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아리랑의 <기호 0번 대한민국 김철식> 은 한마디로 재미있다. 그리고 가슴뭉클한 감동이 있다. 공연시간은 1시간40분 가량. 소극장 공연작치고 다소 길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극전개가경쾌하다.

객석에서 수시로 터져나오는 웃음과 갈채. 그러나 그것이 결코 경박하거나 허망한 게 아니다. 가슴의 체증을 쭉 내려가게 하는 통쾌함이 있으면서도 감동은 감동대로 진하고 오래 남는다. 공연장을 나서자 마자 금방 날아가고 없는 휘발성 재미가아니라는 얘기다.

연극은 요즘 한창 달아오르는 총선 분위기와 얼추 겹친다.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 김철식이라는 인물은 낙선의 고배를 마시면서도 계속 민의원 선거판에 뛰어든다.

그가 갖고 있는 것이라곤 조국과 민족에 대한 불타는 정열뿐. '여러분의 양심의 한표가 국가와 민족을 바꾸는 것이외다. 이번에는 바꿉시다'는 외침은 지금 들어도 딱들어맞는 구호다.

연극은 선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가진 건 없어도 지조와 애국심 하나로 꿋꿋하게 버텨온 김철식의 고집과 주장에 무한한 애정을 보내고 있다. 낙선을 거듭하고 가는 길 비록 외롭지만 '나는 나대로 갈 길이 있소' '껍데기는 가라'고 목청을 높이는 그는 현실에 쉽게 영합하는 현대인들에게 자성의 시간을 갖게 한다.

김철식은 틀에 갇혀 사는 사람이 아니다. 끊임없이 비판하고 외치고 저항하며 말 그대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사는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나는 한 마리의 외로운 늑대'라고 말한다. 흠모하는 위인은 자신처럼 외로운 늑대로 살아온 사람들. 몽양 여운형과 백범 김구의 암살소식에 식음을 전폐하며 통곡하는 김철식인 것이다.

그의 일생은 굴곡의 현대사를 켜켜이 담고 있다. 동지들을 규합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등 항일운동에 나서고, 해방 후 잇딴 지도자의 암살에 '한 사람의 지도자를 갖기도 어려운데 우리는 왜 이렇게 자꾸 그들을 쓰러뜨리기만 하느냐'고 외치기도 한다. 결식아동 퇴학처분 반대와 사사오입 개헌반대, 3.15부정선거 반대 등에서도 노도와 같은 역사의 질곡이 느껴진다.

자칫 따분할 수도 있는 이 연극은 신속한 극적 전환과 쉴새없는 웃음 유발 등으로 지루함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원천봉쇄한다. 특히 김철식 역을 맡은 박철민 씨의 숨가쁜 연기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 특유의 입담도 입담이지만 마치 요술이라도 부리듯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기민하고 폭넓은 연기력이 일품이다.

힙합 댄스를 추고 싶다며 부모를 들볶는 해리(윤혜영)에게서는 김철식의 투철한 자기주관이 엿보이고, 자식의 '일탈 '로 속을 끓이는 경수(김비오.김윤환)와 그의 처(정우정.조현숙)에서는 보통의 길을 조심스럽게 가고자 하는 소시민의 모습이 내비친다. 이런 모습은 김철민의 형인 만식(김태민)과 그의 처(오연실.김동순)에게서도 발견된다.

극에 인간적 따뜻함을 배가시키는 것은 유치장에서 만난 술집 아가씨 애자(이영주)와 김철민의 만남이다. 김철민은 마음이 외로울 때면 애자가 차린 '대한민국 국밥집'을 찾아 절망을 달래고 위안을 얻는다.

최근 극단대표를 맡은 방은미 씨는 첫 작품인 이 연극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있다. 해리를 비롯한 5명의 힙합 댄서 지망생들을 적절히 끌어들여 시대적 한계를 거뜬히 넘게 했고, 좁은 무대에 정교하게 설치된 무대를 십분 활용하는 재치를 보이고 있다.

공연장 : 서울 대학로의 소극장 아리랑. 공연시간 : 1일부터 4월 30일까지. 화-목 오후 7시 30분, 금 오후 4시 30분과 7시 30분, 토-일.공휴일 오후 3시와 6시. 문의 02-741-5332/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