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릉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이 1408년 조성된 이후로 1855년 효명세자인 문조의 수릉까지 450여년간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모셔졌다. 사진은 건원릉 입구. 2025.3.27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동구릉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이 1408년 조성된 이후로 1855년 효명세자인 문조의 수릉까지 450여년간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모셔졌다. 사진은 건원릉 입구. 2025.3.27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다시 꽃이 피는 4월이다. 구리시 곳곳에는 노오란 개나리가, 하얀 목련이 상막했던 도시를 깨우고 있다.

봄을 찾는 마음은 동구릉(東九陵)으로도 향한다. 해마다 3월이 되면 서울 동편에 9기의 왕릉이 모셔져 있는 이곳 관람객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한다. 한여름을 지나 가을에 크게 증가하는 패턴을 보인 관람객 수는 지하철 8호선의 영향으로 증가폭이 더 커졌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의 자료에 따르면, 전년동월대비 24년 10월은 18.3%, 11월은 76.3% 증가했다. 24년 전체 관람객수는 23년보다 14% 증가했다.

봄이 되면서 구리시와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이하 동구릉관리소)는 문화해설사 설명 시간을 오전에 한 차례 늘렸다. 이에 따라 오전 10시, 10시30분, 오후 1시, 3시를 맞춰가면 능에 담긴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혼자서 호젓하게 사색하기 좋은 장소이지만 익숙하지 않다면 문화해설사 설명을 듣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특히 동구릉은 능침을 개방하지 않아 정자각에서 돌아서길 반복하다보면 흥미를 잃기 쉽다.

지난해 8월 지하철 8호선에 동구릉 역이 생기면서 관람객수가 크게 늘었다. 자료는 공공데이터포털에 게시된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의 자료를 재가공한 것이다.
지난해 8월 지하철 8호선에 동구릉 역이 생기면서 관람객수가 크게 늘었다. 자료는 공공데이터포털에 게시된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의 자료를 재가공한 것이다.

능침이 개방되지 않아 가장 아쉬운 부분은 관람객이 태조의 능지가 명당으로 꼽히는 이유를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명나라 사신 기보가 이곳의 지세를 보고 감탄했다는 얘기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건원릉 자리는 의령 남씨 가문에서 미리 잡아 놓은 묏자리엿는데 태조의 신하 남재가 왕이 관심을 갖자 이를 내줬다고 알려졌다. 태조는 남재에게 다른 땅을 정해 줘, 이를 ‘딴릉’으로 부른다. 동행한 조미선 구리시 문화관광해설사는 “능침에 오르면 롯데타워가 삐죽 보일 뿐 막히는 것이 없이 훤히 내다보인다”고 말했다.

건원릉 정자각 오른쪽에는 세 가지 계단이 있다. 화려한 계단이 향이 올라가는 계단이고, 가장 안쪽 돌 계단이 제주인 왕이 올라가는 계단이다. 나무 계단은 제관들 것이다. 2025.3.29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건원릉 정자각 오른쪽에는 세 가지 계단이 있다. 화려한 계단이 향이 올라가는 계단이고, 가장 안쪽 돌 계단이 제주인 왕이 올라가는 계단이다. 나무 계단은 제관들 것이다. 2025.3.29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곧 청완예초일이 다가온다. 4월5일이면 태조의 유훈으로 잔디 대신 심은 봉분의 억새를 깎는다. 6월27일에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주관하는 친향례도 열린다. 세계문화유산에서 진행되는 ‘규범화된 제례의식’을 보러 관람객들도 모여든다. 옛 의식에 관심이 많다면 이 날짜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능은 그 ‘규범화된 제례의식’을 치르는 공간이다. 홍살문 옆 판위에서 임금은 조상께 인사를 한다. 궁에서는 어로가 중심이지만, 이 의식에서 만큼은 제향이 중심에서 걸어간다. 어로는 향로 오른쪽에 마련돼 있다. 정자각으로 오르는 가장 화려한 계단이 향로이고, 그 옆 겸손한 돌계단이 어로이다. 함께 온 제관들의 계단은 나무로 제작했다.

정자각에 마련된 신위평상은 색이 다르다. 고종황제가 추존한 황제는 그신위가 황금색으로, 그외의 왕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동구릉 내 예감(사진 왼쪽)과 건원릉 예감(사진 오른쪽). 2025.3.27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동구릉 내 예감(사진 왼쪽)과 건원릉 예감(사진 오른쪽). 2025.3.27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제향의 마지막 절차로 축문을 불사르는 곳을 예감이라 하는데 다른 능은 땅에 틀이 만들어져 있는 반면 건원릉만 유일하게 돌기둥으로 세워져 있다. 수백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

임진왜란 때 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이 훼손돼 시신이 없는 것과 달리 ‘신이 있는 듯하다’는 기록이 여러번 나올 정도로 전쟁도 태조의 유택을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혀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종의 서체를 볼 수 있는 건원릉 추숭비에는 대한제국의 문양인 오얏꽃(자두꽃) 문양이 새겨져 있고, 그 근처에 일부 훼손된 흔적이 있다. 건원릉 정자각 월대에도 다수의 구멍이 있다. 이에 대해 조 해설사는 “6.25때 총탄자국”이라며 “건원릉 외에도 홍살문 주초석에도 같은 흔적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전면에 세계진 오얏꽃 무늬가 눈에 띈다. 추숭비 후면에는 고종황제가 황제국을 세운뒤 태조를 ‘고황제’로 추존하면서 쓴 비문이 있다. 2025.3.27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전면에 세계진 오얏꽃 무늬가 눈에 띈다. 추숭비 후면에는 고종황제가 황제국을 세운뒤 태조를 ‘고황제’로 추존하면서 쓴 비문이 있다. 2025.3.27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

한글을 남긴 세종은 그의 업적과 달리 가족사가 비통하다. 아들인 문종은 세자 시절 두 왕세자빈이 폐위된 뒤 세번째 세자빈에서 단종을 얻었으나, 하루만에 죽었다. 안산에 묻혔던 현덕왕후는 단종복위 운동에 친정이 연루되면서 세조가 능을 파헤쳐 관을 바다에 버리고 시신을 토막내 소각한 다음 강에다 뿌렸다고 전해진다. 문종과 죽어서도 헤어져 있던 현덕왕후는 중종 때인 1513년애 와서 현릉에 잠드는데,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 둘을 갈라놓았던 소나무가 고사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동구릉에 온다면 건원릉의 신도비와 목릉의 정자각, 숭릉의 정자각도 유심히 봐야한다. 남한에 남은 조선왕릉 40기 중 신도비는 건원릉, 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만 있는데, 그중 세종의 신도비는 영릉이 아닌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다. 숭릉의 정자각은 유일한 팔작지붕 정자각으로, 목릉의 정자각은 유일한 조선 왕릉의 유일한 다포식 공포를 쓰고 있다.

구리/권순정기자 s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