붙이를 들이대듯 가책하는 소설이다.
현실적 삶의 편의성과 공모하여 자신마저 속이다 끝내는 망실해 가는 우리에게 울리는 경종과도 같은 이야기지만 바로 그 경고의 ‘선명성’이 소설에서는 외려 경계해야할 대상이 된다.
‘체어샷’은 소설이라는 것으로 현실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써 이야기의 거푸집을 삼고 있기는 하지만 실은 누구나 맞닥뜨리고 있는 다양한 현실 문제를 포괄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펫시터, 영양사, 루이, 소설 강사가 직업은 다르지만 좀처럼 타파할 수 없는 현실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타파라고 했거니와 이 작품은 문제의 극복을 ‘깨트려버림’에서 찾고 있는데 의자를 들어 상대를 쳐부수는 프로 레슬링의 ‘체어샷’를 인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타파의 대상이 당연하게도 괴랄한 회사 대표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보다 먼저 전제되어야 할 타파의 대상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절묘한 구성이 드러난다.
끝내는 신과 타협한 욥을 비웃으며 죽음이라는 파국에 자신을 내던진 ‘필경사 바틀비’의 바틀비처럼, 루이는 그것이 반성이든 자기부정이든 파국이든 의자를 들어 ‘자기타파’의 과정을 과감히 선행한다.
소설 쓰기 과정을 통해 루이의 삶에 노정되는 체어샷의 이러한 양방향성은 웬만한 통찰과 솜씨로는 그려내기 힘든 시도였음에도 ‘체어샷’은 믿음직스럽게 그것을 해냈다고 보았다. 당선자와 응모자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