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짧은 영상 플랫폼의 인기에 단순하고 반복적인 멜로디, 자극적인 가사의 노래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도 서정적 멜로디에 담백한 가사를 붙인 김광진(61)의 음악은 세대 구분 없이 사랑을 받고 있다. 젊은 세대에 김광진은 비비(BIBI), 악뮤(AKMU) 수현, 윤하 등이 부른 ‘편지’의 원작자로, 그들의 부모 세대에는 국민가요인 ‘마법의 성’을 만들고 부른 가수로 잘 알려져 있다.
1990년대 한국 가요계에 마법의 성이란 ‘메가 히트곡’을 내놓은 김광진이지만, 이후 발표한 음악이 발매 당시에는 큰 조명을 받지 못해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 20여 년간 금융업계에 몸담은 그는 한동안 음악과 담을 쌓기도 했다. 가요계를 잠시 떠나 있던 순간에도 김광진의 음악은 선후배들의 선택을 받아 끊임없이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최근 친한 친구에게 “내 아들이 네 노래를 너무 좋아해”라는 말을 들었다는 김광진은 “음악은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요소가 충분히 있다”고 말한다. 그의 공연장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팬들이 찾는다.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시대마다 다른 화법이 있어요. 요즘에는 단도직입적인 가사가 많은데, 90년대 노래들은 감성을 울리는 절묘한 표현이 많았어요. 요즘 시대에는 예전의 작사 방식이 오히려 좀 신선하다는 느낌도 들어요. 곡의 흐름에 따라 발전되는 멜로디도 최근의 유행가들과는 다른 감성인데 이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젊은 분들이 좋아하는 이유 아닐까요.”
동구 금곡동 소아과 집 막내 아들

인천 동구에서 나고 자란 김광진은 어릴 적부터 음악과 가까웠다. 시작은 클래식이었다. 7남매 중 막내였던 그는 누나와 형들의 악기 연주 소리를 듣고 자랐다. 피아노를 전공한 큰누나와 누나의 제자들, 형제들을 가르치던 첼로·바이올린 선생님의 제자들이 정기적으로 그의 집에 모여 음악회를 열 정도였다. 그는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가족 중에선 가장 연주가 서툰 편이었다고 한다.

유복한 가정의 막내아들이었던 그는 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 김관철 원장은 동구 금곡동에서 ‘지성 소아과’를 운영했다. 당시 인천에 몇 없는 소아과 중 하나였던 이곳은 늘 아이들로 붐볐다. 50년간 한자리에서 운영한 덕에 수많은 아이가 진료를 받았다. 김 원장은 환자들 특징을 진료 차트에 기록해 놓을 정도로 정이 많은 의사였다고 김광진은 기억했다.
나 어릴 때 우울해지면 울 아버지 슬며시 내게 오셔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해 주시던 말씀이 있지 항상 실망할 필욘 없어 너무 많은 꿈들이 네 앞에 있는 걸 중요한 그 날이 올 걸 기다리며 마음을 편하게 가져 노는 게 남는 거야 어렸을 때 뛰어 놀아라 튼튼해지도록 젊었을 땐 나가 놀아라 신나게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은 김광진이 작사·작곡한 더 클래식(The Classic)의 곡 ‘노는게 남는 거야’에도 나타나 있다.
“아버지는 밤에 공부하고 있으면 빨리 자라고 말하셨고 낭만적이셨던 분이셨어요. 그리고 사람들을 좋아해서 항상 많은 사람이 와서 가족들과 식사를 같이 하곤 했습니다. ”
베이비붐 세대의 ‘추억의 공간’이었던 이 병원 건물은 동구가 매입해 2021년 12월 청년을 위한 공간 ‘유유기지 동구청년21’로 조성했다. 청소년들이 드나들던 병원이 청년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동구 출신이면서 인천 골목 탐방가로 활동하는 유동현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은 “당시 소아과 전문의가 인천에 많이 없었고, 지성 소아과 원장님이 명의로 소문이 나 있었다”며 “김광진의 아내인 작사가 허승경씨 어머니도 동구에서 ‘인일약국’을 오랫동안 운영하시고 계신다”고 했다.

