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보면 이끌리듯 안쪽 공간으로…
웅장함 대신 송도 센트럴파크에 녹아들어
산책로 끝자락엔 입구, 자연스런 동선 자랑
극대화 된 연결성 “관람객 유입에 큰 역할”
인천 송도국제도시 중심에 위치한 송도센트럴파크를 걷다보면 물결치듯 부드러운 곡선 형상을 한 흰색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서서 보면 조형물이 아닌 거대한 벽체임을 알 수 있는데, 성인 남성 평균 신장의 2배를 웃도는 높이인 이 벽체는 곡선을 이루며 발걸음을 이끈다. 벽체를 따라 걷다가 마주한 산책로의 끝에서야 이곳이 박물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연면적 1만5천650㎡,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지난 2023년 완공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인천에 들어선 첫 번째 국립박물관이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건물 외관은 다른 여느 박물관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국내 주요 박물관·전시관은 웅장한 외관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지만, 세계문자박물관은 마치 송도센트럴파크 일부처럼 설계됐다. 각양각색 외관을 지닌 마천루가 즐비한 송도국제도시에서 웬만한 크기의 건축물은 눈에 띄기 어려운데, 이곳은 웅장함 대신 공원에 녹아드는 자연스러움을 택했다.
■ 주변 산책로와 연결되는 동선…곡선 따라 이어지는 발걸음
높은 곳에서 송도센트럴파크를 바라보면 눈에 들어오는 특징이 하나 있다. 공원 내 산책로가 구불구불 곡선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인근 해돋이 공원이 직선형 산책로로 이뤄져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세계문자박물관 디자인도 공원 산책로에서 출발한다. 박물관보다 먼저 조성된 송도센트럴파크 경관을 해치지 않고 어울릴 수 있도록 설계가 이뤄졌다. 공원 내 호수와 나무, 잔디와 이질감이 없게끔 건물 외형을 잔디로 덮은 이유다. 호수를 배경으로 시야가 트인 송도센트럴파크에서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원 본연의 장소성을 지키는 동시에, 산책 나온 이들이 저절로 박물관에 도달하게끔 동선을 구상했다.
산책로 끝에는 박물관으로 들어서는 문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선형의 계단이 나타난다. 하얀 벽체를 따라 들어온 산책로가 알고 보니 박물관의 지붕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로비로 접근할 수 있는 구조인데, 공원을 산책하다가 2층 출입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박물관의 전시공간으로 들어오게 되는 동선이 구현돼 있다. 박물관의 1층 출입구도 나선형 계단을 통해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되는 등 전반적으로 곡선이 두드러진다.
외관과 마찬가지로 내부 전시공간도 곡선이 주를 이루고 있다. 곡선의 벽체를 타고 들어가 문자의 역사를 찾아가는 경험을 하도록 설계 과정에서 의도된 동선이다. 전시 공간을 직선으로 설계하면 딱딱한 인상을 줄 수 있고, 일상적인 공간인 공원에서 박물관으로 들어왔을 때 위화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최대한 배제한 것이다. 송도센트럴파크와 박물관의 동선뿐 아니라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경험도 곡선처럼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서 배어난다.
■ 두루마리 종이서 착안한 박물관 디자인
지난 2017년 9월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국제설계 공모를 진행해 (주)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가 출품한 ‘Pages(페이지스)’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시 국제설계 공모에는 한국의 22개 팀을 포함해 총 40개국 126개 팀이 작품을 제출하는 등 경쟁이 치열했다.
당시 국제설계 공모 심사위원회는 페이지스를 당선작으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박물관이 인천 송도센트럴파크 내에 지어지는 단순한 건물이 아닌 하나의 조형물로 느껴지도록 해 주변과 어우러지고, 내외부 곡선 벽체를 통해 이용자들에게 공간에 대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페이지스의 핵심은 박물관 지붕이자 산책로에 해당하는 공간에 설치된 하얀 벽체다. 산책로 양옆에 설치된 벽체는 곡선을 이루며 이곳을 찾은 사람들을 박물관으로 안내한다. 하얀 바탕은 박물관 내부에도 똑같이 적용돼 있는데, 문자와 뗄 수 없는 관계인 하얀 종이에서 영감을 얻은 콘셉트다.
흔히 ‘종이’를 떠올리면 직사각형 형태의 A4 용지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곡선에 초점을 맞춘 페이지스는 조선 시대에 볼 수 있었던 두루마리 종이나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에서 쓰인 양피지(양·염소·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기록매체)처럼 둘둘 말린 형태를 펼쳐 세운 모습의 벽체를 설계했다. 공원의 조형물이자 문자박물관의 초입으로 들어선 이들에게 물리적 공간감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벽체가 만든 공간은 자연스럽게 야외 전시공간으로 활용된다. 박물관 내부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누구든 일상에서 문자를 접할 수 있다.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공원의 풍경에 어울리는 전시를 통해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곳이기도 하다.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의 페이지스는 지난해 세계 3대 디자인상으로 평가받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디자인상 본상을 받기도 했다.
작년 112만명 방문, 주민들 꾸준히 찾아와
두루마리 형태서 착안한 디자인 ‘페이지스’
희고 거대한 벽체따라 ‘문자의 역사’ 안내
■ 한 해 100만명…‘문자 플랫폼’ 거듭난 세계문자박물관
페이지스 콘셉트를 통해 실내와 외부의 연결성을 극대화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개관 직후부터 그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지난해에만 112만5천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는 등 누적 관람객이 172만명에 달한다. 하루 평균으로 환산하면 약 3천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간 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제외한 전국 13개 지역 국립박물관의 2023년 평균 관람객(48만여명)과 비교하면 2배를 훨씬 넘는다.
송도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뿐 아니라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방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박물관 1층에 만들어진 어린이체험실에서 전시와 연계해 진행되는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도 호응도가 높다. 김동현 박물관 홍보디자인부 대리는 “설계 의도처럼 공원과 박물관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이 관람객 유입에 큰 효과를 내고 있다”며 “주말에 공원을 찾은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다”고 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프랑스 샹폴리옹박물관, 중국문자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문자박물관이기도 하다. 샹폴리옹박물관이 이집트의 상형문자, 중국문자박물관이 갑골문자와 한자 등 특정 문자 위주로 전시하는 것과 달리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55종의 문자를 전시해 차별화를 꾀했다.
지난해 10월에는 ‘동서 디반 박물관 국제페스티벌’을 개최해 기획특별전 등 문자 작품 전시를 비롯해 국제학술대회와 큐레이터 포럼 등도 진행했다. 전 세계 문자 유물을 소개하는 전시 거점뿐 아니라 문자 전문가들의 교류를 위한 플랫폼으로 기능하겠다는 구상이다.
/한달수기자 dal@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