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수초 3학년때 간식 끌려 양궁 입문
고된 근력 훈련… 1년뒤 처음으로 활 잡아
“텐, 텐, 텐, 텐, 텐, 텐!”
2025년 첫 아임프롬인천 주인공은 양궁 선수 이우석(27)이다. 그는 2024 파리올림픽 남자 양궁 단체전 결승전에서 6연속 10점을 따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인천 만수북중 2학년 재학 시절 양궁 국가대표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뒤 햇수로 15년이 지났다. 꿈에 그리던 올림픽 무대에 서기까지 과녁을 향해 날린 수많은 화살이 있었다. 정중앙에 맞지 않으면 ‘될 때까지 한다’는 마음으로 연습량을 늘렸다. 이우석은 자신의 노력을 의심하지 않는 ‘교과서’ 같은 선수다.
■ ‘간식’이 이끈 양궁과의 첫 만남
이우석은 1997년 충남 서산 출생이다. 태어나자마자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큰 병원으로 가 보라”는 의사 말에 찾아간 곳이 가천대 길병원이었다. 심장 수술을 받고 병원 치료를 이어가야 했다. 아무 연고가 없는 인천에 정착했고, 남동구 만수동이 이우석의 ‘고향’이 됐다.
몸이 아팠지만 활발한 아이였다. 다행히 인천에서 건강을 회복해 인천인수초 2학년 때 기계체조를 배웠다.
‘양궁부 모집. 치킨, 피자, 라면 등 간식 제공’.
이우석은 초등학교 3학년 승급을 앞둔 겨울 양궁부 모집 공고에 마음을 빼앗겼다. 어릴 적 몸이 아팠던 그에게 의사는 성인이 될 때까지 음식을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고, 부모는 아들이 군것질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간식을 먹고 싶다는 마음에 양궁부에 입단했다.
입단 첫해 고된 기초 훈련이 시작됐다. 활시위를 당기는 팔 근육을 기르기 위해 ‘팔에 고무줄 끼우고 당기기’ ‘팔 굽혀 펴기’ 등을 반복했다. 초등학교 아이에게 고된 훈련이었지만 이우석은 우직하게 임했다. 1년간의 훈련을 이겨낸 이들만 활을 쏠 수 있었다. 함께 양궁을 시작한 20여 명 중 이우석을 포함한 3명만 남았다.
“기초 체력을 다지는 기간 중 다른 친구들이 다 떨어져 나갔어요. 그 훈련은 양궁을 할 사람과 안 할 사람을 분류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훈련을 마치고 첫 활을 쐈을 때 기분은 ‘신기하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출전한 첫 대회에서 하위권 성적을 기록했다. 이우석은 양궁부 공식 훈련 외에도 매일 1~2시간씩 개인 훈련을 늘려 실력을 키웠다. 묵묵히 훈련에 임한 결과는 성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9년 전남 순천에서 열린 제38회 전국소년체육대회 ‘양궁 남초 20m’에서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국가대표’를 향해 조준
만수북중에서 실력 만개… 국가대표 꿈꿔
선인고 시절 전국체전 휩쓸어 ‘신궁’ 별명
묵묵히 양궁을 하던 소년이 본격적으로 양궁에 몰입하게 된 계기는 언제였을까. 그는 만수북중 2학년 시절 자신을 회상한다.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양궁 실력의 포텐이 터지기 시작했는데, 집안 형편은 점점 더 어려워졌어요. ‘양궁으로 벌어 먹고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게 그때였어요. 운동을 업으로 삼고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나 양궁 좀 한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국가대표’라는 큰 목표가 있으니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꾸준하게 좋은 성적을 내왔던 이우석의 실력은 남다르게 향상됐다. 대회에서 받은 상금 10만원이라도 모두 부모님께 드렸다. 그 마음이 갸륵해서 부모님은 아들이 받은 상금을 한 번도 쓰지 못했다.
“실력이 좋아지고 활이 10점에 맞을 때 재미도 있었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습니다. 운동이란 게 어떤 날은 잘 안 될 때도 있잖아요. 그런 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그럴수록 밤 늦게까지 개인 훈련에 더 매진했습니다.”
2013년 선인고 양궁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간 그는 ‘신궁(神弓)’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해 인천에서 열린 제94회 전국체전 양궁 남고부에서 90m를 제외한 30·50·70m와 개인전·단체전까지 휩쓸었다. 중학교 양궁부에서 훈련했던 거리는 60m였기에 70m와 90m를 경험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인천 양궁의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선인고가 양궁부를 해체했지만, 당시 양궁부를 창단한 인천체고가 이우석에게 손길을 내밀어 양궁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인천체고에서도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실업팀 ‘코오롱 엑스텐보이즈’가 2014년 고교생 이우석에게 입단 제의를 했을 정도다.
올림픽 양궁 국가대표 감독 출신 서오석(67) 코오롱 엑스텐보이즈 감독은 이우석의 중학생 시절부터 그를 눈여겨봤다. “활 쏘는 자세, 슈팅 감각, 운동 신경을 보면 이 선수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이다 감이 와요. 이우석이 딱 그런 선수였어요.”