제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곡이 저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당시 팝송 악보집이 많이 나오던 시절인데 그걸 보면서 연습도 하고, 악보가 없는 곡은 직접 악보를 따서 연주하기도 했어요.
중학생이 된 김광진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 음악에 푹 빠졌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의 빌보드 차트를 1~20위까지 꿰고 있을 정도였다. 통기타를 연주하고 따라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배리 메닐로우(Barry Manilow), 엘튼 존(Elton John), 빌리 조엘(Billy Joel) 등 주로 피아노 치는 남자 가수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들의 음악을 연주하고 따라 불렀습니다. 노래를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노래하는 걸 좋아했어요. 막연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라이선스를 받은 공식 음반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었다. 일명 ‘빽판’으로 불리는 복사판 LP음반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해 들었다.
어릴 적 동경했던 뮤지션의 공연을 성인이 된 후 관람한 김광진은 이런 감상평을 남겼다.
“운이 좋게도 배리 메닐로우의 90년대 홍콩, 2010년대 LA 공연을 두 번 갔어요. 빌리 조엘 공연도 2008년 내한했을 때 한 번, 지난해 또 관람했는데 젊은 세대부터 나이 든 세대까지 많은 관람객이 음악을 즐기는 것을 보고 음악의 힘이 정말 대단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홀로 취미 생활로 즐기던 음악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를 제물포고에 입학해 만났다. 현재 SK마이크로웍스를 이끌고 있는 이용선 대표이사와 통기타 듀오를 결성했다. 축제 무대에 올라 영국 록밴드 ‘스모키’(Smokie)의 ‘리빙 넥스트 도어 투 앨리스’(Living Next Door to Alice)와 수지 콰트로(Suzi Quatro), 크리스 노먼(Chris Norman)의 ‘스텀블링 인’(stumbling in)을 불렀다. 그가 처음으로 선 무대였다.
“또래들 사이에서 팝 음악의 인기가 많을 때였어요. 저는 지금보다도 더 가는 ‘옐로우 보이스’였는데 허스키한 친구 목소리와 대비가 되면서 반응이 꽤 좋았습니다.”
음악을 하고 싶었던 그였지만 당시엔 실용음악과가 없었기 때문에 경영학과를 선택했다. 소년 김광진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연세대 경영학과 82학번으로 입학한 후에도 이어졌다. 대학에서도 이용선 이사와의 통기타 듀오 활동은 계속됐다. 대학가 카페에서 자작곡을 공개하는 행사도 열었다. 자작곡 목록과 가사를 담은 포스터를 학교 도서관에 비치해 홍보했다. 그 당시 옆에서 기타 연주를 도와줬던 사람이 재즈 기타리스트 김영수씨다.

“낭만의 시대였죠. 주로 팝송과 자작곡을 가지고 학교 앞에서 공연을 했어요. 친구가 다녔던 성대 앞이나, 제가 다니던 연대 앞에서 노래 발표회를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웃긴 추억인데 노래 발표한다고 도서관 입구에 팸플릿을 놓고 가면 사람들이 그걸 집어서 카페로 왔어요.”

