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샘골(현 본오동)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 최용신이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함남덕원 태생으로 반월지역에 파견됐던 최용신은 주민들의 냉대에서부터 일경의 탄압까지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그 와중에서 운동의 산실인 샘골강습소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지역유지 염석주(廉錫柱·1895~1944)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세상은 최용신만을 기억하고 있지만 염석주의 활동은 결코 이에 뒤지지 않는다. 신간회 수원지회 부지회장으로 지역의 애국애족운동을 이끌었는가 하면, 만주에 농장 60여만평을 일궈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조달했다. 눈을 감은 곳은 서울 서대문적십자 병원. 동포의 밀고로 체포돼 18일동안 온갖 고문을 당하다 병원으로 옮겨진 지 3일만에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3·1절을 앞두고 '이름없는 독립운동가' 염석주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려는 움직임이 활기를 띠고 있다. 최용신의 정신을 계승한 안산 샘골교회 김우경·홍석필 장로 등 교회원로들은 20일 “염석주 선생에 대한 자료수집에 힘을 쏟은 결과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며 “3월 안에 다시 보훈처에 추서청원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이 발굴한 자료 중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는 국사편찬위원회 발간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3에 염석주는 신간회 소구역 대표회원으로 일본경찰 '고등계요시찰인(高等係要視察人)'으로 지목돼 있다. 또 '수원시사1'(1996刊)에 수록된 신간회 수원지회 활동을 보면, 1927년 설립된 신간회 수원지회는 구국민단 참여인사와 지역유지들로 구성됐는데 이듬해 부지회장으로 선출된 염석주의 사회로 ▲조선민족억압 법령철폐에 관한 건 ▲일본이민 반대에 관한 건 ▲부당세금반대에 관한 건을 결의한 것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 '한말일제하 수원기사색인집'(이승언著,수원문화원刊), 안산시역사자료집(안산문화원刊)과 '기전문화 8집'(기전향토문화연구회刊) 등에도 활동내용이 산발적으로 기재돼 있다.

밝혀진 자료를 통해 행적을 더듬어보면 염석주는 '경기도 수원군 일형면 율전리 366'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삼일학교(감리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안산 사리 막고지(본오동)에 자리를 잡고 개량농사를 지으면서 애국운동을 암암리에 전개했다.

이때 만난 사람이 최용신 선생. 처음에는 여성이라고 얕잡아봤지만 차츰 최용신의 됨됨이와 뜻에 감동을 받아 '샘골학원' 이사장직을 맡아 생활비와 운영비를 대는 등 강습소 운영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가장 눈에 띄는 활동은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땅을 식산은행에 저당잡힌 돈으로 만주 북간도에 60만평의 토지를 구입한 것. 여기에 샘골 주민 100여명을 이주시켜 경작한 곡식 전부를 독립군자금과 군량미로 제공했으며 그 과정에서 독립군 모집책임자였던 몽양 여운형(1885~1947)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렇듯 염석주는 만주와 안산을 오가는 스케일 큰 활동을 전개하다 1944년 일경의 첩자 이우정의 밀고로 체포돼 전기고문 등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4월 26일에 49세의 생을 마감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밀고자 이우정은 광복뒤 애국자로 상을 받았다.

추서를 추진하고 있는 김우경 장로(67·안산시 중앙동)는 “일본고등계순사 오야마가 염 선생을 만주까지 추적했을 정도로 독립운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으나 활동이 음성적인데다 체포,구금됐던 동대문경찰서가 6·26때 화재로 인해 문서가 소실되는 바람에 기록을 찾기가 힘들었다”며 “반월에서마저 잊혀지고 있는 선생의 이름이 독립유공자 추서를 통해 하루빨리 되살아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염석주 선생은 지난 95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최용신 선생과 함께 추서 청원됐으나 자료부족으로 누락된 바 있다. /柳周善기자·jsu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