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강탈·침탈 과정서 찍힌 땅… 빼앗기고 끌려간 고통의 기억들
애국지사 민영환 농장인 목양사 가로채
일본 조병창·주한미군 병참기지로 쓰여
사진 없이 제목만 붙어있는 빈 캔버스들
타국에 의한 시각으로 저장 못한 역사들
인천 부평아트센터 갤러리 꽃누리에서 진행 중인 부평 역사 아카이브 사진·영상 전시 ‘부평; 땅, 사람 그리고 역사’는 자료화된 부평 평야의 기억을 발굴해 담았다. 부평 평야는 1900년대 농장 목양사에서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의 연습장(훈련장)으로,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한반도 최대 군수공장 일본육군조병창으로, 해방 이후 주한미군 병참기지 애스컴시티(ASCOM City)로 바뀌었다.
모씨네 사회적협동조합이 인천시 ‘부평 캠프마켓 아카이브’ 사업으로 미국 국립공문서관 등 국내외에서 발굴한 자료와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자료 등으로 구성한 부평 땅의 기록은 ‘빼앗김’과 ‘끌려감’의 역사다.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자결한 애국지사 민영환(1861~1905)의 농장 목양사를 대표적 친일파 송병준(1857~1925)이 가로채 일본에 넘겼다. 일본은 부평 땅을 용산기지에 주둔한 부대의 군사 훈련 장소로 썼다. 전쟁이 심화하자 한반도 병참기지화의 핵심 시설인 조병창을 조성해 조선인들을 노동자로 강제 동원했다. 해방 직후 조병창 보안대에 속한 조선인들이 조병창 내 풍송구금소에 구금됐으며, 미군 부대 건설 과정에 노동자로 동원되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군사 기지였던 주한미군 ‘캠프 마켓’ 땅은 현재까지도 온전히 반환되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가로와 세로 각각 2m45㎝의 초대형 항공사진(1946년 미군 촬영)은 부평 땅의 쓰임을 세세하게 살필 수 있게 한다. 1930년대 말까지 일본이 조성하려던 ‘인천공창’ 구상은 조병창으로 확대된다. 1939년 작성된 ‘가칭 인천공창 평면도’와 1941년 ‘인천육군조병창 평면도’는 조병창이 구체화되는 과정을 비교할 수 있다. 최초로 공개되는 자료들로, 과거 부평 평야의 하천 지형까지 표기돼 있다.
하얗게 칠해진 빈 캔버스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민영환 목양사 탈취 재판 모습’ ‘부평의 수해와 물에 잠긴 집들’ ‘미군 위안부의 생활’ 등 제목만 붙어 있다. 전시를 기획한 모씨네 사회적협동조합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진과 영상은 문자 매체와 달리 ‘기억의 원초적’ 매체로서 우월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두 매체는 국가, 개인, 집단에서 어떻게 소비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일부 사건이나 활동을 감추거나 배제하기 위해 특정한 자료에 한해 사각(死角)이 발생한다. 자료는 규칙 또는 법 제도화(매뉴얼), 강요된 시각(視角)과 사각에서 저장되지 못한 기억으로 존재한다. 자료의 비균형은 극단적 폭력과 강탈·강제 침탈 과정에서 발생한다.”
타국에 의해, 군사적 목적에 의해 기록된 부평 땅의 사진과 영상에서 정작 그 땅에서 삶을 꾸린 부평 사람들의 활동 모습은 찾기 어렵다. 소멸되거나 감춰졌다. 전시장에 걸린 빈 캔버스는 존재하고 발굴됐어야 하지만, 현재 존재하지 않거나 찾지 못한 자료들이자 그 목록이다. 미군이 촬영한 1945년 10월에서 1948년 사이 부평 미군기지 건설 현장 사진에서야 부평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촬영자의 초점은 노동자로 참여한 부평 사람들이 아닌 공사 현장에 맞춰졌다. 사람은 작업 모습에서 곁다리로 등장하거나 건물의 크기를 가늠하기 위한 피사체일 뿐이다. 전시는 오는 25일까지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