대학 가요제에도 빼놓지 않고 이름을 올렸다. 1학년 때 연세대 상경대 가요제에서 ‘시인의 삶’이란 노래로, 3학년엔 연세대 무학가요제에서 ‘오랜’이라는 노래로 1등을 했다. 1985년 4학년 때 열린 연세대 개교 100주년 기념 가요제에서 ‘그날까지’라는 노래로 대상을 받았다.
이용선 대표이사는 “광진이는 음악적 재능이 큰 친구였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서로 알게 됐는데 좋은 음악을 많이 알고 있었고 집에 가면 LP 수백장이 있어서 함께 들었다. 대학생 때는 한 팀으로 축제나 가요제 무대에 오르기도 했는데 곡을 쓰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했다.
당시 ‘월간 팝송’ 강정식 기자는 김광진 듀오를 데리고 음반사에 가서 오디션을 보게 했다.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오디션을 돌던 그에게 ‘괜찮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적극적 음반 제의는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유학길에 오른 그는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MBA 과정을 밟는다. 영어가 서툴렀던 그는 유학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음악이 그에겐 유일한 위로였다. 1980년대 후반 악보를 컴퓨터에 입력하면 자동으로 반주가 나오는 ‘미디’(MIDI)가 출시됐다.
“미디를 이용해 좋아하는 팝송의 악보를 직접 만들어 컴퓨터에 입력하고 자동으로 반주가 나오면 거기에 따라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방이 없던 시절인데 홀로 즐길 수 있는 노래방이 된 거죠. 그러면서 제가 좋아하는 가수들의 화성(화음 연결) 진행은 이렇구나 배워나갔던 것 같아요.”
학교 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장기자랑에서 부른 노래로 한순간에 유명 인사가 됐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잘할 수 있는 통계학 과목도 있었지만, 영어를 많이 사용해야 하는 마케팅 과목은 어려웠어요. 지금 기억에 남는 건 컴퓨터 과목이었는데 국내에서 배우고 간 내용보단 훨씬 앞선 수준이었어요. 시험 문제가 어떻게 나올지 경향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시험을 봤는데 제 성적이 뒤에서 두 번째더라고요. 꼴찌는 동경대 법대를 나온 학생이었습니다. 학교를 계속 다닐까 말까 고민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는데 연말 학과 장기자랑에서 빌리 조엘의 ‘저스트 더 웨이 유 아’(Just the Way You Are)를 부르자 기립박수를 받고 유명 인사가 돼 있었어요. 친구들이 말을 걸고 새 생활이 열리면서 학교를 무사히 잘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영어를 잘 못하고 경험이 없으니까 스터디에 기여를 잘 못하는 편이었는데 유명해지니까 좀 봐주더라고요. ”
사무실로 온 한 통의 전화

