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아파트 앞 비디오 대여점 추억

아버지 친구 덕분에 공짜로 빌려봐

동아리 ‘타나토스’에선 작가 6명 배출

 

보조작가때 편의점 아르바이트 경험

공모 마감 3주 전 ‘편의점’ 떠올려

누구나 겪을만한 일상 이야기로 인기

 

만화·게임으로 제작되며 개발 꿈 이뤄

인천 출신 소년, ‘K-웹툰 개척자’ 성장

대한민국 편의점 알바생들의 바이블, 전설의 TV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편의점 버전, K-웹툰과 OSMU(One Source Multi Use·하나의 자원으로 다양한 상품 파생) 대표 사례 등으로 불리며 한국 만화 중흥기를 연 주역 중 하나인 웹툰 ‘와라! 편의점’.

2008년 7월부터 2014년 5월까지 7년 가까이 장장 600화에 걸쳐 대표작 ‘와라! 편의점’을 네이버 웹툰에 연재한 지강민(45) 작가는 인천 토박이다. 지강민 작가가 인천 출신인지 잘 몰랐던 이가 의외로 많다. 경인일보 ‘아임 프롬 인천’에 K-콘텐츠 선두에 선 웹툰 작가 이름을 처음으로 올릴 수 있어 반갑다.

/투니버스 제공
/투니버스 제공

세계로 뻗어 나아간 웹툰 탄생 배경에는 대중문화의 새로운 물결을 탄 지강민 작가의 1980~1990년대 인천에서의 성장기가 깔렸다. 지 작가조차도 “어렸을 때 꿈으로만 꿨던 일들이 현실로 펼쳐질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지 작가는 현재 부산에 살고 있다. 지난 17일 부산시 남구 용호동에 있는 광안대교가 보이는 한 카페에서 지 작가를 만났다. 그는 수더분한 인상에 어울리는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작업용 태블릿 PC를 넣은 배낭을 멨다. 멀리 있는 고향에서 온 취재진을 맞아 동네 이곳저곳을 친절하게 소개했다. 우리 일상을 소재로 귀여운 그림체의 친근한 작품들을 그려 온 작가는 자신의 작품과 닮은 사람이었다.

게임 개발자 꿈꾸던 소년

지 작가는 1979년 인천 중구 신흥동 안국아파트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모두 인천이 고향이다. 인천 내항이 멀지 않은 670가구 규모 안국아파트는 2002년 재건축으로 1천330가구 아파트로 탈바꿈했다. 안국아파트는 지 작가가 태어나기 한 해 전 준공돼 새집을 장만한 입주민을 들였다. 인천에 아파트 건설 붐이 일어나던 시기다. ‘인천에 아파트 건설 러시’란 제목의 매일경제 1978년 5월29일자 신문 기사가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올 들어 서울에 본사를 둔 민간업체들이 서울 지역 토지 확보난과 관련, 인천에 몰리는 추세를 보이면서 최근 대규모 토지를 매입한 라이프주택과 아주건설은 2~3년의 연속 공사로 대형 아파트 단지 건설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 착공 아파트 가운데 첫 분양 실시할 안국산업이 신흥동에 670가구, 태평양건설이 간석동에 370가구, 삼익토건이 신흥동과 용현동에 모두 406가구, 아주건설이 십정동에 330가구를 모두 6월 분양 목표로 건설 중에 있다.’

지난 17일 오후 부산시 남구 용호동 소금공원에서 만난 지강민 작가. 바다 건너편으로 해운대 신시가지 마천루가 보인다. 2025.1.17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 17일 오후 부산시 남구 용호동 소금공원에서 만난 지강민 작가. 바다 건너편으로 해운대 신시가지 마천루가 보인다. 2025.1.17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 기사에서는 인천의 아파트 건설이 활발해지는 이유로 서울의 토지 확보난을 꼽고 있다. 이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새로 건설된 아파트 단지 위치로 보아 1974년 5월 인천항 갑문 준공에 따른 항만의 확장, 인천 전역의 산업단지 확대 조성 등 ‘산업화 수요’를 반영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국아파트처럼 재건축으로 사라진 아파트도 있으나, 위 기사에 등장하는 몇몇 아파트는 여전히 건재하다.

만화영화 다음 편 기다리기 지루해 상상하는 내용 스케치북에 직접 그렸어요. 누가 커서 뭐 될래 물으면 만화가라고 답했습니다.

지강민 작가

바다가 가까운 곳에 살았지만, 항만시설로 막힌 인천 내항은 어린 지강민 작가가 가까이 갈 수 있는 바다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가장 큰 기억은 안국아파트 앞 상가 비디오 대여점으로, 아버지 친구가 운영했다고 한다. 만화영화 비디오를 공짜로 빌려 볼 수 있었다.

