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경기도 전역 타올랐다… 탄압에도 꺼지지 않은 독립염원
1호선 군포역 앞 불꽃형상 기념탑 2016년 제작
市 “지역 정체성·애향심 고취… 매년 기념행사”
1919년 3월 31일 의왕 주민들 800여명도 동참
수원 대표 독립운동가 김세환 ‘횃불 시위’ 시작
연천·가평·양주·부천·김포·광주·이천 등 확산
제암리 학살·김흥열 일가 참살 등 아픈 역사도

80년 전, 온 나라는 해방의 기쁨에 목놓아 울었다. 한·일 병합 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남녀노소 불문, 무려 35년간 나라 잃은 설움 속 독립을 위해 싸웠다.
항일의 시간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있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올해, 광복의 기쁨 속 탄생한 경인일보는 창간 80주년을 맞아 경기도 일대에 새겨진 항일의 기억을 되짚어 광복의 의미를 오롯이 기록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기리기리 기억돼야 할 자랑스런 지역의 역사.”
수도권 전철 1호선 군포역 앞엔 거대한 기념탑이 있다. 1919년 3월 31일 이곳에서 있었던 만세 운동을 기리기 위해 2016년 무렵 만든 것이다. 높이만 무려 11m. 3개 기둥 위에 항일의 혼을 의미하는 불꽃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3·1 운동에서 촉발된 만세 운동은 그 당시 경기도 곳곳으로 확산됐다. 군포 3·31 만세 운동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안양 호계동 일대는 1905년 경부선 개통과 맞물려 큰 장이 열렸던 곳이었다. 어김없이 장이 열려 시흥군 남면, 수원군 의왕면 등 주변 지역 곳곳에서 족히 2천여명의 인파가 몰렸던 1919년 3월 31일, 독립을 염원하는 외침이 이어졌다. 독립을 부르짖으며 1.8㎞ 떨어진 지금의 군포역 앞(당시 이곳엔 군포장경찰관 주재소가 위치했다)까지 행진하던 이들을 향해 일본 경찰들은 발포했다.
3·31 만세 운동을 기념하자는 움직임은 광복 69주년이었던 2014년 8월 무렵부터 본격화됐다.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을 기념해 선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는 동시에, 지역 주민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취지였다. 2년 뒤인 2016년 3월 31일, 지금의 기념탑이 완공됐다. 3·31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부턴 기념 행사도 매년 진행하고 있다.