그렇게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김광진은 1989년에 장은투자자문에 입사했다. 직장에 다니던 그에게 1991년 뜻밖의 전화가 왔다. 가수 한동준씨가 음반을 발매하는데 곡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 그 인연은 유학 전 만들었던 데모 테이프에서 시작됐다. 김광진의 데모 테이프는 당시 음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돌아다녔고, 한동준도 그의 음악을 마음에 들어했다.
김광진은 귀국 후 이화여대 가요제에 현재 아내인 허승경씨와 함께 출전했다. 김광진은 자신이 쓴 곡에 코러스로 참여했고 이 곡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유학 생활 때 위로가 된 가수 유재하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추모하며 쓴 ‘너를 위로할 수가 없었다’는 노래였다.
이 소식을 우연히 접한 한동준은 자신이 찾던 데모 테이프의 주인공이 김광진임을 알게 됐다. 수소문해 회사원 김광진에게 연락했다. 그의 뚜렷한 음악 색깔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렇게 김광진이 작사·작곡한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도’는 한동준 첫 앨범의 타이틀 곡이 됐다. 같은 해 김광진은 한동준 소속사였던 ‘SM기획’과 연이 닿아 첫 앨범 ‘Virgin Flight’를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큰 호응을 얻진 못했다.
“당시 신승훈씨가 나왔는데 인기가 상당히 좋았어요. 제가 보기에도 신승훈씨의 음악보다 대중성이 떨어졌고, 계약을 한 상태가 아니었다 보니 기획사에서도 음반을 홍보하는 데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음반은 거의 묻혔고, 저는 실망해서 한동안 집에서 우울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
앨범이 잘 안 된 경험 때문이었을까. 김광진은 음악에 전념할 생각이 당시에는 없었다고 한다. 이승환이 김광진과 박용준을 ‘더 클래식’으로 제작했을 무렵인 1994년에 김광진은 삼성증권 국제부에 애널리스트로 소속돼 있었다. 5개월가량 준비한 1집 ‘마법의 성’으로 데뷔 앨범 실패의 설움을 풀었다.
“제가 가진 약점들을 잘 알고 있었는데 제 곡들이 뚝뚝 끊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좀 부드럽게 연결되는 곡을 쓰고 싶었습니다. 곡의 첫 부분을 만든 다음엔 물 흐르듯 금방 곡이 완성됐어요. 큰 녹음실을 빌려 오케스트라 연주를 녹음하는 등 이승환씨의 지원으로 좋은 환경에서 작업을 했어요. 가사는 공주를 구하러 가는 내용의 게임 ‘페르시아의 왕자’에서 영감을 얻어 썼습니다. ”
발매 당시 앨범이 100만장 이상 팔렸지만, 마법의 성은 당시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 1위 후보에만 머물렀다.
“당시 방송 출연이 워낙 적어 방송 출연 점수가 높지 않았어요.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가기가 좀 어려웠고요. 가요톱텐 사회를 봤던 손범수가 대학교 동기였는데 그의 부탁으로 한 번 방송에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듬해 2집을 발매했다. 메가 히트곡을 발표한 이후 더 클래식의 의욕도 컸다. 마법의 성과는 다른 형태의 노래를 쓰고 싶었던 그는 ‘여우야’ ‘송가’ ‘노는게 남는 거야’ 등 다양한 시도를 한 음악을 앨범에 담았다.

이후 더 클래식 3집(1997), 김광진 2집(1998), ‘편지’가 담긴 3집(2000)년을 발매한다.
김광진은 당시 ‘편지’가 이렇게 잘 알려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소 멜로디를 만들고 그 곡에서 영감을 얻어 가사를 쓰는 김광진은 가사를 붙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녹음 일정이 잡힌 당일까지 가사를 정하지 못해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녹음실로 올라가는 길에 그의 아내 허승경씨가 급하게 썼다. 허승경씨가 김광진이 아닌 선을 본 다른 남자에게서 받은 편지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처음 저는 그 가사를 보고 마음에 안 들었어요. 강렬한 느낌이 들지 않았고 어투도 마음에 들지 않은 상태로 녹음을 했어요. 집으로 돌아오면서 차에서 듣다 보니 상당히 강렬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앨범 발매 직후엔 큰 반응이 없어 김광진은 다시 직장 생활에 집중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2001년엔 국제공인재무분석사(CFA) 자격증을 취득했다. 마법의 성을 발매한 이듬해인 1995년부터 시험을 준비해 7년 만에 붙었다. 메가 히트곡을 보유한 음악가가 왜 이런 자격증을 따려고 노력했는지 궁금할 수도 있다. 김광진은 이렇게 말했다.
“더 클래식 2집부터는 음반이 잘 팔리지 않았어요. 그랬기 때문에 음악을 해서 버는 수입이 많지 않았고, 기획사 없이 혼자 활동했기 때문에 스케줄도 많지 않았고요. 직장 생활을 안 하면 많이 뒤처져 가는 느낌도 있었기 때문에 2001년에 자산운용사로 취직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잘한 선택 같습니다.”
2002년 7월 ‘동경소녀’가 포함된 3집 앨범을 낸 이후 김광진은 동부자산운용(현 DB자산운용)에서 펀드 매니저 생활을 하며 직장 생활에 몰두했다. 음악 생활에 슬럼프가 찾아왔다.
“동경소녀가 담긴 앨범 ‘솔베이지’를 정말 열심히 만들었어요. 다양한 음악적 시도들이 있었고, 스스로도 음악적 완성도가 있는 앨범이라고 생각했어요. 평론가들의 평도 좋았어요. 그런데 마법의 성만큼 그런 반응이 있기는 어려웠던 건데 반응이 크지 않았던 것에 많이 실망했던 것 같아요. 지치기도 했고,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긴 슬럼프를 깨고 울려퍼진 김광진의 노래

