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강인한 신념과 섬세한 심성이 조화를 이룬, 보기 드문 양성적 인간이었다.”
‘김대중 자서전’의 저자인 유시춘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이사장은 김대중 대통령을 한 문장으로 이렇게 정의했다. 유 이사장은 29일 인천 중구 복합문화공간 ‘개항도시’가 ‘대통령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마련한 인문학 강좌 강연자로 나서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유 이사장은 김 전 대통령이 수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투옥·망명·연금의 고난을 당했음에도 대통령이 된 것을 두고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유 이사장은 “대한민국은 해방과 동시에 민주주의라는 선물을 받았지만, 이를 구현할 수 있는 국민들 역량이 부족해 오랫동안 독재 체제를 벗어나지 못했다”며 “목숨을 잃을 위기만 다섯 번을 넘기고 대통령이 돼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한 김 전 대통령의 삶을 돌이켜보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유 이사장은 김 전 대통령을 ‘양성적 인간’으로 평가했다.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고한 자세를 갖고 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일관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강한 남성성을 가졌지만, 일상에서는 매우 섬세하고 자상한 여성성을 함께 갖춘 인물로 평가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1980년 전두환 군사정부 당시 사형을 언도받고 옥중에 수감돼 있을 때 쓴 편지에 그의 심성이 드러난다”며 “원고지 80장 분량에 아주 작은 글씨로 자신의 철학과 당시 심정을 적어내려간 글을 보면서 강인한 신념과 섬세함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고 했다.

군사정부 시기 김 전 대통령은 ‘과격한 빨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유 이사장은 이 표현을 두고 “단군 이래 가장 심각한 거짓말”이라고 평가하며 김 전 대통령을 ‘민주적 시장주의자’라고 정의했다. 그 누구보다 자유시장주의 체제를 옹호했지만, 자본주의의 폐해로 양극화가 극대화하면 약자와 소외자를 배려하는 정책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게 김 전 대통령의 정책 철학이었다는 설명이다.
유 이사장은 “김대중 정부가 소득 최하위 20% 국민에게 기초생활연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펼친 게 대표적”이라며 “이 제도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에서도 굶어죽는 사람이 나왔을 것이다. 당시 이 제도를 두고 반대가 심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이를 관철시켰다”고 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면서 주목받고 있는 ‘K-컬처’ 산업 성장도 김 전 대통령 재임기에 기틀이 마련됐다. 과거에는 북한과 관련이 있거나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예술인에 대한 작품을 철저히 통제했는데, 김 전 대통령이 이를 해제하면서 문화적 상상력이 극대화했다는 평가다.
유 이사장은 “김 전 대통령 재임기에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이 나왔다”며 “남북 군인들이 어울리는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영화는 그 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영화 소재였다”고 했다.
이어 “6월 3일 대선을 통해 출범할 새 정부의 리더들도 정치 본령에 집착하지 말고, 김 전 대통령이 가졌던 문화에 대한 자세를 추구하길 바란다”며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자유주의자의 철학을 차기 정부가 구현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유 이사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인사 정책도 현재 정치권이 깊이 있게 참고해야 할 덕목이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과 함께 주요 요직에 경쟁 관계에 있던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국정원장에는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사무총장을 지낸 이종찬 현 광복회장을 앉혔고,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노태우 정부 정무수석이었던 김중권 전 의원을 임명했다. 또 박정희 정부 당시 포항제철(현 포스코그룹) 창업주인 군인 출신 박태준 전 회장을 국무총리로 기용하기도 했다.
유 이사장은 “김 전 대통령의 인사를 두고 지지자들은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화해와 용서’라는 그분의 가치는 사람을 쓰는데도 반영됐다”며 “독실한 크리스천 신자로서 화해와 용서, 통합을 굉장히 중시했던 인물”이라고 평했다.
한편 개항도시가 마련한 ‘대통령을 말하다’ 인문학 강좌는 오는 5월27일까지 격주 화요일 7시마다 열린다. 다음 달 13일에는 유시민 작가가 ‘대통령 노무현을 말하다’를 주제로 강연할 예정이다.
/한달수기자 dal@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