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음악 목적 다 같아, 고집 대신 조화”

당신의 스타를 빛나게 해주는 기타

 

초교때 아버지의 나일론 기타로 입문

고교시절 몰두… 직업으로 삼을 결심

졸업후 주안 녹음실서 수년간 머물러

‘난 누군가’ 미래 불안감속 실력 키워

‘안치환과 자유’ 기타멤버 공모 합격

 

실력 인정 유명가수들 세션으로 명성

“음악색깔 강요 않고 가수특성 고민”

“음악과 사람 만난 인천서 삶이 시작”

기타리스트 임선호.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기타리스트 임선호.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번 ‘아임프롬인천’ 주인공은 기타를 연주하는 ‘세션맨’(session man) 임선호(48)다. 세션맨과 기타리스트를 합쳐 세션 기타리스트라고 그를 부르기도 한다. 가수(performer)가 공연이나 앨범 작업을 할 때 반주를 담당하는 것이 세션맨 역할이다.

그는 빼어난 실력을 가진 기타 연주자로 손꼽힌다. 세션맨 임선호의 이름이 대중에게는 익숙하지 않겠지만 ‘대중음악 씬’에서는 그 반대다. 그와 함께 작업한 가수를 소개하면 그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안치환, 동방신기, 영탁, 김연우, 왁스, 포레스텔라, 황영웅, 테이, 위너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케이팝(K-POP)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요즘이다. 뮤지션을 백업하는 주연 아닌 조연 역할을 하는 것이 세션맨이다. 하지만 세션맨이 없다면 가수가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유명한 K-pop 뮤지션도 앨범을 만들 수 없고, 방송이나 공연 무대에 설 수 없으며,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세계의 관심을 받는 데 이들 세션맨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아 보인다. ‘아임프롬인천’을 통해 그를 소개하는 이유다.

기타리스트 임선호.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기타리스트 임선호.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골방 기타리스트였던 그가 세션맨으로 발을 들인 것은 2003년이다. 치열한 오디션을 거쳐 합류한 밴드 ‘안치환과 자유’ 활동이 첫 시작이다.

“우연히 인터넷 음악 관련 게시판에서 ‘안치환과 자유’ 기타리스트를 모집한다는 오디션 공고를 봤어요. 기타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국산 브랜드 싸구려 기타 하나 빌려서 서울로 향했죠.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한 명을 뽑는데 3~4일 동안 오디션이 진행될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서울 마포에서 어지간한 이름 있는 사람들도 오디션을 봤습니다. 1시간 정도 연주 시간이 주어졌어요. 키(key)를 정해주고 즉흥 연주를 해보라고 하고요, 어쿠스틱 기타 연주도 했습니다. 결국 같이 해보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얼떨떨했습니다.”

그는 오디션 합격 연락과 동시에 은행 통장을 만들어야 했다. 우리은행 구월동 지점을 찾아가 난생 처음 통장을 만들었다. 통장을 개설하고 계좌번호를 알려주자 그 즉시 500만원이라는 돈이 입금됐다. 1년에 10만원을 벌지 못하던 그였다. 그는 그 길로 기타를 샀다.

녹음실에서 작업중인 임선호. /임선호 제공
녹음실에서 작업중인 임선호. /임선호 제공

임선호의 유년 시절 가정 환경을 그와 비슷한 연배의 이들과 비교해 보면 평범한 편은 아니었는데, 그는 그것이 자신을 힘들게 하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그는 서울 봉천동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한 이후에는 두 살 아래 여동생, 아버지와 살았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집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인천에는 4학년 때 이사를 와 창영초등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잠시 야구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야구부 전용 운동장이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와 야구를 해보고 싶었다.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 이사를 자주 다녔다. 송림동, 송현동, 주안동 등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다.

그가 기타를 만지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변진섭의 ‘희망사항’을 기타로 직접 연주하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취미로 가끔 연주하시던 ‘나일론’ 기타가 집에 있었다. 당시에는 대중가요 ‘히트곡’ 모음 악보집을 레코드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f 코드’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연습을 하고 아버지께 처음 들려 드렸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아버지께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교회에서 가끔 연주하는 것으로 기타를 즐겼다. 중학생 시절에는 미술부 활동에 열심이었다. 미술부원을 이끌고 대회에 나가 상을 받기도 했다. 학업 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특성화고 진학을 권했고 공고에 진학했다.

녹음실에서 작업중인 임선호. /임선호 제공
녹음실에서 작업중인 임선호. /임선호 제공

본격적으로 기타를 연주한 건 고교 시절이다. 건축과에 진학했는데,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고교 시절 처음으로 ‘기타를 치면서 먹고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학교 졸업 즈음 재미있게 쳤던 그 기타가 고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너무 저에게 잘 맞는 느낌이었어요. 재밌고 그냥 하루 종일 기타만 쳐도 별로 안 힘든 거 같은 느낌 있잖아요. 공부는 10분만 해도 힘든데, 기타는 정말 앉아서 몇 시간을 쳐도 즐거웠습니다. 학교가 오후 3시30분 즈음 파하면 학원에서 막차가 끊기는 10시까지 거의 매일 기타를 쳤죠.”