직장 생활에 몰두하던 그의 앨범이 재조명을 받는 기회가 ‘기적’처럼 찾아왔다. 2011년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 시즌3에서 참가자들이 김광진의 음악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 경연 참가자 중 버스커버스커는 ‘동경소녀’를 편곡해 불렀고, 투개월은 ‘여우야’를 골랐다. 또 여러 참가자가 ‘편지’ ‘진심’ 등을 불렀다.
“기적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게 쉽지 않은데 음악하는 사람들이 제 음악을 많이 좋아해 주는구나 싶었어요. 얼마 전에 확인해 보니 버스커버스커가 부른 동경소녀가 음원사이트에서 2천만회 재생됐더라고요. 후배 가수들 덕분에 제 노래가 많이 알려진 뒤 ‘내 음악이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구나.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었구나’하고 위로를 받았어요. 감사하고 행복했던 기억이죠.”
김광진의 노래들은 꾸준히 선후배 가수들이 부르고 있다. ‘가수들이 선택한 음악’의 원작자인 그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음악이 가지고 있는 멜로디의 힘이 아닌가 생각해요. 멜로디는 가슴 속에 있는 게 나오는 것인데, 듣는 사람들에게 진심이 전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광진은 자신의 곡이 후배들 개성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것을 볼 때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버스커버스커가 부른 동경소녀도 원곡과는 코드가 다르고 멜로디도 변했다.
“제 색깔하고는 좀 다른 편곡이었는데 사람들은 다른 형태의 것도 많이 좋아해 주는구나 싶었어요. 음악이라는 게 묘한 부분이 있어요. 의도한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니고, 너무 어려워서도 안 되고. 기존 것들과 너무 유사하면 안 되고 독창성이 있어야 돼요. 저도 여러 뮤지션의 아이디어를 흡수해서 다양한 시도로 음악을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10년간 직장 생활 후 그는 금융맨의 삶을 멈추고 음악인으로 복귀했다. 애널리스트 경력부터 펀드매니저까지 20여 년이면 충분히 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난해 더 클래식 결성 30주년 콘서트를 시작으로 공연장에서 관객들과 호흡하고 있다.
데뷔 이후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김광진은 자신의 음악 생활에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고 말한다. 공연을 하며 레게 머리를 하고 가죽 바지를 입는 등 스타일의 변화도 생겼다.
“팬 여러분의 응원이 많은 도움이 돼요. 지하철 광고도 해주고, 부산·광주지역 공연까지 모두 찾아주시고. 예전에는 못 느꼈던 응원이 많아 감사한 마음입니다. 공연을 그래도 정기적으로 하다 보니 좋은 라이브 무대도 쌓여 가고 있어요. 원래 고음이 잘 나는 보이스였는데 운이 좋게도 나이가 먹어도 변하지 않게 유지되고 있어요. 젊을 때보다 저음이 좋아져 음역대도 넓어졌어요.”
태어나 자란 동네 ‘배다리’ 사람
김광진에게 인천은 애틋한 도시다.
“인천 출신이라고 하면 좀 호감이 가고, 음악하는 사람 중에선 동문인 송창식 선배님이 있고, 박기영씨도 인천 출신인데 말 안 해도 서로 친근감이 있는 것 같아요. 항구 도시만 가지고 있는 낭만과 여러 문화가 가장 처음 들어오는 도시라 풀뿌리같은 매력도 있고요.”
김광진은 유년 시절을 보낸 동구 배다리의 기억을 담아 2017년 ‘배다리’를 발표했다. 이 곡도 아내가 작사를 맡았다.
태어나 자란 동네 배가 들어왔던 다리래 배도 다리도 이제는 없지 예쁜 이름만 거리에 남아 헌책방 많던 동네 교복 입은 친구들 모여 깔깔 이야기가 너무 많아 낙서 없는 교과서를 찾지 세월 지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도시를 찾아 떠나네
“등교하려면 매일 배다리를 지났어요. 추억이 많은 공간이죠. 그때 헌책방에서 낙서 없는 교과서를 운 좋게 발견하면 기뻐했던 기억이 나요.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 사실은 소외된 구도심이 됐어요. 배다리를 추억하는 사람들한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노래입니다. ”
이 노래는 멜로디를 만들 때부터 배다리에 대한 곡으로 정하고 작업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게도 특별한 곡이다.