“6살 때였어요. 비디오 가게에 있는 만화영화를 다 본 거예요. ‘다음 편은 언제 나와요?’하고 물었더니 사장님도 모른다는 겁니다. 한참 걸린다고요. 기다리기 지루하잖아요. 그래서 다음 편을 기다리는 동안 제가 상상하는 다음 내용을 스케치북에 그림으로 그리고 글도 썼어요. 그때 봤던 만화영화가 ‘테카맨’과 ‘철인28호’ 같은 일본 로봇 만화였어요. 만화책도 빌려 봤죠. 그때부터 누군가 ‘커서 뭐 될래’라고 물으면 당당하게 ‘만화가’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영향도 받았다. 아버지는 미술대학 출신으로 인천에서 3~4개의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미술 교구·재료 유통사업도 했다. 지 작가 가족은 인천에서 계양구를 제외하곤 안 살아 본 지역이 없을 정도로 이사를 자주 다녔다. 아버지 사업이 잘될 때가 있고 잘 안 될 때도 있어 때마다 크거나 작은 집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고 한다.

지난 17일 오후 부산시 남구 용호동 W스퀘어 한 카페에서 지강민 작가가 인천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25.1.17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 17일 오후 부산시 남구 용호동 W스퀘어 한 카페에서 지강민 작가가 인천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25.1.17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사갈 때마다 지강민 작가는 동네 탐방을 즐겼다. 정확히는 동네 문방구와 오락실을 탐방하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하던 지 작가 취미는 건담 등 프라모델(플라스틱 모델) 조립과 보드게임이었다. 동네 문방구에서 어떤 프라모델을 파는지가 그의 관심사였다. 그렇게 동네마다, 학교 앞마다 있었던 문방구 풍경은 요즘 찾아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그 옛날 어린이들 놀이터이자 없는 게 없던 상상력의 원천이던 문방구는 이제 편의점이나 다이소 같은 생활용품 판매점으로 대체됐다.

지 작가가 중·고교 학창 시절을 보낸 1990년대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정보화 사회’다. 김영삼 정부가 1994년 12월 정보통신부를 신설하고, 1996년 10월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보화 5대 목표’를 발표하며 시동을 걸었다. 김대중 정부가 정보화 정책 기조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개인용 PC와 PC통신·인터넷이 각 가정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 주요 수출 산업이 된 ‘게임 산업’이 이때 태동기를 맞았다. 이 시기 학창 시절을 보낸 학생들 관심 역시 비디오·PC 게임으로 쏠렸다.

게임 시나리오 수상… 제작 실패는 만화로 돌아가게 된 계기

“중학교 때 게임에 빠졌는데, 그러다 보니 게임을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부평 청천중학교 3학년 때 친한 친구 4명이 뭉쳐 국내 한 게임 유통사에서 주관한 게임 시나리오 공모전에 도전해 우수상을 받았어요. 1995년 부평 부광고등학교 1학년 때도 친구들과 ‘카메레온’이란 팀을 구성해 한국정보문화센터(당시 정보통신부 산하 기관)가 주최한 컴퓨터 게임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그때 상금을 200만원이나 받았고요. 김영삼 대통령이 신성장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사 여러 명을 청와대에 초청했는데, 게임 시나리오 공모전 수상자 자격으로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지 작가와 친구들이 정부 게임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수상한 롤플레잉게임(RPG) 시나리오는 당시 꽤 유명한 게임회사에서 상용화됐다. 그러나 지 작가는 이 과정에서 자신이 꿈꾸던 게임 개발·기획자가 되길 포기했다고 한다. 더 얘길 들어봤다.

“게임 시나리오 개발을 맡은 업체가 게임 완성 단계에서 감수해 달라고 저희 팀을 불렀어요. 그런데 일본 RPG를 모방한 게임을 만든 거예요. 시나리오도 원안과 달랐고요. 기획서와 다르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러니 업체 쪽에서 ‘기획서는 좋은데, 그대로 만들기엔 기술력이 부족하고 유행에도 맞지 않다’고 했어요. 차라리 저희 팀 이름을 건 수상작이라는 내용을 빼달라고 했는데, 그 타이틀을 빼면 계약 위반이라는 거예요. 당시 학생이라 계약서 조항을 잘 몰랐죠. 그 이후로 그 업체와 연락을 끊었어요.”

