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처럼 알알이, 오름처럼 둥그런… 제주 녹빛 두른 한 송이의 포도라네

 

재일동포 이타미 준, 한국 이름은 ‘유동룡’

40년 넘게 한·일 무대, 돋보이는 전통·자연美

제주 7대 건축물, 제2 고향땅서 열정 불태워

 

내부엔 작은 올레길 형성, 열림과 닫힘 표현

뻥 뚫린 중정 ‘캐스케이드’ 날씨 변화 볼수 있어

땅과 바람에 맞서지 않도록 ‘조화로운 설계’

제주 포도호텔 전경.
제주 포도호텔 전경.

재일동포 이타미 준(伊丹潤·한국명 유동룡·1937~2011). 제주 건축의 중심에는 그가 존재한다.

자연과 조응하는 예술적 건축을 한라산 중산간에 구현한 세계적인 건축가. 한국 이름보다는 이타미 준이란 일본식 이름으로 더 알려졌고 일본에서 활동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귀화하지 않고 ‘경계인’으로 살았다.

서귀포시 안덕면 상천리. 남쪽으로 멀리 산방산과 중문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한라산 중산간에는 그가 남긴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몰려있다. 핀크스 골프장의 부대 호텔인 포도호텔이 대표적이다.

■ 제주 특유의 자연환경에 녹아들다

핀크스 클럽하우스 내에 위치한 포도호텔은 2001년 개관했다. 여러 채 모여있는 모양이 꼭 포도송이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1층 단층 구조인 포도호텔의 외관은 한 송이의 포도를 연상케 한다. 이타미는 제주의 오름과 집에 착안했다.

제주도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오름과 제주 전통 초가의 지붕선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자연미 자체였다. 그래서 어느 곳 하나 딱딱한 부분이 없다.

호텔 내부에는 작은 올레길을 만들어 문과 창문으로 열림을, 벽과 코너로 닫힘을 표현했다.

포도호텔은 투숙객이 미처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건축가의 의도를 알려주기 위해 가이드도 제공된다.

실제로 이타미는 이 호텔에 ‘해방’ ‘열다’ ‘닫다’ ‘혼재한다’ 등의 단어를 이미지화하고 형상화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건축가가 자연을 결코 거스르지 않은 건물인 동시에 외부의 자연을 내부로 끌어들이려 한 노력이 특히 돋보인다.

건축가의 이 같은 의도가 잘 드러난 곳이 바로 호텔 중앙에 위치한 ‘캐스케이드’다.

호텔의 중정에 해당하는 옹달샘이라는 뜻의 캐스케이드는 동그랗게 뻥 뚫린 천장 아래 유리관에 흙과 꽃이 있는 만큼 투숙객은 밖에 나가지 않아도 호텔 안에서 날씨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포도호텔 측은 “객실 하나하나가 포도송이처럼 연결되고 공간 곳곳에 하늘과 밖을 향해 열린 캐스케이드와 창·테라스가 있어 경계와 공존, 숨김과 자유로움, 닫힘과 열림이라는 콘셉트를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호텔은 제주의 아름다운 7대 건축물로 선정돼, 제주도 ‘건축문화기행’ 1번지로 통한다.

제주 포도호텔 전경.
제주 포도호텔 전경.

■ 제주를 사랑했던 재일교포 건축가

유동룡은 한국인 최초로 2003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받았고 일본의 최고 건축상인 무라노도고상, 아시아 문화환경상 등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시즈오카현의 시미즈에서 후지산과 바다를 보면서 자란 이타미 준은 조센징이라 무시당하며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고뇌를 갖고 살아야 했다.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자란 이타미 준은 각각 공항 이름과 친구의 예명에서 각각 따온 필명이다.

그는 평생을 재일동포가 아닌 한국인으로, 이타미 준이 아닌 유동룡으로 살기를 원했다.

작품을 발표할 때나 항공기를 이용할 때 일본에서 쓰이지 않는 활자인 그의 성 ‘유’자 때문에 곤란을 겪다 이타미 준이라는 예명을 지었다. ‘이타미’는 처음 비행기를 이용했던 공항 이름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끝까지 귀화하지 않고 한국 국적을 지켰다.

일본 시즈오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타미 준은 여행과 예술가들을 통해 건축에 입문했다. 조형의 순수성과 소재 자체를 강조하며 날것의 감각이 돋보이는 무겁고 원시적인 건축을 추구했다.

일본 무사시 공대 건축학과를 나온 그는 1968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뒤 한국 고건축에 매료됐다.

40년 이상 일본과 한국 등을 무대로 한국의 전통미와 자연미를 살린 건축물들을 지어왔다.

그가 제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8년, 재일교포 사업가 김흥수 회장의 의뢰로 제주도 핀크스(PINX)클럽하우스를 설계하면서다.

제주와 인연을 맺은 그는 핀크스 리조트 단지 안에 포도송이를 연상시키는 지붕 아래 제주의 전통가옥을 옮겨놓은 듯한 포도호텔을 설계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물·바람·돌 미술관, 비오토피아 타운하우스, 방주교회 등을 설계했다.

2009년부터는 제주영어교육도시 개발사업 관련 건축 총괄책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제주 섬의 독특한 풍경과 바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하늘의 흐름, 신선한 공기가 그의 마음을 붙잡았다.

뛰어난 실력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던 제주에서 마지막 열정을 불살랐다. 제주도를 제2의 고향이라 할 정도로 애정을 많이 가졌다.

그의 건축물은 제주의 땅과 바람에 맞서지 않는 설계로 전문가와 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유동룡 미술관 내부 전경.
유동룡 미술관 내부 전경.

■ 유동룡의 예술혼, 뿌리내리다

고 유동룡의 미술관인 ‘유동룡미술관’이 2022년 제주시 한림읍 월림리(한림읍 용금로 906-10)에 개관했다.

연면적 675㎡, 지상 2층 규모로, 건물 내부에는 3개의 전시실과 라이브러리, 교육실, 아트숍과 티라운지로 구성됐다.

2층 전시실로 들어서면 1970년부터 2011년까지 최초의 작품이었던 어머니의 집부터 포도호텔, 방주교회, 수·풍·석 박물관 그리고 제주 국제영어도시 기념탑까지 그의 대표작들을 사진과 모형, 드로잉으로 보여준다.

연필로 스케치한 매우 간단한 개념도가 수정되고 구체화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도면에 이어 입체적인 모형, 실제로 완성한 건축물 사진까지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이타미 준(사진)은 살아생전 당시 “제주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뜻을 품었지만 아쉽게도 이루지 못했고 이타미 준 건축 자료관 건립과 이타미 준 문화재단 설립, 이타미 준 건축상 제정 등을 유언으로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타미 준 제주 기념관 건립은 그의 유지를 실천하고 생의 마지막을 제주에서 보내길 원했던 제주 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미술관은 유동룡의 딸이자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는 유이화 대표가 맡았다.

유 대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조응하는 방식, 지역의 풍토와 역사를 고민하며 건축을 풀어갔던 아버지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미술관을 설계했다”고 말했다.

유동룡의 40여 년 건축 작업을 회고하는 ‘바람의 건축가, 이타미 준’전을 개관 첫 전시로 올려 화제로 모았다.

1970년대 초기 작품에서부터 말년의 제주도 프로젝트까지 재일교포 건축가로서 유동룡이라는 본명 대신 예명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회고하고, 자연을 존중하는 건축을 통해 본질의 힘을 회복하고자 하는 유동룡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겼다.

/제주일보=진주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