그의 고향 사랑은 응원하는 스포츠팀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삼미 슈퍼스타즈 열성팬이다. 옛 경기를 생생히 기억할 정도다. 82학번인 그는 프로야구의 시작부터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화제의 선수 장명부에 대한 추억도 숭의경기장에서 지켜봤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그 책 주인공 이야기가 그냥 제 이야기더라고요. 첫해 경기장에 가서 분한 마음을 꾹꾹 집어삼키면서 ‘우리도 언젠가는 이기고 말거야’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지금 인천에는 SSG 랜더스가 있지만, 삼미 슈퍼스타즈 선수들을 따라가다 보니 키움 히어로즈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농구를 직접 하고 경기를 관람하는 것도 좋아한다.
“제가 졸업한 송도중, 제물포고는 다 농구부가 있는 학교입니다. 송도중은 개인기를 발휘하는 농구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유명한 선수가 많이 배출됐어요. 주말에는 가끔 이충희 선배 등이 와서 후배들이랑 하는 경기를 많이 지켜봤어요. 제물포고에도 농구부가 생겼는데 오세근 선수 등 좋은 선수가 많이 배출돼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90년대 대표 뮤지션 김광진의 꿈

오는 3월29일에 여는 단독 공연 ‘Song Book 콘서트’ 준비에 여념이 없는 김광진은 관객과의 만남이 항상 설렌다고 했다. 이번 콘서트에선 기존 곡들을 더 어쿠스틱한 느낌으로 새롭게 편곡해 준비했다. 과거 공연에서 부르지 않았던 곡들도 목록에 추가했다. 가사를 책으로 엮어 공연에 온 관람객들에게 선물할 계획이다.
“이제까지 사랑을 받은 것도 너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노래가 많이 알려진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하지요. 이제 케이팝 산업이 많이 성장했고 많은 뮤지션이 활동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저도 이제 90년대 한국의 음악인으로서 한국의 음악을 다른 나라에 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올해는 해외에서도 활동을 하기 위해 차분히 공연 계획을 세우는 등 노력하고 있습니다. ”

■약력
1964년 인천 출생
1976년 영화초 졸업
1979년 송도중 졸업
1982년 제물포고 졸업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1988년 미시간 대학 경영대학원 MBA 취득
1989년 장은투자자문 입사
1994년 삼성증권 입사
2001년 국제공인재무분석사(CFA) 취득
2002~2011년 동부자산운용
■발매 앨범·곡
1991년 김광진 1집 앨범 ‘Virgin Flight’
1994년 더 클래식 1집 앨범 ‘마법의 성’
1995년 더 클래식 2집 앨범 ‘여우야’
1997년 더 클래식 3집 앨범 ‘해피아워’
1998년 김광진 2집 앨범 ‘My love my life’
2000년 김광진 3집 앨범 ‘It’s me’
2002년 김광진 4집 앨범 ‘솔베이지’
2008년 김광진 5집 앨범 ‘Last decade’
2014년 더 클래식 미니앨범 ‘Memory&A Step’
2017년 노래 ‘지혜’ ‘배다리’ 발표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