지 작가와 그의 팀이 개발한 게임 시나리오는 SF 장르였다. 외계인이 자신들의 행성을 다른 외계인들에게 빼앗기기 직전 여러 종족이 힘을 모아 물리친다는 SF의 상상력이 가득 찬 작품이었다. 게임 회사가 이들의 원작과 다르게 개발한 게임 또한 1997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제2회 대한민국 게임대상에서 시나리오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지 작가는 해당 게임 회사 대표에게 항의했을 때 들은 “우리나라 어느 게임 회사를 가도 네가 만들고 싶은 게임은 만들 수 없다”는 한 마디가 상처로 남았다. 그가 다시 만화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 계기다.

편의점 그리는 만화가 되다

지 작가는 남자고등학교인 부광고에서 그림 그리는 친구 4명을 모아 순정만화 동아리를 만들었다. 동아리 회원들 작품을 모아 교내에서 회지(會誌)를 내기도 했다. 문제는 이때 작가가 고3이었다는 것이다. 만화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뒤늦게 시작한 동아리였다. 동아리 운영이 활발해지자 인근 학교 여학생들도 회원으로 받았다. 회원이 많을 땐 12명까지 활동했다. 이 가운데 지 작가를 포함한 6명이 작가로 데뷔했다고 한다.

“‘타나토스’란 이름의 동아리였어요. 게임 기획서도 이미지가 있어야 했기에 그림 그리는 취미는 그동안 놓지 않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학창 시절 ‘인싸’(인사이더 준말)라서 항상 친구들한테 둘러싸여 있었어요. (웃음) 쉬는 시간마다 제 자리로 몰려와 제가 그린 그림을 돌려 보거나 제가 생각하는 게임 이야기를 들었어요. ‘소년 챔프’ ‘아이큐 점프’ ‘윙크’ ‘나인’ ‘이슈’ 등 구독하던 잡지만 8개 정도였어요. 신일숙 선생님의 ‘리니지’를 좋아했고, 이은혜 작가님의 ‘블루’도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모두 순정만화네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동아리 활동은 이어졌다. 동아리 ‘타나토스’는 작가 데뷔를 위한 동인으로 연장됐다. 부모님은 만화가의 길을 택한 지 작가를 조용히 응원했다. 지 작가의 어머니는 반대 대신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며 “잘되면 그만큼 네가 고생한 것”이라고 지지해 줬다고 한다.

지강민 작가가 스스로를 표현한 캐릭터. 만화가 자신의 캐릭터를 ‘오너캐’라고도 한다. 지 작가의 만화 속 캐릭터들은 눈과 눈동자가 꽤 큰 편이다. 자신의 캐릭터의 눈은 ‘X’자로 위트 있게 표현해 만화 캐릭터들과 구분했다. /지강민 제공
지강민 작가가 스스로를 표현한 캐릭터. 만화가 자신의 캐릭터를 ‘오너캐’라고도 한다. 지 작가의 만화 속 캐릭터들은 눈과 눈동자가 꽤 큰 편이다. 자신의 캐릭터의 눈은 ‘X’자로 위트 있게 표현해 만화 캐릭터들과 구분했다. /지강민 제공

지 작가는 2000년대 초반 일찌감치 군 복무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만화가 데뷔를 준비했다. 이때까지도 웹툰이란 장르가 없다시피 했으므로 잡지 연재 등 출판 만화가를 지망했다고 한다. 군에 입대한 사이 먼저 데뷔한 친구 작업실에서 어시스트(보조 작가)를 하면서 공모전 등에 열심히 도전했다. 공장이나 대형 마트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 경기도 김포의 한 편의점에서 2년 반 동안 일했는데, 그 경험이 훗날 그를 만화가로 성공하게 할 소재가 될 줄은 그땐 몰랐다.

우리가 익히 아는 만화책, 즉 출판 만화만 생각했던 지 작가는 ‘스크롤 웹툰’이란 새로운 영역을 접한다. 지금은 보편화된 형식의 ‘웹툰’을 처음 시도한 강풀 작가의 2003년작 ‘순정만화’다.

“강풀 작가님의 ‘순정만화’를 보고 엄청 충격받았어요. 그 전까지는 페이지를 넘기는 책과 다를 바 없는 웹툰이 전부였거든요. 아니면 한 화면에서 끝나는 형식이었죠. 강풀 작가님 작품을 인터넷에서 마우스나 키보드로 스크롤을 내리면서 보는데, 굉장히 편하게 잘 읽히는 거예요. 이런 형식이면 도전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웹툰 공모전에도 도전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서른 살을 코앞에 두고도 공모전에서 낙방을 거듭했다. 지 작가는 딱 서른 살까지만 도전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직장 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지쳐갈 무렵인 2008년, 웹툰 서비스를 시작한 지 3년 된 네이버에서 공모전을 개최했다. 이 공모전에서 수상하면 네이버에 연재할 기회를 얻게 된다. 마감을 3주 남긴 시점이었다. 공모전에 5편짜리 작품을 응모해야 하는데, 새 작품을 그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불현듯 떠오른 소재가 바로 ‘편의점’이다.

