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의병3·15항일운동 기념식 및 상징탑제막식’

북면 목동리에서 100여년전 만세 재현 퍼포먼스

14일 가평군 북면 목동리에서 열린 ‘제38회 가평의병 3·15항일운동 기념식 및 상징탑 제막식’에서 서태원 군수 등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2025. 3.14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14일 가평군 북면 목동리에서 열린 ‘제38회 가평의병 3·15항일운동 기념식 및 상징탑 제막식’에서 서태원 군수 등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2025. 3.14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100여년 전 가평지역 3·1운동 발상지인 북면 목동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퍼포먼스가 재현됐다.

가평군은 14일 서태원 군수, 김경수 군의회의장 및 의원, 임광현 경기도의원, 조완수 군 보훈단체협의회장 및 회원, 김우일 군 광복회장 및 회원, 각급 기관단체장, 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북면 목동리에서 ‘제38회 가평의병 3·15항일운동 기념식 및 상징탑 제막식’을 개최했다.

이날 제막된 상징탑은 가평 만세운동으로 모였던 사람들이 높이 들어 올린 두 팔과 태극기를 상징하는 형상으로, 상징탑 상부의 원형은 음과 양이 합쳐져 완전체를 이루는 태극으로 만세운동의 발상지를 상징하고 애국으로 국민이 하나됨을 표현했다고 군은 설명했다.

상징탑 내부에서 본 상부 모습. 2025.3.14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상징탑 내부에서 본 상부 모습. 2025.3.14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가평의병 3·15항일운동은 1919년 3월 15·16일 양일간 이규봉 선생의 주도로 북면을 시발로 가평 일대에서 3천200여 군민이 군청 앞에 운집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거한 거사다. 당시 일제의 총칼에 군민 23명이 희생되고 28명이 붙잡혀 모진 수난을 겪는 등 인명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독립운동의 대중적인 기반을 넓혀 애국애족정신을 확산시키는 분수령이 됐다.

가평군과 사료 등에 따르면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민영순, 신숙, 정한교 등으로부터 가평에서 3·1운동 전개를 부탁받은 이규봉은 ‘독립선언서’ 2권과 ‘독립신문’ 1매 가지고 가평으로 돌아와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후 이규봉은 그해 3월6일 북면 목동리에서 장남 이윤석, 제자 정흥교 등에게 3·1운동 발생 사실 등을 비밀리에 전파하고 다음날 제자, 지역유지 등과 거사일을 3월15일로 정한다. 이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 등을 제작해 가평읍 지역에 배포했으며 정기복, 정천수, 최인화 등이 비밀통문을 돌리며 주민들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14일 가평군 북면 목동리에서 열린 ‘제38회 가평의병 3·15항일운동 기념식 및 상징탑 제막식’에 참석한 서태원 군수가 분향하고 있다. 2025. 3.14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14일 가평군 북면 목동리에서 열린 ‘제38회 가평의병 3·15항일운동 기념식 및 상징탑 제막식’에 참석한 서태원 군수가 분향하고 있다. 2025. 3.14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마침내 거사일인 1919년 3월15일 북면 목동리 멱골에서 이규봉, 장기영, 최인화, 정흥교, 이만석 등이 선두로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며 가평읍으로 향했다. 가평읍에 도착한 후 이윤석이 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 소리가 천지를 흔들만큼 고조됐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날 저녁 일본 헌병에 의해 10여 명이 체포되고 주민 등 200여 명은 다음날 아침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일본 헌병은 총기를 발포하며 70여 명을 체포하는 등 만세운동을 강제 해산시켰다.

14일 가평군 북면 목동리에서 열린 ‘제38회 가평의병 3·15항일운동 기념식 및 상징탑 제막식’에서 서태원 군수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상징탑 제막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5. 3.14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14일 가평군 북면 목동리에서 열린 ‘제38회 가평의병 3·15항일운동 기념식 및 상징탑 제막식’에서 서태원 군수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상징탑 제막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5. 3.14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

북면 목동리 3·15독립만세운동 발상지 기념공원 내 메모 벽면에는 ‘가평의병 3·1운동은 극히 평화적으로 시위과정에서 군수나 면장 혹은 일본 경찰·헌병에게 위해를 가한 적이 없고 관공서에 몰려가서도 밖에서 시위하였을뿐 관내부로 들어가 기물을 파괴하는 등의 일 없이 질서정연하였다’고 기록돼있다.

가평/김민수기자 kms@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