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과 예술 사이… 경계를 격파한 소년
공중서 펼치는 ‘자유’로운 꿈… “저만의 ‘품새’ 보여드릴게요”
홍콩선수권 우승후 ‘유퀴즈’ 출연… SNS 좋아요 수 등 인기 실감
독창적 음악에 기술·안무 등 흡사 ‘피겨’… 주특기는 아크로바틱
다문화 가정 자녀… 친구들 응원 등 주변서 나쁜 표현 못 접해봐
온몸 아프지만 매일 4시간 훈련, 곧 ‘亞 청소년 대회’ 출전도 기대
작고 어린 소년이 족히 3m 되는 높이로 뛰어올랐다. 이내 공중에서 한바퀴 돌며 동시에 8번의 발차기를 해냈다. 착지한 후 팔에서 손으로 뻗어내는 절도있는 동작들이 이어지다 자기 키만한 높이로 다시 뛰어올라 회전과 함께 뒤로 돌려찬다. 묘기에 가까운 기술과 태권도 특유의 ‘각’을 살린 동작들이 음악의 리듬에 절묘하게 들어맞을 때, 승패를 떠나 넋을 잃고 바라본다.
2024년 홍콩세계품새선수권 자유품새 17세 이하부 개인전 1위에 등극한 오산 성호고등학교 변재영 선수를 만났다. 이 대회에서 그가 펼친 경기영상은 이미 유튜브 조회수가 ‘천만뷰’를 넘어섰다. 영상을 본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대로 각성한 K-중딩’, ‘역대급 태권신동’, ‘힘든 시기에 국뽕(?)이 차오른다’ 같은 찬사를 보냈고 해외에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는 반응이 쇄도했다.
자유품새 세계 1위가 된 소감을 묻자 변 선수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나라를 대표해 경기를 할 때, 특히 태권도는 대한민국 문화이기도 해서 혹시라도 잘못하면 어쩌나 무섭기도 했어요. 열심히 준비한 걸 무사히 잘 끝내서 기뻤고, 무엇보다 태극기를 들 수 있다는 점이 너무 행복했어요.”

경기 영상에 반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인기도 실감한다. 최근엔 ‘유퀴즈’ 같은 인기프로그램에 출연해 얼굴을 알렸다. “인스타그램 릴스에 ‘좋아요’가 많이 눌리고 축하한다는 DM이나 친구요청 알림이 올 때도 많아요. 그럴 때 신기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특히 제가 하는 자유품새는 음악도 있고 기술도 많이 들어가서 꽤 볼 만한 경기인데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줘서 더 좋아요.”
자유품새 경기를 가만히 보면 한때 우리가 열광했던 ‘피겨스케이팅’을 보는 것 같다. 독창적인 음악에 기술과 안무가 적절히 배합된 피겨와 같이, 자유품새도 선수의 기술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연무선과 동작, 기술로 구성된다. 변 선수는 영화 위대한 쇼맨 OST를 편곡한 음악을 바탕으로 강력한 기술로 프로그램을 구성해 이번 경기에 나섰다. 변 선수를 가르치는 최우진 코치는 “선수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동작을 중심으로 어떤 음악이 잘 어울릴지를 고민해서 섬세하게 구성해야 하는 종목이 자유품새”라며 “코치진이 선수의 기량을 잘 알고 어떤 기술이 잘 훈련돼 있는지 알아야 자유품새 경기를 구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변 선수의 주 특기는 경기장에서 공중을 날아다니는 ‘아크로바틱’ 기술이다. 공중돌기와 동시에 8번의 발차기를 하는 동작은 웬만한 숙련자 아니면 쉽지 않은 기술이다. 더구나 이제 막 열일곱이 된 변 선수는 자유품새를 시작한 지 고작 2년 여밖에 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어요. 원래 다니던 태권도 도장에서 함께 운동하던 형이 재능이 있어 보인다며 아크로바틱 도장을 함께 다녀보지 않겠냐고 권유했어요.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게 너무 좋아서 계속 배우기 시작했어요.”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무렵, 자유품새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국대 선발전에서 변 선수는 모험을 강행했다. “처음 국대 선발전에 나갔는데 3등을 했어요. 도저히 형들을 이기기 어려울 것 같아 공식 경기에선 잘 안쓰는 기술을 하기로 코치님과 결정했어요.” 심기일전해서 나간 두번째 국대 선발전에서 선보인 기술은 터치 스와이프와 스위치 기술이다. 최우진 코치는 “재영이가 국대 선발에 주효했던 기술이 통상 공식대회에서 하기엔 어려운 기술”이라며 “공식대회에서 선보인건 재영이가 최초”라고 덧붙였다. 공식 선발전에서 이 기술을 해내기 위해 변 선수는 숱한 실패를 반복했고 고도의 훈련을 감내했다.