당시 제 일상은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 것이었어요.

지강민 작가

“당시 제 일상은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 것이었어요. 귀엽고 가벼운 그림체로 모두가 공감할 만한 편의점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바생들만이라도 공감할 만한 만화. 그때 네이버 웹툰 공모전에 응모한 것이 ‘와라! 편의점’ 1~5편입니다. 동시에 ‘도전 만화가’ 게시판에도 ‘와라! 편의점’을 시험 삼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첫 화부터 조회 수가 3만건 이상을 기록하고 댓글이 수백 개씩 달리는 거예요. 10화가 넘어 가면서 조회 수가 10만건을 넘겼습니다. 역시나 공모전에서 우수상과 인기상을 수상했습니다. 네이버 웹툰 연재가 성사됐고요. 드디어 웹툰 작가로 정식 데뷔하게 됐습니다.”

독자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총 600화의 ‘와라! 편의점’은 2008~2014년 연재 기간 누적 조회 수 6억 건 이상을 기록했다. 프렌드마트라는 가상의 편의점에서 일은 잘하지만 까칠한 20대 초반의 여성 혜연(오전 알바), 귀여운 여고생 은아(오후 알바), 약간은 소심하지만 성실하고 든든한 20대 초반 남성 민준(야간 알바), 그리고 ‘4차원 매력’의 점장 등 4명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일상 이야기다. 편의점에서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이야기가 각종 패러디와 함께 코믹하게 어우러졌다. 때론 감동도 찾을 수 있다. 편의점을 가장 많이 드나드는 이는 누구인가. 소시민들이다. ‘알바’라는 단어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보편화됐다. ‘와라! 편의점’은 소시민 삶의 희노애락을 고스란히 담은 소우주를 만들어냈다.

“2년 반 동안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11명의 동료를 만났는데, ‘와라! 편의점’ 캐릭터들은 이들의 특징들을 합쳤어요. 에피소드도 거의 다 제가 겪은 일에서 나왔고요. 독자들이 이메일로 하루 30~40개씩 사연을 보내기도 했어요. 점장님 캐릭터는 실제 인물에서 따왔습니다. (웃음) 편의점에서 일하다 보면 온갖 유형의 사람과 마주치고, 갖가지 사연을 접하게 됩니다. 동네 사랑방 역할도 하고요. 진상 손님도 엄청 많습니다. 일종의 ‘작은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편의점 알바를 하기 전에는 이 작품을 보는 게 이젠 필수라고 하더라고요.”

지난 17일 오후 부산시 남구 용호동 W스퀘어의 한 카페에서 지강민 작가가 ‘와라! 편의점’으로 데뷔하기까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2025.1.17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 17일 오후 부산시 남구 용호동 W스퀘어의 한 카페에서 지강민 작가가 ‘와라! 편의점’으로 데뷔하기까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2025.1.17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세계로 나아간 K-웹툰

‘와라! 편의점’은 인기 웹툰으로만 남지 않았다. 하나의 문화적 자원에서 여러 개 상품을 파생한다는 의미인 ‘OSMU’ 문화 콘텐츠 분야의 대표적 성공 사례다. 단행본 출간은 물론 2012년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MBC와 투니버스에서 방영했으며 모바일 게임으로도 제작돼 큰 인기를 끌었다. 지 작가의 학창 시절 게임 개발의 꿈을 이룬 셈이다. 웹툰 최초로 단행본과 더불어 작은 크기의 핸디북을 대형 마트 등지에서 출시했다. 핸디북은 15만권 팔렸고, 단행본까지 합하면 30만부 이상 판매됐다. 웹툰과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방식의 ‘웹투니메이션’도 웹툰 최초로 만들어져 네이버에 연재됐다. 웹툰은 일본, 중국, 대만으로 진출했으며 TV 애니메이션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 20개국에 수출됐다.

작품 소재가 편의점인 만큼 ‘와라! 편의점’ 캐릭터를 활용한 소시지, 핫바, 아이스바, 우유 등 편의점 상품도 나왔다. 아이스바의 경우, 상품이 출시된 2010년에는 빙과류 판매 부동의 1위였던 멜론맛 아이스바를 제치고 그해 매출 1위를 기록했다. 보드게임, 머그컵, 블록 완구, 의류, 물티슈, 수첩, 연습장, 연필 등등 ‘굿즈’ 상품은 셀 수 없이 많다. ‘와라! 편의점’의 OSMU 사례를 분석한 논문이 나왔을 정도다.