기타를 더 잘 쳐보고 싶어서 음악학원을 다녔다. 백운역 근처에 있는 부평 현대음악학원이다. 그의 말처럼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찾아가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음악학원을 몇 달 다녀 보니 “내가 선생님보다 더 잘 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학원은 그냥 연습실과 같았다. 당시 음악학원 선생님은 수강생들에게 거의 모든 악기를 다 가르쳤는데 선생님이 기타 전문은 아니었던 것으로 그는 기억했다.

인천을 밴드 음악의 성지로 부르는 이가 적지 않다. 유명한 인천 출신 록그룹, 인천 출신 록 기타리스트도 굉장히 많다. 임선호도 그러한 평가에 동의한다. 인천에는 미군 부대가 주둔했고 미군을 상대로 장사하는 클럽 등을 통해 대중음악이 유입됐다. 인천에 있었던 음악학원들도 이러한 평가를 받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그가 다닌 음악학원과 같은 이름이지만 다른 곳 동인천에 있는 현대음악학원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철과 황제밴드’ 기타리스트 박창곤, 록그룹 티삼스 출신으로 밴드 부활에서 활약한 채제민 등이 현대음악학원 출신이라고 그는 기억했다. 현대음악학원에서는 밴드 경연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임선호 역시 또래들과 함께 경연 대회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 임선호는 “왜 동인천에 있는 현대음악학원이 아니라 멀리 부평에 있는 학원까지 찾아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기타 연습은 혼자였다. 매일 음악을 들으며 게리 무어, 에릭 클랩튼 등의 연주를 ‘카피’했다. 몇몇 친구와 밴드를 꾸려 합을 맞추기도 했다.

/임선호 제공
/임선호 제공

그가 ‘기타’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한 것은 현장실습을 앞둔 고등학교 2학년 시기다. 특성화고 3학년이 되면 학교를 가지 않고 업체로 출근하는 현장실습을 나가야 했다. 일하고 있다는 증빙만 제출하면 학교를 나가지 않아도 됐는데, 주안동에 있던 한 녹음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급여가 따로 없었다. 대신 마음껏 기타를 치고 음악을 만드는 방법, 악기를 다루는 요령 등을 두루 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집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이때부터 2003년까지 스튜디오에 박혀 음악을 듣고 기타를 치는 생활이 쳇바퀴처럼 수년 동안 반복됐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낸다. 스튜디오에 딸린 작은 창고를 집처럼 여기며 5~6년을 기타와 함께 살았다. 스튜디오 일을 거들고 남는 시간은 모두 기타 연습에만 매달렸다. 변변한 수입이 없었다. 배고프고 힘든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미래였다. 또래들은 대학에 진학하고, 만남을 갖고, 직장을 다녔다. 그는 젊은 시절 평범한 이들이 겪는 일들을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다. 친구들도 만날 수 없었다. 굉장히 힘든 시기였다.

“내 안에서 저라는 사람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하게 됐어요. ‘너는 누구냐. 너는 뭐 하는 사람이냐.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걱정에 빠지고 또 어느 날에는 ‘다 잘될 거야’ 하는 식의 생활이 반복됐어요. 한두 달이라면 몰라도 몇 년을 그렇게 반복했으니 너무 힘들었죠.”

기타리스트 임선호.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기타리스트 임선호.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그에게 많은 뮤지션이 불러주는 실력 있는 세션맨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물었다. 그는 ‘실력 있는’이라는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세션맨으로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고집하거나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꼽았다.

“세션맨은 어떻게 보면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잖아요. 서로 의견 충돌이 생겼을 때는 고객의 요구대로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되는 이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고집을 부리지 않아요. 성격도 그렇고요. 예를 들면 ‘고추장 스타일로 가느냐, 된장 스타일로 가느냐’를 두고 의견 충돌이 생기는 경우가 있어요. 사실 어떻게 보면 둘 다 맞는 말이거든요. 어떤 차이를 중요하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사실은 좋은 음악이 목적인 거죠.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가수 왁스와의 공연 모습. /임선호 제공
가수 왁스와의 공연 모습. /임선호 제공

그는 자신의 연주 실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경계를 나누자면 순수 예술의 범주에서 많이 벗어난 상업적 음악을 하고 있는데,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이들에 비하면 연주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대중음악도 스펙트럼이 많이 넓어졌습니다. 어쨌든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가수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계속 연구하고 고민하죠. 그러한 고민에 특화되다 보니 많은 가수가 불러주는 기타리스트가 된 것 같아요. 기타를 잘 친다고 말씀하시는데 사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성장한 인천을 떠나 김포에 거주하고 있다. 고향이나 다름없는 도시 인천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인천은 제 삶의 시작이 되어준 도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기타리스트 인생의 시작을 인천에서 했고, 인천을 통해서 기타와 음악을 알았고,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기타리스트로서 인생의 시작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