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대희년을 보내고 있는 천주교수원교구(교구장·최덕기주교)가 교내·외 구석구석을 밝히는 뜻깊은 행사를 연중 펼치고 있는 가운데, 순교성월 9월의 순교자대축일인 지난 20일 공식행사로는 처음 '수원지역 순교자 현양대회'를 열어 관심을 모았다. 이날 수원지역 순교자와 순교지 등을 밝혀 주목을 끈 김학렬 신부(동수원성당)의 강연 요지를 소개한다.
수원지역 순교자는 병인박해때 순교했다. '치명일기(致命日記)'에 33명, 가톨릭대사전에 59명 등 기록으로 남아있는 사람만 100여명이며 이름없는 순교자도 수십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평신도이고 충청도 출신도 다수 포함돼 있다. 사제를 비롯한 주요 신자들은 대부분 서울로 끌고갔기 때문에 새남터에서 많이 순교했다.
1779년 천진암강학회를 기준으로 해 221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천주교는 모두 4차례의 박해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그리고 최악의 박해로 기록된 병인대박해다. 병인양요의 직접적 원인이 된 이 박해는 병인년인 1866년 초 시작돼 1871년까지 무려 6년 동안 계속됐으며 대원군이 실각한 1873년에야 마무리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대규모 박해로 전국에서 무려 8천명 이상이 순교, 천주교인의 씨가 마를 정도였으며 한국천주교도 치명적 타격을 입어 한불조약이 체결된 1886년 이후에야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 대원군은 나름대로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있는 인물이었으나 당시 외세침략과 국내 정치상황이 미묘하게 얽혀 정략적으로 천주교를 박해했다.
수원에서는 화성행궁과 가까운 중영(현 종로사거리 종로교회 자리로 추정)에 신자들을 가두었다가 처형했다. 방법은 목을 치는 참수(斬首), 밧줄로 목을 메다는 교사(絞死), 때려죽이는 장하치명(丈下치명(致命), 생매장 심지어 들보를 위에서 떨어뜨려 한꺼번에 20여명을 절명케하는 새로운 사형방법까지 시도됐다.
김 신부는 이처럼 많은 순교자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당시 어수선한 사회분위기는 사람들을 내세지향적으로 만들었고, 사랑을 중심으로 한 포괄적 교리와 평등사상이 강한 호소력을 불러일으켰다”며 “특히 하층민들은 신앙공동체를 지상의 천국으로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김 신부는 또 “베드로 순교지인 로마 베드로성당이나 명례방집회지인 명동성당처럼 수원지역 순교자 고난의 현장인 북수동성당·소화초교 일대에 성지개발이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수원교구는 이에따라 성지 개발과 일대 고증작업, 자료수집 등 진행중이며 순교자 시성 순서도 밟아나간다는 계획이다.
한편 교구내 병인박해 순교지로는 화성 남양성모성지(357-3828), 안성 죽산성지(676-6700), 광주 남한산성성지(749-8522) 등이 있다. /柳周善기자·jsun@kyeongin.com