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폭력 벗겨내니… 비로소 드러난 진실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생성형 AI 미드저니 이미지 재가공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생성형 AI 미드저니 이미지 재가공

3·15부정선거, 유신독재, 신군부독재 등 한국 민주주의는 자주 위협받았다. 국가 권력이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시민 인권을 탄압했다. 시민들은 언제나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는 폭력에 맞섰다. 특히 노동자들은 경제성장에만 초점을 맞춘 국가와 기업을 상대로 끊임없이 투쟁했다.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이하 인노회) 역시 1980년대 후반 노동 인권 보호와 민주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당시 인노회는 이적단체로 낙인찍혀 회원 대부분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30여년이 지나고서야 이들은 속속 무죄 판결을 받고 있다.

1986년 5월 3일 인천 미추홀구 옛 시민회관 사거리 일대에서 일어난 ‘인천 5·3민주항쟁’ 당시 모습. 인노회 회원들은 창립 전 인천에서 활동하며 5·3민주항쟁에도 참여했다.
1986년 5월 3일 인천 미추홀구 옛 시민회관 사거리 일대에서 일어난 ‘인천 5·3민주항쟁’ 당시 모습. 인노회 회원들은 창립 전 인천에서 활동하며 5·3민주항쟁에도 참여했다.

■ 노동인권보장 위해 만들어진 ‘인노회’

# 인노회의 탄생 배경

1980년대 대학생들 파업 등 주도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에 사망

정권 타도 ‘인민노련’ 결성 이후

노동자 중심 단체 창립 뜻 발족

1980년대 들어서면서 민주화운동은 체계적으로 변한다. 학생운동을 했던 대학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대거 노동현장에 취업하면서 파업 등 투쟁을 주도했다.

그러던 중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면서 인천 노동자들은 ‘살인·고문정권 타도를 위한 인천노동자투쟁위원회’를 결성, 전두환 정권에 항거했다. 이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결성으로 이어졌다. 6월 항쟁 등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그해 인민노련은 인천 곳곳에서 투쟁활동을 벌였다.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결국 대통령 직선제로 이어졌다. 그러나 인민노련 내부는 되레 그해 12월 예정된 대통령선거 참가를 두고 갈등을 겪었다. ‘비판적 지지’와 ‘후보 단일화’, ‘독자후보론’ 등으로 의견이 갈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노동자들은 활동 중인 단체들이 정치 투쟁 등에만 고집한다고 판단, 현장 노동자 중심의 대중적인 단체 창립을 준비했다. 이후 1988년 3월 창립대의원대회를 열어 인노회가 탄생하게 된다. 최고의결기구로 대의원대회, 집행기구로 운영위원회, 상임집행위원회, 사무국, 조직국 등을 뒀다. 사무실은 초기 부천 송내동에 있다가 인천 부평구 십정동으로 옮긴다.

인노회 설립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노동형제와 조국을 위하여 의로운 삶을 살며 상부상조하고 노동자로서 올바른 품성을 함양한다.

2. 회원, 나아가 노동형제들의 생존권과 민주적 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앞장선다.

3.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다.

4. 모든 노동자 단체와 단결하며 각계각층의 민주단체와 협력한다.

인노회는 이를 바탕으로 노동자들의 요구를 담은 홍보물을 발행하고, 노동 인권 보장을 위한 집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가 1988년 12월 개최한 행사 포스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가 1988년 12월 개최한 행사 포스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30년 만에 전과자 낙인 지우다

# 결성 1년만에 조직 와해

1989년 정부서 이적단체로 규정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15명 구속

협박·강요… 최동 열사 끝내 숨져

2000년 명예회복 법 제정 ‘기회’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인노회는 결성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조직이 와해됐다. 1989년 1월 치안본부(현 경찰청)가 인노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회원 18명을 연행, 15명이 구속되면서다.

치안본부는 인노회 회원 여럿을 영장도 없이 연행해 서울 홍제동 대공분실로 끌고 갔다. 조사를 받는 동안 경찰은 회원들의 잠을 재우지 않거나 인노회 활동 목적이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이라고 진술하도록 강요·협박했다고 한다.

검찰도 당시 회원 6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백영엽 서울형사지법 판사는 “인노회는 이적단체가 아니라 노동운동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하지만 며칠 뒤 재청구된 구속영장 중 5명 것을 조희대 판사(현 대법원장)가 발부했다.

이후 나머지 회원들도 속속 체포·구속됐다. 이들은 “이적단체가 아니다” “반국가단체 활동을 한 적이 없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실형이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들은 2000년 1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명예 회복을 노렸다. 인노회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15명 중 대부분이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성과를 인정받았다. 회원 중 신정길(69)씨만 인노회 활동에 대한 민주화운동 성과를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그는 2015년 서울고법에 인노회 사건에 대한 재심을 신청했다. 그 결과 2017년 7월 “인노회는 이적단체가 아니다”라는 취지의 판결을 받았고, 최근까지 열린 다른 회원들의 재심에서도 이같은 결정이 이어지고 있다.

그중 최동씨는 고문 후유증을 겪다 1990년 30세에 숨져 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법에서 내린 무죄 판결을 끝내 듣지 못했다.

1986년 5월 3일 인천 미추홀구 옛 시민회관 사거리에 모인 인천시민들의 모습. 1986년 5월 3일 인천 미추홀구 옛 시민회관 사거리 일대에서 일어난 ‘인천 5·3민주항쟁’ 당시 모습. 인노회 회원들은 창립 전 인천에서 활동하며 5·3민주항쟁에도 참여했다. /(사)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제공
1986년 5월 3일 인천 미추홀구 옛 시민회관 사거리에 모인 인천시민들의 모습. 1986년 5월 3일 인천 미추홀구 옛 시민회관 사거리 일대에서 일어난 ‘인천 5·3민주항쟁’ 당시 모습. 인노회 회원들은 창립 전 인천에서 활동하며 5·3민주항쟁에도 참여했다. /(사)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제공

# 재심 신청, 세간 주목 이유

동료 밀고, 대공특채 의혹 김순호

“당시 이적단체 맞다” 주장에도

유죄 선고 15명 무죄 판결 이어져

신정길씨 “재심 판결에 큰 의미”

인노회 활동과 재심 신청이 세간의 주목을 다시 받은 것은 2022년이다. 윤석열 정부 초대 경찰국장으로 임명된 김순호 당시 치안감이 인노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동료들을 밀고하고 1989년 ‘대공특채’로 경찰이 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이미 이적단체가 아니라는 법원 판단이 수차례 나온 후였지만, 김 전 국장은 국회 등에 출석해 줄곧 “인노회는 (당시엔) 이적단체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찰국장 임기를 마친 뒤 경찰대학장(치안정감)을 지내고 퇴직했다.

인노회 회원 중 처음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신정길씨는 “인노회가 이적단체가 아니라는 재심 판결은 국가 폭력에 맞섰던 이들에게 아주 큰 의미”라면서도 “아직까지 무죄 판결을 받지 못한 인노회 회원 등 인천에서 활동했던 여러 노동·민주화운동 단체의 재심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폭력을 행사했던 경찰, 검찰, 법원 인사들은 고위직까지 올라가며 권력을 누렸다”며 “이들에 대한 책임 소재도 꼭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