한국애니메이션학회가 발행하는 학술지 ‘애니메이션연구’ 2015년 3호에 실린 논문 ‘웹툰 OSMU의 방향성과 전략 연구 -와라! 편의점 사례를 중심으로’(한혜경)를 보면, “‘와라! 편의점’은 캐릭터와 배경 공간의 활용으로 성공적인 OSMU 성과를 거뒀다”며 “각기 다른 영역의 전문가들과 컨소시엄 형태의 제작 시스템을 구축했던 이 작품의 사례는 창작자 진영이 OSMU를 주도한 좋은 선례를 제공했다”고 분석했다. 지 작가의 설명을 들어보자.

“운이 좋아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사업을 다각화할 수 있었습니다.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시장이 크지 않았고 웹툰의 OSMU 대부분이 첫 시도였어요. 편의점이라는 게 접근성이 뛰어나고 친근한 장소이면서 온갖 것들을 다 팔잖아요. 사업화하기 유용한 모델이었죠. 지금은 한국 웹툰이 어마어마하게 성장했습니다. 제 사례를 갖고 강연도 많이 했어요. 과거에 만화가는 먹고살기 힘들고 어두운 이미지였어요. 요새는 웹툰 작가의 인기가 높습니다. 웹툰 작가라고 저를 소개하면 첫 물음이 ‘기안84 작가님 아세요?’예요. (웃음)”

‘와라! 편의점’의 TV 애니메이션 제작·방영에 관한 경인일보 2012년 1월5일자 기사.
‘와라! 편의점’의 TV 애니메이션 제작·방영에 관한 경인일보 2012년 1월5일자 기사.

후속작 ‘매일매일 출근가족’(2015~2017년·카카오페이지)은 버스기사 어머니와 택시기사 아버지, 지하철 역무원 누나와 남자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다뤘다. ‘마이너스 1억 소녀’(2017~2019년·저스툰)는 1억원의 빚을 진 스무살 주인공이 알바를 하면서 빚을 갚는다는 슬프고 고달픈 현실을 귀엽고 유쾌하게 표현해 아이러니함을 보여줬다. 가까운 일상에서 겪는 고충을 비롯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지강민 작가 작품들의 공통점이다. 지난해 1~4월에는 인천시와 함께 기획한 웹툰 ‘와라! 인천, 마법의 세계로’를 연재했다. 최근 유행하는 판타지 장르의 일종인 ‘이세계물’과 인천의 역사·문화 여행기를 결합한 점이 흥미롭다.

“서울과 부산에 살기 전까지 30년 넘게 인천에 살았는데, 고향 역사와 문화를 너무 많이 몰랐더군요. ‘와라! 인천’을 연재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어린 시절 뛰놀던 자유공원이 그냥 공원이 아니라는 것, 답동성당이 그냥 성당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 공부했어요. 여러분도 자신이 사는 동네를 한번쯤 공부해 봤으면 합니다. 새로운 기분으로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역에 대한 자부심도 커지고요. 인천과 마법 세계를 연결 지은 것은 ‘마계 인천’이란 부정적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고 싶었던 이유도 있습니다.”

차기작을 기다리는 팬이 많다. 아직 공개할 단계는 아니지만, 착실히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특유의 유머와 세심한 감성으로 평범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지강민표 웹툰이 기다려진다.

지난 17일 오후 부산시 남구 용호동 소금공원에서 만난 지강민 작가. 바다 건너편으로 해운대 신시가지 마천루가 보인다. 2025.1.17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 17일 오후 부산시 남구 용호동 소금공원에서 만난 지강민 작가. 바다 건너편으로 해운대 신시가지 마천루가 보인다. 2025.1.17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약력

1979년 인천 출생

1992년 인천산곡초등학교 졸업

1995년 청천중학교 졸업

1998년 부광고등학교 졸업

■수상

1994년 네오지오 게임시나리오 우수상

1995년 한국정보문화센터 게임시나리오 우수상

1997년 대한민국 게임대상 우수상

2004년 엠파스 아마추어 만화 공모전 가작

2008년 SICAF 만화 공모전 우수상·인기상

2012년 서울 캐릭터 프로모션·피칭 우수상

■작품

2008~2014년 네이버웹툰 ‘와라! 편의점’

2015~2017년 카카오페이지웹툰 ‘매일매일 출근가족’

2017~2019년 저스툰 ‘마이너스 1억 소녀’

2020년 EBS툰 ‘도산’

2024년 인천시 ‘와라! 인천’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