“평일에는 오산에 있는 도장에서 4시간 가량 매일 운동을 해요. 주말에는 성남 위례에 있는 도장에서 훈련을 이어 나갑니다. 선수니까 매일 운동을 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서 힘들진 않습니다. 다만 공중을 날아다니는 훈련을 하다보니 관절, 손목, 발목 등 각종 부위가 아픈데 참고 해야 할 때 가장 힘들어요. 그래도 훈련을 통해 그간 하지 못했던 기술을 해냈을 때, 또 기술 퀄리티를 조금 더 높였을 때 성취감도 크고 재미있어요.”
변 선수도 여느 아이들처럼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태권도 도장을 다녔다. 다른 것보다 유독 태권도가 재밌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공중에서 발차기를 하는 영상을 보고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태권도를 전문적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6학년 땐 국가대표가 돼야겠다는 꿈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녹록한 건 아니다. 축구나 야구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못했고 아직은 인프라도 잘 구축되지는 않은 상황. 선수와 코치가 인내하며 길을 찾아야 하고, 그리고 선수 부모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야 한다.
“아버지가 환경공무관으로 일하고 어머니는 화장품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계세요. 훈련비용에 경기에 한 번 나가면 대회비용도 너무 많이 들거든요. 말씀은 너 때문에 일하는 것 아니라고 하시지만, 훈련비용을 보여드릴 때마다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두 분이 맞벌이라 오기 힘든 것도 있지만, 제가 오지 말라고 하기도 해요. 지방에서 경기하면 엄마아빠 오기 힘들까봐…. 대신 경기 영상을 항상 보여드려요. 엄마가 SNS에 자꾸 못생기게 나온 걸 올려서 신경쓰이지만, 그래도 좋아하시니 좋습니다.”
변 선수는 조금 특별한 면도 있다.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를 둔 다문화 가정이다. 어머니를 많이 닮은 그가 세계 1위로 등극한 경기 영상엔 불편한 댓글들도 있었다. 변 선수를 가리켜 누군가 ‘혼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손흥민 선수한테는 순혈이라고 표현하냐. 같은 한국인끼리 순혈혼혈 따지면서 다르게 대우하는 게 인종차별’이라고 다른 누군가가 꼬집는 댓글 공방이 있었다.

“경기영상에 혼혈이라는 표현으로 싸우는 걸 봤어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직접 대면해서 나쁜 표현이나 말을 들어본 적은 없어요. 친구들과도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구요. 친구들은 제가 하는 운동이 멋있다고 응원을 많이 해줍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저는 저니까요.”
어떤 상황에도 주눅들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이 영락없는 ‘K-10대’다. 변 선수는 올 상반기에 있을 ‘아시아 청소년 태권도 품새 선수권 대회’를 준비 중이다. 이 역시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러내야 한다. “다양한 대회에 계속 참가해서 좋은 성적을 내고 싶습니다. 아직은 올림픽 종목에 자유품새가 채택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채택이 된다면 올림픽에도 꼭 나가서 경기를 해보고 싶어요.”
1등 선수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변 선수는 ‘변재영’만의 자유품새로 기억되고 싶다. “자유품새는 게임기 같아요. 할 수 있는게 굉장히 다양한데, 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도전과제들을 깰 때마다 해냈다는 성취감도 높구요. 열심히 훈련해서 언젠가 어떤 기술을 말할 때 ‘이건 변재영이 제일 잘한다’는 말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유명해질수록 다양한 눈과 말들이 그를 둘러쌀지 모른다. 편견으로 보든, 변재영 그 자체로 보든 그건 우리의 몫이다. 누가 뭐라하든, 이제 막 열일곱이 된 변재영은 자유롭게 날아올라 자신의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전진할 테니까.
■변재영 선수는?
▲2009년 오산에서 출생
▲오산 성호중 졸·성호고 재학중
▲2024년도 국가대표선수선발 최종전(겨루기, 품새) 3위
▲2024년 홍콩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자유품새 남자 개인전 17세 이하 1위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