인천체고 졸업 후 코오롱 엑스텐보이즈에 입단한 이우석은 서 감독과 함께 ‘양궁의 질’을 높이는 훈련을 했다. 서 감독은 “우석이는 학교 양궁부에서 연습량이 엄청났다. 실업팀에 와서는 슈팅을 섬세하게 조절해 가며 연습했는데 코치하는 대로 실력이 쑥쑥 늘었다”면서 “좋은 성적을 내도 다른 물이 들지 않는, 양궁 실력뿐 아니라 마음가짐이 좋은 선수였다”고 했다.
■ 두 번의 실수는 없다
2014년 첫 국대, 리우 선발전 4위로 고배
도쿄 출전권 따냈지만, 코로나로 재선발
다시 탈락… 악착같은 훈련후 파리 입성
이우석은 2014년 국가대표로 처음 선발됐다. 양궁 국가대표는 여러차례 선발전을 치른다. 세 차례의 선발전으로 최종 8명에게 국가대표 자격을 부여한다. 이들은 매해 열리는 국제대회의 출전권을 따내기 위한 평가전을 치른다. 2014년 8위 성적으로 처음 국가대표팀에 소속된 그는 태릉선수촌에 입소했다. 국제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오진혁, 김우진 선수 등과 함께 훈련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스스로 다짐한 목표가 달성된 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올림픽 출전’으로 목표가 갱신됐다.
“김제덕 선수가 들어오기 전까지 대표팀에서 계속 막내였어요. 선수촌 훈련 환경은 학교와 달랐습니다. 어린 마음에 활을 쏘다가 화를 내거나 하면 감정 표현을 자제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고, 생활면에서 많이 다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선배들과 함께 국가대표 훈련을 하며 일찍 어른스러워졌던 것 같습니다. ”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대한민국 양궁. 이우석은 2014년부터 매해 국가대표팀에 소속됐지만 올림픽 출전과는 쉽게 연이 닿지 않았다. 2016년 리우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평가전에선 4위로 아쉽게 떨어졌다. 군 입대 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김우진 선수가 개인전 금메달을, 이우석은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국제대회에서 한국 선수와 마주할 때가 더 긴장돼요. 실력이 좋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서로를 더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금메달을 놓쳐서 아쉽진 않았어요. 큰 국제대회를 나간 것이 처음이기도 했고, 선배 김우진 선수와의 경기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깨끗하게 받아들였습니다. ”
2019년 11월 전역한 이우석은 세계선수권대회, 월드컵,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메달 사냥을 이어갔다. 2020년 개최 예정이었던 도쿄올림픽 출전권도 따냈다. 하지만 코로나19 영향으로 1년 연기됐고, 새로 치른 선발전에서는 탈락해 도쿄올림픽 무대에 서지 못했다.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준비를 많이 했었고, 실력을 많이 끌어 올린 시기라 당연히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출전이 불발되면서 번아웃이 왔습니다. 그 여파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계속 있으니까 몸이 안 좋아지기도 했어요.”
2022년 개최 예정이었던 항저우아시안게임도 한 해 연기됐다. 대회를 앞두고 열린 선발전에서 이우석은 4등으로 출전권을 따낸 상황이었다. 새롭게 선발전에 참여해야 했다. 도쿄올림픽 선발전 탈락 설욕의 기회였다. ‘이번에 떨어지면 운동을 그만하겠다’는 각오로 훈련에 임했다.
단체 ‘6연속 10점’… 올림픽 금메달 명중
“인천의 아들 감사, 선배 김우진 업적 목표”
양궁 인생을 건 악착같은 훈련은 효과를 봤다. 이전 선발전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항저우아시안게임 본 무대에선 혼성·남자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동메달 등 좋은 성적을 거뒀다. 기세를 이어 2024년 파리올림픽 출전권도 따냈다.
꿈에 그리던 올림픽 무대에 선 이우석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했다. 특히 남자 단체전 결승에선 여섯 발 연속 10점을 쏘며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 발 한 발 쏘다 보니 연속으로 10점을 쐈던 것 같아요. 당시엔 ‘내 역할을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만 있었고, 화살을 쏘고 난 뒤에는 다음 사수였던 김제덕 선수에게 ‘바람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시합에 임해 점수에는 집중을 못 했던 것 같아요.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연속으로 10점을 쐈다는 걸 알아차릴 정도였어요.”
파리올림픽 남자 단체팀은 팀워크가 좋았다. 맏형 김우진 선수는 팀의 방향을 이끌고, 막내 김제덕 선수는 팀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둘째 이우석은 두 선수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고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중간다리 역할을 맡았다.
■ ‘인천 대표’ 양궁 선수 이우석
이우석은 지난해 12월9일 인천체고를 찾아 후배들은 만났다. 그는 성공의 비결보다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 경험을 들려줬다고 한다.
“인천을 떠나 경기도 안산에 있는 팀에서 활동하고 있는데도 많은 분이 여전히 ‘인천의 아들’이라고 불러 주셔서 감사하죠. 내 고향 인천을 대표하는 선수로 기억해 주셔서 뿌듯합니다. 인천은 저에게 ‘시작과 끝’인 곳이에요. 양궁을 시작하게 된 곳이고, 제가 다른 도시에서 활동을 해도 이름 앞에 계속 남아 있을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파리올림픽 이후 새로운 목표를 향해 활시위를 당긴 이우석. 다음 목표는 어느 과녁을 향해 있을까.
“파리올림픽을 마치고 바로 새로운 목표를 세웠습니다. 이제는 너무 멀리 가버린 김우진 선수의 업적을 따라잡기 위해 더 열심히 고군분투하면서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차근차근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