지난달 31일에도 기념행사가 실시됐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총칼 앞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을 외치던 선열들의 기개를 되새겼다. 행사의 일환으로 군포 3·31 만세운동을 기념해 전국 학생들이 그린 그림들이 지난 4일까지 기념탑 주변에 전시되기도 했다. 과거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과 경기도, 군포시가 있을 수 있다는 감사함이 형형색색 그림들에 담겨 있었다.
뜨거웠던 그날, 비단 군포에서만 만세 운동이 있던 건 아니다. 같은 날 의왕군 주민 800여명도 의왕면사무소와 고천주재소를 오가며 만세 운동을 벌였다. 3·1 운동 이후 서울에서 진행된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성주복 선생과 친구인 이복영 선생이 계획했다. 군포 만세운동과 마찬가지로 총을 동원한 일본 군인들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의왕시와 지역 시민단체들 역시 지역 내에서 전개된 만세 운동을 매년 기념하고 있다.
3·31 독립 만세 운동을 매년 기념하는데 대해 군포시 측은 “우리 지역에 이런 자랑스런 역사가 있었다는 점을 알려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는 취지”라며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애향심을 키우는 큰 요인이 된다고 판단해 매년 기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기도, 독립 만세 운동 최대 발생지…“과거가 현재 만든다”
저항의 바람은 이미 3월 1일 당일부터 경기도에 불어왔다. 1919년 3월 1일, 역사적인 만세 운동이 서울에서 촉발됐을 때 같은 날 수원에서도 수백여명이 일제에 저항하는 횃불 시위를 벌였다. 수원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 김세환 선생이 이미 한 달 전인 2월부터 만세 시위를 계획했지만, 3월 1일 당일 시행을 앞두고 일본 경찰이 이를 감지하자 횃불 시위로 대체했다.
수원지역에서 피어오른 항일의 불꽃은 삽시간에 경기도 전역으로 확산됐다. 연천과 가평 멱골, 양주군 진접면, 부천 소사리와 김포 오라니장터, 광주군 돌마면, 이천 오천장터, 평택 현덕면 등 경기 남북을 가리지 않았다. 장이 열려 인파가 많이 몰리는 날이 그 지역의 만세 운동날이었다. 3·1 운동에 참여했거나 이를 서울에서 목도한 지역 유력 인사들이 주축이 됐다. 의도적으로 수천여명을 모은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선창하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일제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마음 속 항일의 의지가 거대한 “대한 독립 만세” 함성으로 번지는 것은 결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람은 어느새 폭풍이 됐다. 안성시 원곡면에서도 어김없이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됐는데, 서울 3·1 운동을 목격했던 최은식 선생 등을 중심으로 무려 2천여명이 이틀에 걸쳐 독립을 외쳤다. “조선이 독립하면 일본 주재소, 우편소는 필요 없다”는 외침이 더해져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불태웠고 놀란 일본인들이 인근 지역으로 도피하는 일마저 벌어졌다. 단 이틀이지만, 지역에 짧은 해방을 가져다줄 정도로 강렬했다. 당시 안성군 양성면·원곡면이 전국적으로도 가장 저항이 거셌던 지역으로 분류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최 선생을 비롯한 주도자들은 징역 12년형을 받는 등 중형을 받기도 했다. 대표적인 만세 운동이었던 4·1 만세 운동의 흔적은 그 당시 현장이었던 성은 고개가 ‘만세 고개’로 명명되는 등 지역 곳곳에 남아있다. 만세 고개 꼭대기엔 안성 3·1운동 기념관이 들어섰고, 매년 기념행사도 열리고 있다.

독립의 의지가 무참한 학살에 짓밟히기도 했다. 군포장이 열렸던 3월 31일, 수원군 향남면 일원에서도 장이 열렸다. 유학자 이정근 선생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인 1천여명이 함께 부르짖었다. 총칼이 동원된 며칠 간의 진압 과정에서 마을은 쑥대밭이 됐다. 4월 6일 수촌리 마을을 불태운 일본군과 경찰은 도망쳐 나오는 주민들에게 총칼을 겨눴다. 급기야 4월 15일엔 검거되지 않은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로 모이게 했다. 총을 쏘고, 불을 질러 그야말로 ‘학살’했다. 이어 고주리로 이동해 결혼식을 위해 모여있던 김흥열 선생 일가를 참살했다. 이 같은 일제의 만행은 선교사이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였던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에 의해 국제 사회에 알려졌다. 제암리의 참상, 그럼에도 꺾이지 않던 항일 정신은 순국 기념탑 등 화성 제암리 3·1 운동 순국 유적을 통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난해엔 김흥열 선생 일가가 국립묘지에 안장되기도 했다.
무자비한 탄압에도 독립을 향한 염원은 꺼지지 않았다. 당시 서울·경기도에서 발생했던 만세 운동은 400건가량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항일의 불꽃이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지역이었던 셈이다.

군포역 앞,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그렸을 그림에는 ‘과거가 현재를 만든다’ ‘독립 만세를 해주셔서 지금 우리가 행복해요’라고 적혀있었다. 만세 운동은 처음으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주권을 외친 평화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총칼에도 굴하지 않던 그 당시 경기도민들의 저항은 지역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고 대한민국의 근간이 됐다. 위기 때마다 광장을 물들여온 함성과 빛은 106년 전 이토록 위대한 과거에서부터 시작됐다.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